친구 Ullie와 함께 1999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외국인 친구가 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 10시부터 12시까지 차 한잔과 다과, 그렇게 만나게 된지 3년이 되어간다.
그녀의 이름은 Ullie. 금발의 긴 머리를 땋고 때로는 올려 묶기도 하며 바구니로 장을 보기도 하는 모습에서 그녀는 유럽의 냄새가 난다.
그녀에게는 독일 여성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함이 있다. 미국인 은행가 남편을 따라 여러 나라에서 살아서 집은 온통 골동품으로 진열되어 있다.
12살 된 딸 아이가 동물을 좋아하여 토끼, 개, 고양이, 새 등을 기르며 TV는 4인치 흑백만 나오는 것을갖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녀와 나는 Craft를 좋아해서 나는 색종이 접기와 매듭을 가르쳐주었고 그녀는 나에게 여러 가지 미국생활과 영어를 가르쳐 준다. 여기서 살면서 외국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언어문제도 있겠지만 서로 취미가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더욱 힘들다고 느껴진다.
우리는 취미가 같아서 늘 만남이 새로운 것 같다. 만든다는 창조적인 매개체가 우리를 늘 이끌어 주는것이다. Ullie는 아이들에게는 독일어로 말하고 남편에게는 영어를 하며 물론 독일학교에도 다니면서딸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한자를 알면 동양문화를 알기 쉽듯이 서양사에서 라틴어를 뺄 수 없으므로 우리 아이들에게도 영어만하라는 시대는 지난 것이다. 물론 부모님들도 미국에 살고 있으니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게 해야 하는 책임도 있지만 우리들에게도 역시 여기 문화를 알고 배워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 일에 많은 노력이 따르겠지만, 그림을 그림으로써 아이들에게 말 없는 본보기가 되며 교훈이 될 것이라 믿는다.
부모인 나는 이중문화권 속에서 커가는 아이들의 고충을 알며 우리와 다른 배경에서 자란 이곳의 문화를 알아야만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되리라 본다.
나의 친구 Ullie 1999
그날 Ullie의 목소리는 우울하게 들렸다.
“Sei, 나 빌과 이혼하게 되었어.” 그래서 그 동안 아무도 만날 수 가 없었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으며, “Ullie, 무슨 일이야? 만나서 이야기 하자.” 그녀는 지금 자기의 심정은 내다버리는 헌 가구가 되어버린것 같다며 변호사에게 줄 서류와 여러 가지 정리할 것을 끝내고 다음주에 만나기로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나는 한 동안 머리 속에서 그녀의 젖은 목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Ullie와 내가 만나게 된지 6년이 된다. 웨체스터 카운티에 있는 공립도서관, 화이튼 플레인즈에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책을 보러 다니다가 나에게도 외국인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도서원에게 이야기를 하니 평소 내가 빌려가는 책이 주로 Art 계통인 줄 잘 알면서 이곳에 자주 오는 한 독일 여자를 내게 소개시켜 준다고 한 그 사람이 바로 Ullie였다.
그때 그녀는 메트로 폴리탄 박물관의 독일관 디렉터로 있으며 집에서 미국에서의 독일 교회의 역사를책으로 만들고 있을 때여서 자주 도서실에 오기에 나는 자주 그녀를 만나고 서로의 집에서 만나기도 하였다. 가족들과의 만남, 독일 학교에서의 붓글씨 강좌 등으로 학부형들과 모임을 만들어 Craft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자기가 만든 것을 보여주면서 서로 가르쳐 주기도 하고 음악회, 박물관에 같이가기도 하였다.
10여명이 넘기도 하고 부부 중 한 사람이 독일인이며 아이들을 독일학교에 보내기에 유럽 각 나라가다 모여서 더욱 더 다양한 것을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이 미국을 떠나서 독일로 가서 나는 초대를 받아유럽여행도 Ullie와 갔다 온것이다.
Ullie는 20살에 시카고 대학에서 빌을 만나 학생 때 결혼을 하여 큰 딸 에리카를 낳고 둘째 딸 칼라가고등학생이며 작년 봄 그들은 결혼 25주년을 기념하며 큰 파티도 가졌고 아일랜드에 여행도 갔었는데올 해 이렇게 이혼을 하게 될 줄이야……
큰 키와 긴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리고 여러 색상으로 조화된 가느다란 안경테와 직접 만들어서 입는복고풍 자켓에 센스있게 달고 다니는 브로치와 스웨이드 통굽에 검은 스타킹이 우아한 유럽풍의 멋이한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으로 많은 것을 나눌 수가 있었다. 한국매듭, 붓글씨 종이 접기 등을 가르치며 나는 그녀에게 영어와 유럽 문화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독서와 예술을 즐기는 생활방식을 배울 수 있었으며 퀼트와 재단 집안장식, 아이들 교육, 손님 접대 등 다양한 것을 보며 익히게 해준 나에게는 유일한 외국인 친구인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깊게 오랜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을 사랑한다는 공감대가 형성 되어 말 보다는 마음으로 서로를 신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40대 후반에서의 이혼이란 큰 심경의변화를 겪는 것이라는 걸 곁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 나는 한국식 사고방식의 피해자 입장으로 이혼을당하는 거이라고 알고 있었으며 여자에게는 실패한 인생이 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 그녀가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혼에 대한 생각이 다시 정립되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자신의 변화를 의식하며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요즘 그녀는 집안장식을 바꾸기에 여념이 없다. 쌓여있는 인테리어 잡지를 보면서 혼자 몇 달을 정해서한 군데씩 고쳐 나가고 있다. 오래된 집의 벽지를 뜯어내고 직접 칠하고 아이보리 색 벽에 피치색으로종이를 구겨서 엑센트를 주고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 위에 장식을 하기도 하고 벽면에 친구들이 선물한그림을 붙이거나 내가 찍어서 만든 판화도 걸었다. 거실에 피아노를 구석으로 옮겨 넓어진 공간에 우리Craft 모임의 장소를 만들어 스튜디오로 쓸 수 있게 하였다.
남편의 흔적…… 빌의 물건을 없앴다.
벽 장식 퀼트로 된 앨범, 빌의 40세 생일 때 손수 만들어 선물한 해 마다의 추억을 수 놓아 걸어 두었던벽걸이를 없앤 것이다. 좋은 시간을 추억하려 애쓰기 보다 잊으려 하는 모습이 집 안에 서려있어서 마음이 아팠으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세가 보기 좋았다.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모자만드는 시간을 택해 모자를 만들어서 저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내게 카키색 벨벳 베레모를 선물하기도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시간을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 지내는 것이다.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내가 그녀의 아픔을 건드릴까 차마 꺼낼 수 없던 이혼의 배경에 대해 말해주었다. “빌은 늘 피곤해 하며 모든 것에 흥미가 없었고 늘 의욕 상실이었어. 아마 그 누구나 겪는 Middle Age Crush(중년 위기의식)이었던 것 같아. 외아들이기에 그런 문제를 혼자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고안고 살았던 것 같아. 만약 형제가 있었어도 간접 경험을 통해 가볍게 받아들였을 텐데, 빌의 여자친구가 누구인지 아니? 비앙카야.” 그녀의 표정은 사뭇 냉담해지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놀라고 소설 같은 그 사연에 놀라 그 자리에 섰다 주저 앉았다. 비앙카는 우리와 같이 모임에도 참석하며 Ullie보다는 8살이나 아래인 이태리 여성이다. 미모보다는 이태리 여성의 정열이 있어보였고 의견이 강했던 모습을 나는 기억했다. 단발머리에 가죽 헤어밴드를 하고 그것이 빌에게는 새로운 자극, 사랑의 감정을 유발시켰던 걸까? 비앙카의 남편의 일이 뉴욕에서 끝나고 독일로 돌아갈 때 우리는 Ullie네 집에서 같이 파티도 하며 나와 같이 찍은 사진도 있는데 그럴 수가……
Ullie가 독일 학교 교육 위원이어서 학교 서류를 독일로 전달 하는 것이 많았고, 빌이 출장차 베를린에갈 때 몇 차례 비앙카에게 전해주는 일로 만나면서 그들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말이 적고 예의바른 빌에게 그런 점도 있었나……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러니까 여자가 잘 해야되.” 나는 너무나화가 나서 “뭘 잘해, 서로가 잘 맞춰서 잘 해야지!” “글쎄 잘하는 것은 남편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니까 당신도 잘해!” 나는 더 이상 그런 남편에게 할 말을 잃었다. 한국 남자 특유의 권위의식을 개조하기엔 나는 역부족이었다. 내 주위 친구 중에 이혼 하는 경우는 처음이어서인지 그녀가 한국인이 아니어서 인지 극복하는 과정을 보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예방책과 치료책을 알아서 현명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이 시대를사는 여성이면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선택인 것이며, 큰 고난 혹은 시련, 그것을 딛고 일어서며 자신의 일을 찾고 모색하는 가운데 참다운 힘이 생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이런동물적인 본능에 지배당하지 않으며 그것을 이겨나갈 때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는 것이다. 스스로 자가치료법을 터득하는 지혜를 갖고 살아가는 그녀는 독일어를 커뮤니티 스쿨에서 가르치며 우리들의 모임에도 더욱 활발히 참여하며, 이번 학기에도 모자 만드는 클래스를 다니고 무릎위로 짧아진 그녀의 치마길이와 붉어진 립스틱 색깔과 매니큐어를 칠한 그녀의 손톱과 눈썹을 염색하여 전보다 선명해져 화사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더욱 더 돈독한 우정을 키워가고 있다.
이혼을 극복하는 책을 읽으며, 모임 친구들과 연극, 영화도 보러 가기도 하고, 휴가 때마다 여행을 계획하며 올 여름을 그리스에 사는 친구들에게로 갈 예정을 하는 그녀. 체계성 있게 살려는 의지가 독일 여성 특유의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그녀는 불협화음의 하모니에서 벗어나 독주자로써 음을 마음껏 내며 생을 연주하는 모습을 나는듣고 바라보며 깊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은 것이다.
한국문화 가르치기 1999
NAKS(재미 한인 학교 교사 협의회) 15차 정기 총회가 시카고에서 있었다. 한국문화 시청각 교육 자료 전시를 하기에 준비를 하면서 과연 한국의 전통문화는 이민 2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면서 97년 한국 문화 유산의 해 통합 이미지 10개에 맞게 한복, 탈춤, 불국사, 태권도, 김치, 설악산, 종묘제례악, 고려인삼, 세계적 예술인 한글 등을 설정하면서 여러 가지 자료 수집 책을 보면서 아이들의 도움으로 내가 미처 생각 못한 것을 아이디어로 만든 제기 딱지 태극 부채 버선 매듭 등을 만들고 그리고 부치고 하면서 한 마음으로 작업을 하게 되었다.
과연 전통 문화란 무엇인가?
인간 전체의 행동, 인간의 사고 밑 생활 방식과 세계관을 포함하기에 연속적인 변화가 있는 것이다. 역사는 인간의 의식, 행동, 인간의 경험을 통해 한 집단의 발자취를 연구하는 행위인 것이다. 교사이기 전 부모로써 자녀들과 함께 만듦으로써 더 큰 의의를 가지고 아이들에게도 배우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갖게 하고 싶다. 학술 대회의 주제는 “21C를 이끌어 나갈 세계인으로서의 2세 교육” 이었다. UCLA 대학 John Duncan 박사의 유창한 한국어 강의는 한국 역사의 중심 인물과 사건 내용이었는데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써 객관적인 시각으로써 느낀 점에 많은 동감을 가졌다. 역사를 미화 시키지도 왜곡하지도 말며 자신의 역사를 알기 위해 남의 나라 역사를 알아야 하며 문화적 주체의식을 다각적으로 받아들이고 발전 시켜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책임이 아닌가 싶다.
‘What is different?’
‘Who am I?’
Role Model을 찾아주어야 한다. 전혜성 박사 강의 역시 나에게 많은 힘과 해답을 주었다. 어울리는 짧은 커트머리와 흰 자켓에 푸른색 스카프를 맨 모습은 한 여름에 잘 어울리며 가슴에 꽂힌 브로치는 옷의 엑센트로 멋이 있었다. 자기 길을 걷는 여자의 당당함과 온화한 목소리는 내면의 깊이에서 오는 진정한 멋이 함께 잘 어울려져서 참으로 보기 좋았다. 한국 여성은 가정 생활을 영위하면서 가족의 협조로 능력 발휘하여 자기완성을 한다는 것이다. 가정+직장=조화 속에서 자기 완수와 함께 자기실현을 하여 진보적 활동적으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도 충실히 겸하였다는 통계 자료의 여러 한국 여성들의 얘기를 들려 주었다.
요즘 한국에서 “엘리트 보다는 사람이 되어라” 의 저자로 잘 알려진 분이시기도 하기에 많은 선생님들의 공감대가 컸던 것 같다. 자기 길을 가고 싶어하는 여성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것이었다. 한국 문화 시청각 자료 전시를 보시며 두 교수님들께서 격려의 말씀 역시 교사로써의 긍지를 갖게 해 주셨다. 3박 4일의 학회를 마치고 매 해 있는 재미 한인 학교 협의회 총회를 위해서 준비하신 여러 임원들의 노고에 감사 드리며 학생들과 교사 자신들의 발전과 새로운 학문과 정보 교환을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 이번 학기에도 전시한 시청각 학습 자료로 학생들과 재미 있고 신나게 배울 수 있는 한국 문화 시간을 기대 해 본다.
재클린의 의상 감각 1999
메트로 폴리탄에서 재클린의 의상 전시에 주중인데도 인파들은 줄을 늘어지게 서 있었다. 그 인파들은 60년대 미국의 풍요를 그리워하는 노년층과 스케치북을 들고 드로잉 하는 젊은이들도 전시실의 발길을 옮기기에 모두들 부산스럽다. 재키라는 이름의 여자! 부와 명성을 누렸던 트레이드 마크 단발 헤어스타일 진주 목걸이. 패션 감각의 이미지가 살아 생전의 그 모든 것이 전시실에 압축되어 보여준다.
젊은 영 부인으로써 미모와 우아한 매너, 지적인 화술로 그 시대 많은 화제를 낳고 아직도 세인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글 쓰기를 좋아하며 내성적인 파리에서 유학시 유럽의 감각을 받아서 백악관 실내 장식도 프렌치풍 부루로 바꾸고 글래머 스타일의 미국 여인들의 미인 기준을 깨뜨렸다.
백악관 시절 세계 순방시, 연주회 때와 선거장에서, 취임식 때 입었던 의상들, 지방시, 샤넬, 디올, 쿠치의 단아하고 깔끔한 정장들…… 고급 부띠크에서 요즘도 볼 수 있는 칠부 소매, 스커트 라인들, 파스텔 색조 톤들이다. 액세서리 모자들이 한데 어울려서 살아 생전 모습들의 환영이 스쳐간다.
케네디가 비극을 함께 보면서 두 자녀의 양육을 잘 하며 키웠다. 얼마 전 가보았던 롱아일랜드에 있는 집. 신혼시절 가구와 두 자녀의 방들, 사진, 아이들과 거닐던 해안가 길들,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보여진다.
센추럴 파크에서 스카프와 검은 큰 선글라스를 쓰고 손녀와 산책하던 그녀는 편집부 일을 하며 남자친구와 데이트 하던 모습, 사교계와 사회봉사를 하며 성형 수술 후 암으로 다음 해에 죽었다. 드라마 보다 더 극적인 그녀의 생애였다.
오래 전부터 보아왔던 이야기들이 영화 타이쿤, TV 영화 시리즈, 해외 토픽 란, 수 많은 책들이 화제를 낳았다. 오나시스와 계약 결혼, 선박왕 대 부호로써 그녀의 병적인 쇼핑광 사치를 충족시켰으나 전처 자식 아들의 비행기 사고, 딸과의 재산 싸움, 끊임없는 불협화음의 연속이었으나 미국 국민의 영원한 백악관 시절의 안주인으로써 부각되는 것이다.
한 시대를 장식했던 수 십 벌의 옷들이 보존, 전시되어 역사의 재 조명 아래 빛나고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관심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케네디 총격 암살. 마릴린 몬로의 독물 자살. 케네디 2세 비행기 추락사. 예기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사이다.
그림을 감상할 때도 작가의 내면 사생활을 알면 그 그림을 더 잘 이해하고 볼 수 있듯이 의식 구조와 작업을 임했을 때의 심리적 구조상태와 색, 선의 표현은 하나로 일치되는 것이다. 작가는 사라져도 작품은 남듯이 사랑은 가도 역사 속에 기록되어 영원히 남는 것 같다.
전시실에 유난히 여자들이 많았던 까닭은 일종의 대리만족 충족이 주는 부귀명성, 그 대가의 잔혹함. 모순성을 알게 해주는 것일까?
옷은 여성의 제 2의 피부와도 같이 중요한 품목이며 이미지 관리에 절대적인 포장술인 것이다. 아마도 재키의 복고풍 패션의 물결은 계속 되리라 본다.
사이버 갤러리의 즐거움 1999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변하는 첨단 컴퓨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컴퓨터는 산업 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변화하면서 새로운 정보매체로 각광 받고 있기도 하다. 쏟아져 나오는 수 많은 정보매체의 물결을 타고 새로운 세계질서가 이루어지며 인터넷을 통하여 국경을 넘나든다. 이런 정보화 물결에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대처하는 자만이 첨단과학의 산물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일일 문화권 지구촌에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해주는 한국 사이버 예술 문화관을 클릭 해 본다. 화랑가 소식을 들어가 보니 이번 달은 유난히 대가들의 작품 전시가 눈에 뜨인다. 고가 미술품 영향으로 대중의 관심도가 높아진 것인지 김기창, 이응로, 김환기, 이중섭 등 굵직한 화가들의 작품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그림들을 보면서 책을 읽는 것 보다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골라서 프린터로 인쇄하여 가질 수도 있다. 고암 이응로 화백이 프랑스에서 초기에 만든 문자 추상 작품과 추기에 먹으로 사람들의 군상을 그린 작품들을 보면서 구작과 신작을 비교하여 작품세계의 변화과정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폭 넓고 깊이 있는 감상은 컴퓨터 보다는 책, 책보다는 전시회에서 작품을 직접 감상하는 것이 좋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몇 분의 화가들의 작품도 인터넷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작품의 창작과정과 그 배경으로 알려면 화가의 입으로 직접 듣는 기회를 갖는 것이 좋다. 작품은 곧 사람인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뉴욕 아트 엑스포에서 원작의 그림을 캔버스 위에 수공업적인 방식 그대로 컴퓨터로 옮겨지는 과정을 보았다. 하이테크놀로지 감각도 있으며 작품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길 수 있는 합성 과정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것이다.
평소에 원하는 화가의 그림을 살 수 없는 수요자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 소비자들이 손쉽게 구입해 나름대로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사진, 포스터보다 질감과 색감이 있기에 원작과 같은 복제가 가능한 것이다.
19세기 초, 카메라의 출연으로 전 근대적인 생각으로는 사진을 예술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예술의 한 장르로 되었다. 현대미술이란 예술 창작의 새로운 첨단도구로 문명의 자취를 표현하여 그 시대 작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첨단전자 매체의 감각을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담아내어 시대적 의미를 부각시킨다.
비디오 아티스트의 창시자 백남준씨는 전자시대를 예언한 통찰력 있는 안목으로
기계문명을 상징하는 자동화를 담아냈으며, 역시 첨단 매체인 TV, 비디오, 컴퓨터 등 20세기 미디어로 작가의 생각을 철학적-미학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사이버 갤러리에서 현대미술의 흐름을 파악하면서 전자매체의 다채로운 시도 대상을 레이저 광선으로 환상적인 조명효과로 작가가 의도하는 것을 추구하며 설치미술에서도 전자영상으로 빛과 인간의 지각과 의식 바깥 세계에서 억압된 욕망의 표출을 작가의 이미지로 현실과 환상이 오가는 3차원의 세계를 느끼게 한다.
21세기로 가는 우리들은 전자매체를 통하여 예술품과 교감을 하는 것이다. 기계문명과 감각마비로 메말라 가는 감정들을 순간이나마 정서적인 감성의 세계로 끌어들여 잠재의식 저 편에 숨겨져 있는 기억들을 되살려 주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정신적인 고뇌의 산물로써 예술작가의 고통과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그림들을 보여주는 사이버 갤러리 가상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이별 1999
떠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잠시 다른 공간에 갔다가 다시 오는데
무엇을 슬퍼하는가
가슴에 가득 차 있는 그 무엇을 떠난 뒤에 알게 되었다.
다시 온다는 기약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끝도 시작도 없는 원 사이를
친구 만들기=되어주기 1999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외롭고 쓸쓸할 때 지난 학창시절 순수했던 날의 친구들을 그리워하곤 한다. 저마다 마음의 창을 닫고 고독하다고 소리친다. 주위에 자신을 이해하고 마음을 줄 수 있는 벗이 없다고 스스로를 세뇌 시킨다. 그 누구의 친구가 되기 보다는 친구가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일과 관련된 삶들을 만나면서 대인관계를 넓히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가정살림, 자식을 키우고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커가는 자식들이 품을 떠나고 제각기 자신의 할 일을 갖고 떠나갈 때처럼 더 이상의 허무함은 없을 것이다. 이제껏 무엇 때문에 살았던가?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 것 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 가정에서…… 끝없는 자기 존재 가치에 대해 의구심이 생기는 것이다.
전문직 여성들 역시 일과 가정을 잘 엮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도 모르게 자신과의 싸움을 해나가며 주부로서의 빈 보금자리의 죄의식을 씻어내기가 힘들고 좌절을 하는 것이다. 양보다 질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집에 있는 주부보다 더욱 큰 교육효과를 얻기 위해 자녀 교육 전문서적을 탐독하고 연구하며 또 하나의 직업의식으로 도전 해 나가기도 한다. 늘 집에만 있는 주부들은 자신이 아이들과 늘 함께 있어 준다는 사실만으로 효율적인 시간 사용을 잊기도 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예나 지금이나 모성애의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이 진리인 것 같다. 자녀, 남편, 가정 울타리 속에서 엄마이기 전, 부인이기 전에, 여자라는 굴레를 벗어나 인간이고 싶은 것이다. 젊음은 가고 자기존재의 상실감이 중년을 맞이하면서 잊었던 자아를 추구하며 나를 찾고 생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해왔던 대로 잘해나가고 물론 수시로 지켜보며 확인도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스스로가 독립적 주체임을 주장하며 모든 것을 간섭으로 받아들이기에 한 걸음 떨어져서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림을 보듯 아이와의 간격을 늦추기까지의 마음가짐이 힘든 것이다. 세상일 모든 것이 처음은 미숙 그 자체인 것 같다.
이럴 때 우리 여자들은 자가진단을 신체적 병, 혹은 정신적 갈등으로 해소 할 길을 찾는 것을 습성대로 운동, 쇼핑, 집안 장식, 종교생활, 봉사활동 등 각자 나름대로 취미 생활을 접하지만 그 속에서도 군중 속의 고독은 더해 온다.
마음이 맞는 친구와 차 한잔을 나누며 인생사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며 나이에 상관없이 그저 여자라는 그 한계와 주부라는 것이 일맥상통이 되며,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듣고 이해하며 인생을 살면서 각기 다른 형태지만 본질적인 고민은 같다. 또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삶을 존중하며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의 고민을 진실로 위로해주며 감싸주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진심 어린 우정은 어린 시절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생활의 활력소를 위해 필요한 것 같다. 자신만의 문제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 마음을 열어 바로 우리 곁 가까이 있는 친구를 만나 대화를 하며 세상사 물결에 나를 담아보고 모두들 마음 속 깊이 친구이기를 원하지만 가정 속 안에서 세상 밖으로 나아갈 때 두려움을 안고 있다. 그러한 생활에 익숙해졌기에 자신이 없기에 습관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정신과 상담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계화 되어버린 대인관계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을 찾지 못해 방황 할 때, 진정한 친구가 되어준다면 그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은 더욱 더 따스해 질 것이다.
“여보세요? 응 나야, 나 요즘 너무 우울해… 그리고 너무 잘 잊어버려, 조기 치매 증세 인가봐. “ “어머 그러니? 나도 그래! 나도 고민 중이였어…” “우리 만나자, 너 안바쁘니?” “우선 순위 모르니? 우리 집으로 올래, 아니면 밖에서 만날까?” “우리 그럼 만나서 살풀이 하자!” 우리 모두가 이런 전화 한 통화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
영원한 예술…베니스의 밤 1999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베네치아의 특수한 지리적 환경을 화려하고 중후하게 표현한 중세 미술을 보고나서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화 공방 갤러리에 들러 오래된 인쇄기와 단순 처리된 작품들도 재밌게 구경했다. 작품들을보면서 모든 것은 작가의 정열과 그 한계만큼 다가오는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시간과 경험 축적만이작품에 우러나온다는 그 절대 법칙을 알기에 나는 늘 숙제처럼 마음 무거운 학생이 되기도 한다.
철제문에 깨어진 유리 조각 같은 색색의 스테인 글래스로 장식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정원에 스위스의조각가 자코메티의 기다란 조각품이 서 있다. 페기 구겐하임 콜렉션을 그대로 재현한 침실 다이닝 룸과사진들 60년대 피카소, 잭슨 폴락 작품도 있다. 흑백 사진으로 자주 봤던 자코베티의 의상, 액세서리,안경, 샌들 등이 선물 코너에서 판매되고 있다. 그녀는 생전 예술가들을 후원하기도 하고 많은 작품을사는 것으로 잘 알려지기도 했지만 화려한 스캔들로 더 유명하기도 하다.
사람은 가도 그 작품은 이렇게 남아있는 것이다. 걷는 것이 별로 불편하지 않아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야채 시장에 들렀다. 바구니에 담긴 싱싱한 채소와 탐스러운 과일을 보니 직업의식이 살아나 주부 본업인 장보기를 했다. 동서양과 아프리카 가면에 관심이 있는 나는 가게에 들어가 화려한 것부터 광대에이르기까지 모두 둘러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운하에 곤돌라들이 저녁 손님을 맞이하려고 즐비하게 떠 있다. 연인도 없이 데이트 하며 곤돌라를 타기보다는 차라리 오페라를 보자고 세 사람이 의견을 보았다.
저녁 오페라는 오래된 교회에서 공연됐는데 고유의 의상을 입고 바로 가까이서 들을 수 있어 참으로 편안하게 즐겼다. 그 멋진 공연을 보면서 예술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긴 역사의 소산이라는 것을 또 한번 느꼈다. 베니스의 밤은 바다 바람과 레스토랑의 불빛, 방랑객들의 발길과 함께 한 낮의 햇살아래서보다 더 그윽하게 다가왔다.
낯선 곳에서의 밤길이 무섭지 않은 것은 섬 안이어서 자동차 공해와 소음에서 벗어났다는 심리적 안정감 때문일까? 골목마다 손님들로 가득 찬 곳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인생의 애환을 담고 있는 듯 하다.내일이면 여행의 일정이 끝난다. 르네상스 운동의 본고장인 이곳에서 느낀 것은 중세의 암흑과 종교적억압에서 피어난 인간성의 존중, 자유, 그리고 인간의 의지를 찾으려 했던 많은 예술가들의 혼이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단테 갈릴레이, 마르코 폴로. 그들의 영혼의 흔적이 어려있는 베니스는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향기와 발자취는 영원하기만 하다.
파리를 돌아보면서…… 1999
주불 한국 문화원에서 열린 한미 미술인 협회 그룹전에 출품하기 위해 최근 파리를 다녀왔다. 에펠탑에 2천이란 숫자가 걸려있다. 2년 전 갔을 때 걸려있던 7백이라는 숫자는 이미 세느강 물결과 함께 흘러가 버렸다.
회원 6명과 파리를 좋아하고 프랑스어가 유창한 언니와 함께하는 여행은 마법의 끈처럼 끝없이 회상의 실타래로 이어져 나갔다. 문화원 직원들의 적극적인 협조아래 전시준비는 진행되었고 전시실의 구조는 작품을 걸기에 좋았다. 리셉션 준비로 슈퍼마켓에서 와인, 치즈, 비스켓, 과일 등을 사며 바게트 빵을 사 들고 나왔다.
작품을 다 걸고 숙소로 돌아올 때 메트로를 타고 오래된 6층 계단을 올라 긴 창문을 열고 창 밖을 보니 촛불을 켠 건너편에 아담한 거실이 보인다.
‘아, 파리의 밤이구나……’
헤밍웨이는 “파리는 하나의 축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수와 낭만이 감미롭게 흐르는 샹송, 대화 없는 프렌치 영화의 영상들이 오버랩 되어 가슴 속에 수를 놓는다.
시차도 없이 아침을 맞이했다. 차선이 없는 도로들 사이로 무질서 속의 질서가 보인다. 경적소리 하나 없이 차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3차선 문화, 획일화되지 않은 자유분방한 사고의 소유자들. 상대방을 향한 배려가 일상적인 교통지서 속에도 있다.
세계 3대 미술관 가운데 하나인 루브르에는 여전히 관광객들의 긴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한미 미술인협회 회원증의 위력이 효과를 보았다. 무사통과. 무엇보다 단체의 힘이 시간을 절약해 주었다. 각자 보고 싶은 곳에서 보고 나중에 한자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처음 왔을 때의 흥분보다는 여유 있게 느긋한 마음으로 아프리카 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무로 깎아 만든 샤마니즘적 인간본능의 원초적 아름다움이 심장을 멈추게 한다. 조각상 모두 남자보다 여자의 키가 더 크다. 모성애, 다산, 생명 등을 중요시 하는 것은 태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진리이다. 자연 그 자체가 신앙인 것이다.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많이 가진 프랑스는 그들의 예술적 안목으로 아름다움을 발굴했지만 지금은 인종문제로 사회화되어 외국 이민 통제를 시도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국가의 상징인 자유, 평화, 박애 정신으로 ‘의식 높은’ 국민임을 자부하는 것이다.
2층 드농 평면 회화관을 스쳐 지나면서 선, 빛, 색의 강렬한 인상으로 진정할 수 없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조각실로 내려왔다. 그리스 조각을 대하니 매끈한 대리석의 잘 다듬어진 선과 돌의 차가움을 느끼면서 작가의 고뇌와 갈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서양 예술의 진수를 다시 한번 맛보는 순간이었다. 예술가의 길은 끊임없는 자기성찰로 끝까지 예술, 그 한 길로 가는 ‘지구전’과 같다.
노상 카페에서 따뜻한 스프와 샐러드를 점심으로 먹으며 각자 본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누었다. 기념사진도 함께 찍었다. 어디를 가나 프랑스어 판이다. 중학교 때 언니가 불어를 가르쳐줄 때마다 좀 더 열심히 배우지 못한 것이 조금 후회스러웠다.
프랑스 헌법에 ‘프랑스 공화국의 언어는 프랑스어이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어 보호 작업을 철저히 벌이고 있다. 하지만 국제적인 흐름에 대응하기 위해 콧대 높은 그들도 요즘 사정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다. 젊은이들은 영어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국가 문화정책 차원에서 프랑스는 세계 1백 20여 개국, 1백 60여 개 도시에 문화원을 갖추고 있다. 문화 강국 프랑스의 국민답게 그들은 외국 문화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들의 그런 열정이 프랑스 문화의 질을 높인다고 생각한다.
유년 시절 주한 프랑스 문화원에서 그림 전시회, 영화, 패션쇼 등을 보면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파리는 나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날 문화원 오프닝 리셉션에서 주불한국 대사의 유창한 프랑스어와 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이 퍽 인상적이었다. 많은 손님들이 와 주었다. 문화원의 정성 어린 후원에 감사의 인사를 했다. 멋쟁이 파리지앵의 외모에서 풍기는 우아함과 리드미컬하게 들리는 프랑스어는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좋은 사람들, 맛있는 음식 그리고 예술품이 함께 만날 때가 바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엄마! 일기 숙제! 1999
저녁을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는 나에게 와서, “엄마, 나 숙제 일기 해야 돼. 뭐라고 쓰지?” “오늘 날씨는 해를 그리고, 놀이터에서 노는 그림을 그려봐. 그리고 네가 한 번 교과서에서 글자를 찾아서 쓰고 와서 엄마를 보여줘요. 리나가 다 쓰고 나서 엄마가 틀린 것 고쳐 줄게.” “엄마, 왜 일기는 맨날 써야 해?” “그래야 리나가 커서 이 일기를 읽으면서 어렸을 때를 기억할 수 있잖니.” “나 모르는 말 있어. 놀이터 못 써.” “너 그 글자 배웠어. 교과서에서 읽었을 거야.” “O.K. 찾아서 할게.”
설거지가 끝난 후 앉아 있으면 리나는 일기장을 가지고 다가온다.
“리나야, 글자도 다 잘 썼고 그림도 참 예쁘다!” 그런데 이 글자 다시 한번 책을 보고 써봐. 받침이 다르지? 이거 보고 리나가 다시 한번 잘 써봐. 그래 이제 다 잘 했다. 그럼 이 닦고 세수하고 예쁜 꿈 꾸게 책 하나 읽고 자자.”
“엄마, 내일은 나 어느 학교 가? 미국 학교 가? 나 빨리 한국 학교 가고 싶어.”
“토요일이 와야지. 한국 학교에 가서 친구도 많이 만들고 무용도 배우는 리나는 좋겠다.”
매일 저녁 반복되는 리나와 나의 대화이다. 처음에는 “엄마, 어떻게 해?” 하던 아이가 한 학기가 지나고 방학 숙제 일기를 쓰고 나서부터 제법 문장을 쓸 줄 알고, 안 보고 쓸 줄 아는 글자가 생기더니 요즘은 문장이 다듬어져 가는 것이다.
아직 학부모로써는 햇병아리인 나는 한국 학교에서 배운 그 동안의 공부들, 여러 강사님들의 좋으신 말씀들은 유아관과 교육관을 정리 시켜주며 교장 선생님의 헌신적인 교육열과 40년 넘은 경험에서 나오는 산 교육을 보며 생각하는 부모, 공부하는 엄마의 길잡이로 만들어 주시는 것에 감사함을 드린다.
리나와 데나를 데리고 새벽부터 준비해 달려가는 차 안에는 리나는 차 안에서 리나 가방을 뒤지고, 학교에 도착하면 교실 창가에서 수업 시간 들려오는 책 읽는 소리가 나와 내 딸이 서로 공감하는 한국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교류가 이루어져 이 미국 땅에서 내가 만끽하는 가장 큰 즐거움의 시간이 되곤 한다.
이중 문화 속에서 일주일에 한 번 딸아이와 내가 같은 문화를 계승하는 날인 것이다.
“엄마, 엄마도 나처럼 한국어 이렇게 배웠어?”
“엄마, 왜 우리는 한국 사람이면서 여기서 살아?”
“아빠가 공부 하고 뉴욕에는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서로 열심히 배우면서 사는 거야.”
아직 그 나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에 대해 이제 서서히 묻기 시작하는 그 신선한 질문들이 나를 어린 시절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엄마, 왜 달, 별들은 밤에만 빛나? 하늘은 왜 파래? 사람은 왜 말을 해?”
하루에도 몇 번씩 많은 질문들을 나에게 물어오는 것이다. 한국신문, 책을 보고 아는 글자가 나오면 큰 소리로 읽고, 음식점, 식료품 가게에 가면, 이게 글자를 읽고 아는 말이면 너무 좋아하는 그 아이를 보면 막 내가 글자를 배워 어렸을 때 엄마와 길을 걸을 때 간판을 보며 글자를 읽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그 동안 가르치는 입장에서 내가 알았던 것과 학부모가 되어서 내가 느끼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학교는 가르치기 보다 문제를 제시하고 공부는 집에서 부모가 시키는 것이고, 선생님은 그것을 검사하는 삼위일체 속에서 교육의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그것을 깨닫고 생활 속에 시도하려 할 때는 늘 시행착오에 부딪히지만 시작은 반이라고 내 자신이 보여줌으로써 행함으로써 내 마음을 딸 아이에게 전하고 싶다.
“리나, 엄마는 리나가 너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 리나는 건강하고 착하고 한국어도 열심히 공부해서 이제 읽고 쓰고 하니까……”
“엄마, 난 엄마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얼만큼, 리나야?”
“하늘만큼 높고, 땅만큼 넓게!”
“그래, 엄마도 그래. 그럼 잘자! 고운 꿈꾸고 안녕!”
오늘 하루도 이렇게 보내며 먼 훗날 딸 아이가 커서도 일기 숙제를 하며 변함없이 내게 달려올 것을 상상하며 그 순간들을 리나와 나와의 사랑의 끈을 묶는 대화의 시간으로 삼으리라. 둘째는 이러한 훌륭한 분들이 부모님들을 위해서 그 바쁜 시간을 쪼개어 와 주시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며 그것도 봉사해 주신다는 데는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이 모든 분들의 열의와 봉사정신, 훌륭하게 학교를 이끌어 가시는 교장선생님의 노고에 마음 속 깊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 외국인 친구가 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나서 10시부터 12시까지 차 한잔과 다과, 그렇게 만나게 된지 3년이 되어간다.
그녀의 이름은 Ullie. 금발의 긴 머리를 땋고 때로는 올려 묶기도 하며 바구니로 장을 보기도 하는 모습에서 그녀는 유럽의 냄새가 난다.
그녀에게는 독일 여성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함이 있다. 미국인 은행가 남편을 따라 여러 나라에서 살아서 집은 온통 골동품으로 진열되어 있다.
12살 된 딸 아이가 동물을 좋아하여 토끼, 개, 고양이, 새 등을 기르며 TV는 4인치 흑백만 나오는 것을갖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녀와 나는 Craft를 좋아해서 나는 색종이 접기와 매듭을 가르쳐주었고 그녀는 나에게 여러 가지 미국생활과 영어를 가르쳐 준다. 여기서 살면서 외국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언어문제도 있겠지만 서로 취미가 같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더욱 힘들다고 느껴진다.
우리는 취미가 같아서 늘 만남이 새로운 것 같다. 만든다는 창조적인 매개체가 우리를 늘 이끌어 주는것이다. Ullie는 아이들에게는 독일어로 말하고 남편에게는 영어를 하며 물론 독일학교에도 다니면서딸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것이다.
한자를 알면 동양문화를 알기 쉽듯이 서양사에서 라틴어를 뺄 수 없으므로 우리 아이들에게도 영어만하라는 시대는 지난 것이다. 물론 부모님들도 미국에 살고 있으니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게 해야 하는 책임도 있지만 우리들에게도 역시 여기 문화를 알고 배워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 일에 많은 노력이 따르겠지만, 그림을 그림으로써 아이들에게 말 없는 본보기가 되며 교훈이 될 것이라 믿는다.
부모인 나는 이중문화권 속에서 커가는 아이들의 고충을 알며 우리와 다른 배경에서 자란 이곳의 문화를 알아야만 아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되리라 본다.
나의 친구 Ullie 1999
그날 Ullie의 목소리는 우울하게 들렸다.
“Sei, 나 빌과 이혼하게 되었어.” 그래서 그 동안 아무도 만날 수 가 없었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으며, “Ullie, 무슨 일이야? 만나서 이야기 하자.” 그녀는 지금 자기의 심정은 내다버리는 헌 가구가 되어버린것 같다며 변호사에게 줄 서류와 여러 가지 정리할 것을 끝내고 다음주에 만나기로 하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나는 한 동안 머리 속에서 그녀의 젖은 목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Ullie와 내가 만나게 된지 6년이 된다. 웨체스터 카운티에 있는 공립도서관, 화이튼 플레인즈에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책을 보러 다니다가 나에게도 외국인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도서원에게 이야기를 하니 평소 내가 빌려가는 책이 주로 Art 계통인 줄 잘 알면서 이곳에 자주 오는 한 독일 여자를 내게 소개시켜 준다고 한 그 사람이 바로 Ullie였다.
그때 그녀는 메트로 폴리탄 박물관의 독일관 디렉터로 있으며 집에서 미국에서의 독일 교회의 역사를책으로 만들고 있을 때여서 자주 도서실에 오기에 나는 자주 그녀를 만나고 서로의 집에서 만나기도 하였다. 가족들과의 만남, 독일 학교에서의 붓글씨 강좌 등으로 학부형들과 모임을 만들어 Craft를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자기가 만든 것을 보여주면서 서로 가르쳐 주기도 하고 음악회, 박물관에 같이가기도 하였다.
10여명이 넘기도 하고 부부 중 한 사람이 독일인이며 아이들을 독일학교에 보내기에 유럽 각 나라가다 모여서 더욱 더 다양한 것을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이 미국을 떠나서 독일로 가서 나는 초대를 받아유럽여행도 Ullie와 갔다 온것이다.
Ullie는 20살에 시카고 대학에서 빌을 만나 학생 때 결혼을 하여 큰 딸 에리카를 낳고 둘째 딸 칼라가고등학생이며 작년 봄 그들은 결혼 25주년을 기념하며 큰 파티도 가졌고 아일랜드에 여행도 갔었는데올 해 이렇게 이혼을 하게 될 줄이야……
큰 키와 긴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리고 여러 색상으로 조화된 가느다란 안경테와 직접 만들어서 입는복고풍 자켓에 센스있게 달고 다니는 브로치와 스웨이드 통굽에 검은 스타킹이 우아한 유럽풍의 멋이한 눈에 들어온다.
우리는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으로 많은 것을 나눌 수가 있었다. 한국매듭, 붓글씨 종이 접기 등을 가르치며 나는 그녀에게 영어와 유럽 문화의 깊이를 느낄 수 있었다. 독서와 예술을 즐기는 생활방식을 배울 수 있었으며 퀼트와 재단 집안장식, 아이들 교육, 손님 접대 등 다양한 것을 보며 익히게 해준 나에게는 유일한 외국인 친구인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깊게 오랜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을 사랑한다는 공감대가 형성 되어 말 보다는 마음으로 서로를 신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40대 후반에서의 이혼이란 큰 심경의변화를 겪는 것이라는 걸 곁에서 지켜 볼 수 있었다. 나는 한국식 사고방식의 피해자 입장으로 이혼을당하는 거이라고 알고 있었으며 여자에게는 실패한 인생이 될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 그녀가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이혼에 대한 생각이 다시 정립되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자신의 변화를 의식하며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요즘 그녀는 집안장식을 바꾸기에 여념이 없다. 쌓여있는 인테리어 잡지를 보면서 혼자 몇 달을 정해서한 군데씩 고쳐 나가고 있다. 오래된 집의 벽지를 뜯어내고 직접 칠하고 아이보리 색 벽에 피치색으로종이를 구겨서 엑센트를 주고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 위에 장식을 하기도 하고 벽면에 친구들이 선물한그림을 붙이거나 내가 찍어서 만든 판화도 걸었다. 거실에 피아노를 구석으로 옮겨 넓어진 공간에 우리Craft 모임의 장소를 만들어 스튜디오로 쓸 수 있게 하였다.
남편의 흔적…… 빌의 물건을 없앴다.
벽 장식 퀼트로 된 앨범, 빌의 40세 생일 때 손수 만들어 선물한 해 마다의 추억을 수 놓아 걸어 두었던벽걸이를 없앤 것이다. 좋은 시간을 추억하려 애쓰기 보다 잊으려 하는 모습이 집 안에 서려있어서 마음이 아팠으나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세가 보기 좋았다.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모자만드는 시간을 택해 모자를 만들어서 저번 크리스마스 선물로 내게 카키색 벨벳 베레모를 선물하기도했다.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시간을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 지내는 것이다.
어느 날 그녀는 나에게, 내가 그녀의 아픔을 건드릴까 차마 꺼낼 수 없던 이혼의 배경에 대해 말해주었다. “빌은 늘 피곤해 하며 모든 것에 흥미가 없었고 늘 의욕 상실이었어. 아마 그 누구나 겪는 Middle Age Crush(중년 위기의식)이었던 것 같아. 외아들이기에 그런 문제를 혼자만의 것이라고 생각하고안고 살았던 것 같아. 만약 형제가 있었어도 간접 경험을 통해 가볍게 받아들였을 텐데, 빌의 여자친구가 누구인지 아니? 비앙카야.” 그녀의 표정은 사뭇 냉담해지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놀라고 소설 같은 그 사연에 놀라 그 자리에 섰다 주저 앉았다. 비앙카는 우리와 같이 모임에도 참석하며 Ullie보다는 8살이나 아래인 이태리 여성이다. 미모보다는 이태리 여성의 정열이 있어보였고 의견이 강했던 모습을 나는 기억했다. 단발머리에 가죽 헤어밴드를 하고 그것이 빌에게는 새로운 자극, 사랑의 감정을 유발시켰던 걸까? 비앙카의 남편의 일이 뉴욕에서 끝나고 독일로 돌아갈 때 우리는 Ullie네 집에서 같이 파티도 하며 나와 같이 찍은 사진도 있는데 그럴 수가……
Ullie가 독일 학교 교육 위원이어서 학교 서류를 독일로 전달 하는 것이 많았고, 빌이 출장차 베를린에갈 때 몇 차례 비앙카에게 전해주는 일로 만나면서 그들은 연인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말이 적고 예의바른 빌에게 그런 점도 있었나……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러니까 여자가 잘 해야되.” 나는 너무나화가 나서 “뭘 잘해, 서로가 잘 맞춰서 잘 해야지!” “글쎄 잘하는 것은 남편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니까 당신도 잘해!” 나는 더 이상 그런 남편에게 할 말을 잃었다. 한국 남자 특유의 권위의식을 개조하기엔 나는 역부족이었다. 내 주위 친구 중에 이혼 하는 경우는 처음이어서인지 그녀가 한국인이 아니어서 인지 극복하는 과정을 보며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기에 예방책과 치료책을 알아서 현명하게 대처하는 능력을 이 시대를사는 여성이면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은 선택인 것이며, 큰 고난 혹은 시련, 그것을 딛고 일어서며 자신의 일을 찾고 모색하는 가운데 참다운 힘이 생긴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이런동물적인 본능에 지배당하지 않으며 그것을 이겨나갈 때 또 다른 세계가 기다리는 것이다. 스스로 자가치료법을 터득하는 지혜를 갖고 살아가는 그녀는 독일어를 커뮤니티 스쿨에서 가르치며 우리들의 모임에도 더욱 활발히 참여하며, 이번 학기에도 모자 만드는 클래스를 다니고 무릎위로 짧아진 그녀의 치마길이와 붉어진 립스틱 색깔과 매니큐어를 칠한 그녀의 손톱과 눈썹을 염색하여 전보다 선명해져 화사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더욱 더 돈독한 우정을 키워가고 있다.
이혼을 극복하는 책을 읽으며, 모임 친구들과 연극, 영화도 보러 가기도 하고, 휴가 때마다 여행을 계획하며 올 여름을 그리스에 사는 친구들에게로 갈 예정을 하는 그녀. 체계성 있게 살려는 의지가 독일 여성 특유의 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제 그녀는 불협화음의 하모니에서 벗어나 독주자로써 음을 마음껏 내며 생을 연주하는 모습을 나는듣고 바라보며 깊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은 것이다.
한국문화 가르치기 1999
NAKS(재미 한인 학교 교사 협의회) 15차 정기 총회가 시카고에서 있었다. 한국문화 시청각 교육 자료 전시를 하기에 준비를 하면서 과연 한국의 전통문화는 이민 2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면서 97년 한국 문화 유산의 해 통합 이미지 10개에 맞게 한복, 탈춤, 불국사, 태권도, 김치, 설악산, 종묘제례악, 고려인삼, 세계적 예술인 한글 등을 설정하면서 여러 가지 자료 수집 책을 보면서 아이들의 도움으로 내가 미처 생각 못한 것을 아이디어로 만든 제기 딱지 태극 부채 버선 매듭 등을 만들고 그리고 부치고 하면서 한 마음으로 작업을 하게 되었다.
과연 전통 문화란 무엇인가?
인간 전체의 행동, 인간의 사고 밑 생활 방식과 세계관을 포함하기에 연속적인 변화가 있는 것이다. 역사는 인간의 의식, 행동, 인간의 경험을 통해 한 집단의 발자취를 연구하는 행위인 것이다. 교사이기 전 부모로써 자녀들과 함께 만듦으로써 더 큰 의의를 가지고 아이들에게도 배우는 것보다 더 큰 의미를 갖게 하고 싶다. 학술 대회의 주제는 “21C를 이끌어 나갈 세계인으로서의 2세 교육” 이었다. UCLA 대학 John Duncan 박사의 유창한 한국어 강의는 한국 역사의 중심 인물과 사건 내용이었는데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으로써 객관적인 시각으로써 느낀 점에 많은 동감을 가졌다. 역사를 미화 시키지도 왜곡하지도 말며 자신의 역사를 알기 위해 남의 나라 역사를 알아야 하며 문화적 주체의식을 다각적으로 받아들이고 발전 시켜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책임이 아닌가 싶다.
‘What is different?’
‘Who am I?’
Role Model을 찾아주어야 한다. 전혜성 박사 강의 역시 나에게 많은 힘과 해답을 주었다. 어울리는 짧은 커트머리와 흰 자켓에 푸른색 스카프를 맨 모습은 한 여름에 잘 어울리며 가슴에 꽂힌 브로치는 옷의 엑센트로 멋이 있었다. 자기 길을 걷는 여자의 당당함과 온화한 목소리는 내면의 깊이에서 오는 진정한 멋이 함께 잘 어울려져서 참으로 보기 좋았다. 한국 여성은 가정 생활을 영위하면서 가족의 협조로 능력 발휘하여 자기완성을 한다는 것이다. 가정+직장=조화 속에서 자기 완수와 함께 자기실현을 하여 진보적 활동적으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도 충실히 겸하였다는 통계 자료의 여러 한국 여성들의 얘기를 들려 주었다.
요즘 한국에서 “엘리트 보다는 사람이 되어라” 의 저자로 잘 알려진 분이시기도 하기에 많은 선생님들의 공감대가 컸던 것 같다. 자기 길을 가고 싶어하는 여성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시는 것이었다. 한국 문화 시청각 자료 전시를 보시며 두 교수님들께서 격려의 말씀 역시 교사로써의 긍지를 갖게 해 주셨다. 3박 4일의 학회를 마치고 매 해 있는 재미 한인 학교 협의회 총회를 위해서 준비하신 여러 임원들의 노고에 감사 드리며 학생들과 교사 자신들의 발전과 새로운 학문과 정보 교환을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다지게 되는 것이다. 이번 학기에도 전시한 시청각 학습 자료로 학생들과 재미 있고 신나게 배울 수 있는 한국 문화 시간을 기대 해 본다.
재클린의 의상 감각 1999
메트로 폴리탄에서 재클린의 의상 전시에 주중인데도 인파들은 줄을 늘어지게 서 있었다. 그 인파들은 60년대 미국의 풍요를 그리워하는 노년층과 스케치북을 들고 드로잉 하는 젊은이들도 전시실의 발길을 옮기기에 모두들 부산스럽다. 재키라는 이름의 여자! 부와 명성을 누렸던 트레이드 마크 단발 헤어스타일 진주 목걸이. 패션 감각의 이미지가 살아 생전의 그 모든 것이 전시실에 압축되어 보여준다.
젊은 영 부인으로써 미모와 우아한 매너, 지적인 화술로 그 시대 많은 화제를 낳고 아직도 세인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글 쓰기를 좋아하며 내성적인 파리에서 유학시 유럽의 감각을 받아서 백악관 실내 장식도 프렌치풍 부루로 바꾸고 글래머 스타일의 미국 여인들의 미인 기준을 깨뜨렸다.
백악관 시절 세계 순방시, 연주회 때와 선거장에서, 취임식 때 입었던 의상들, 지방시, 샤넬, 디올, 쿠치의 단아하고 깔끔한 정장들…… 고급 부띠크에서 요즘도 볼 수 있는 칠부 소매, 스커트 라인들, 파스텔 색조 톤들이다. 액세서리 모자들이 한데 어울려서 살아 생전 모습들의 환영이 스쳐간다.
케네디가 비극을 함께 보면서 두 자녀의 양육을 잘 하며 키웠다. 얼마 전 가보았던 롱아일랜드에 있는 집. 신혼시절 가구와 두 자녀의 방들, 사진, 아이들과 거닐던 해안가 길들,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보여진다.
센추럴 파크에서 스카프와 검은 큰 선글라스를 쓰고 손녀와 산책하던 그녀는 편집부 일을 하며 남자친구와 데이트 하던 모습, 사교계와 사회봉사를 하며 성형 수술 후 암으로 다음 해에 죽었다. 드라마 보다 더 극적인 그녀의 생애였다.
오래 전부터 보아왔던 이야기들이 영화 타이쿤, TV 영화 시리즈, 해외 토픽 란, 수 많은 책들이 화제를 낳았다. 오나시스와 계약 결혼, 선박왕 대 부호로써 그녀의 병적인 쇼핑광 사치를 충족시켰으나 전처 자식 아들의 비행기 사고, 딸과의 재산 싸움, 끊임없는 불협화음의 연속이었으나 미국 국민의 영원한 백악관 시절의 안주인으로써 부각되는 것이다.
한 시대를 장식했던 수 십 벌의 옷들이 보존, 전시되어 역사의 재 조명 아래 빛나고 있었다.
많은 미국인들은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관심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케네디 총격 암살. 마릴린 몬로의 독물 자살. 케네디 2세 비행기 추락사. 예기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사이다.
그림을 감상할 때도 작가의 내면 사생활을 알면 그 그림을 더 잘 이해하고 볼 수 있듯이 의식 구조와 작업을 임했을 때의 심리적 구조상태와 색, 선의 표현은 하나로 일치되는 것이다. 작가는 사라져도 작품은 남듯이 사랑은 가도 역사 속에 기록되어 영원히 남는 것 같다.
전시실에 유난히 여자들이 많았던 까닭은 일종의 대리만족 충족이 주는 부귀명성, 그 대가의 잔혹함. 모순성을 알게 해주는 것일까?
옷은 여성의 제 2의 피부와도 같이 중요한 품목이며 이미지 관리에 절대적인 포장술인 것이다. 아마도 재키의 복고풍 패션의 물결은 계속 되리라 본다.
사이버 갤러리의 즐거움 1999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변하는 첨단 컴퓨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컴퓨터는 산업 사회에서 정보사회로 변화하면서 새로운 정보매체로 각광 받고 있기도 하다. 쏟아져 나오는 수 많은 정보매체의 물결을 타고 새로운 세계질서가 이루어지며 인터넷을 통하여 국경을 넘나든다. 이런 정보화 물결에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방식으로 대처하는 자만이 첨단과학의 산물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일일 문화권 지구촌에 살고 있음을 실감하게 해주는 한국 사이버 예술 문화관을 클릭 해 본다. 화랑가 소식을 들어가 보니 이번 달은 유난히 대가들의 작품 전시가 눈에 뜨인다. 고가 미술품 영향으로 대중의 관심도가 높아진 것인지 김기창, 이응로, 김환기, 이중섭 등 굵직한 화가들의 작품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 그림들을 보면서 책을 읽는 것 보다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엇일까?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골라서 프린터로 인쇄하여 가질 수도 있다. 고암 이응로 화백이 프랑스에서 초기에 만든 문자 추상 작품과 추기에 먹으로 사람들의 군상을 그린 작품들을 보면서 구작과 신작을 비교하여 작품세계의 변화과정을 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폭 넓고 깊이 있는 감상은 컴퓨터 보다는 책, 책보다는 전시회에서 작품을 직접 감상하는 것이 좋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몇 분의 화가들의 작품도 인터넷을 통하여 볼 수 있다.
작품의 창작과정과 그 배경으로 알려면 화가의 입으로 직접 듣는 기회를 갖는 것이 좋다. 작품은 곧 사람인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뉴욕 아트 엑스포에서 원작의 그림을 캔버스 위에 수공업적인 방식 그대로 컴퓨터로 옮겨지는 과정을 보았다. 하이테크놀로지 감각도 있으며 작품의 이미지를 그대로 옮길 수 있는 합성 과정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것이다.
평소에 원하는 화가의 그림을 살 수 없는 수요자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 소비자들이 손쉽게 구입해 나름대로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사진, 포스터보다 질감과 색감이 있기에 원작과 같은 복제가 가능한 것이다.
19세기 초, 카메라의 출연으로 전 근대적인 생각으로는 사진을 예술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지금은 예술의 한 장르로 되었다. 현대미술이란 예술 창작의 새로운 첨단도구로 문명의 자취를 표현하여 그 시대 작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첨단전자 매체의 감각을 치열한 작가정신으로 담아내어 시대적 의미를 부각시킨다.
비디오 아티스트의 창시자 백남준씨는 전자시대를 예언한 통찰력 있는 안목으로
기계문명을 상징하는 자동화를 담아냈으며, 역시 첨단 매체인 TV, 비디오, 컴퓨터 등 20세기 미디어로 작가의 생각을 철학적-미학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사이버 갤러리에서 현대미술의 흐름을 파악하면서 전자매체의 다채로운 시도 대상을 레이저 광선으로 환상적인 조명효과로 작가가 의도하는 것을 추구하며 설치미술에서도 전자영상으로 빛과 인간의 지각과 의식 바깥 세계에서 억압된 욕망의 표출을 작가의 이미지로 현실과 환상이 오가는 3차원의 세계를 느끼게 한다.
21세기로 가는 우리들은 전자매체를 통하여 예술품과 교감을 하는 것이다. 기계문명과 감각마비로 메말라 가는 감정들을 순간이나마 정서적인 감성의 세계로 끌어들여 잠재의식 저 편에 숨겨져 있는 기억들을 되살려 주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정신적인 고뇌의 산물로써 예술작가의 고통과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그림들을 보여주는 사이버 갤러리 가상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이별 1999
떠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잠시 다른 공간에 갔다가 다시 오는데
무엇을 슬퍼하는가
가슴에 가득 차 있는 그 무엇을 떠난 뒤에 알게 되었다.
다시 온다는 기약은 무엇을 의미 하는가
끝도 시작도 없는 원 사이를
친구 만들기=되어주기 1999
이곳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외롭고 쓸쓸할 때 지난 학창시절 순수했던 날의 친구들을 그리워하곤 한다. 저마다 마음의 창을 닫고 고독하다고 소리친다. 주위에 자신을 이해하고 마음을 줄 수 있는 벗이 없다고 스스로를 세뇌 시킨다. 그 누구의 친구가 되기 보다는 친구가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자신의 일과 관련된 삶들을 만나면서 대인관계를 넓히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가정살림, 자식을 키우고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커가는 자식들이 품을 떠나고 제각기 자신의 할 일을 갖고 떠나갈 때처럼 더 이상의 허무함은 없을 것이다. 이제껏 무엇 때문에 살았던가?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 것 인가? 나는 무엇인가? 이 가정에서…… 끝없는 자기 존재 가치에 대해 의구심이 생기는 것이다.
전문직 여성들 역시 일과 가정을 잘 엮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도 모르게 자신과의 싸움을 해나가며 주부로서의 빈 보금자리의 죄의식을 씻어내기가 힘들고 좌절을 하는 것이다. 양보다 질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집에 있는 주부보다 더욱 큰 교육효과를 얻기 위해 자녀 교육 전문서적을 탐독하고 연구하며 또 하나의 직업의식으로 도전 해 나가기도 한다. 늘 집에만 있는 주부들은 자신이 아이들과 늘 함께 있어 준다는 사실만으로 효율적인 시간 사용을 잊기도 하는 것이다.
동서고금을 통해 예나 지금이나 모성애의 사랑으로 자녀를 키우는 것이 진리인 것 같다. 자녀, 남편, 가정 울타리 속에서 엄마이기 전, 부인이기 전에, 여자라는 굴레를 벗어나 인간이고 싶은 것이다. 젊음은 가고 자기존재의 상실감이 중년을 맞이하면서 잊었던 자아를 추구하며 나를 찾고 생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아이들은 나름대로 해왔던 대로 잘해나가고 물론 수시로 지켜보며 확인도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스스로가 독립적 주체임을 주장하며 모든 것을 간섭으로 받아들이기에 한 걸음 떨어져서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림을 보듯 아이와의 간격을 늦추기까지의 마음가짐이 힘든 것이다. 세상일 모든 것이 처음은 미숙 그 자체인 것 같다.
이럴 때 우리 여자들은 자가진단을 신체적 병, 혹은 정신적 갈등으로 해소 할 길을 찾는 것을 습성대로 운동, 쇼핑, 집안 장식, 종교생활, 봉사활동 등 각자 나름대로 취미 생활을 접하지만 그 속에서도 군중 속의 고독은 더해 온다.
마음이 맞는 친구와 차 한잔을 나누며 인생사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해주며 나이에 상관없이 그저 여자라는 그 한계와 주부라는 것이 일맥상통이 되며, 한 마디 하면 열 마디를 알아듣고 이해하며 인생을 살면서 각기 다른 형태지만 본질적인 고민은 같다. 또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타인의 삶을 존중하며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의 고민을 진실로 위로해주며 감싸주는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진심 어린 우정은 어린 시절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생활의 활력소를 위해 필요한 것 같다. 자신만의 문제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 마음을 열어 바로 우리 곁 가까이 있는 친구를 만나 대화를 하며 세상사 물결에 나를 담아보고 모두들 마음 속 깊이 친구이기를 원하지만 가정 속 안에서 세상 밖으로 나아갈 때 두려움을 안고 있다. 그러한 생활에 익숙해졌기에 자신이 없기에 습관적으로 몸을 움츠리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정신과 상담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기계화 되어버린 대인관계 속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을 찾지 못해 방황 할 때, 진정한 친구가 되어준다면 그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은 더욱 더 따스해 질 것이다.
“여보세요? 응 나야, 나 요즘 너무 우울해… 그리고 너무 잘 잊어버려, 조기 치매 증세 인가봐. “ “어머 그러니? 나도 그래! 나도 고민 중이였어…” “우리 만나자, 너 안바쁘니?” “우선 순위 모르니? 우리 집으로 올래, 아니면 밖에서 만날까?” “우리 그럼 만나서 살풀이 하자!” 우리 모두가 이런 전화 한 통화를 기다리는 건 아닐까……
영원한 예술…베니스의 밤 1999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베네치아의 특수한 지리적 환경을 화려하고 중후하게 표현한 중세 미술을 보고나서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만화 공방 갤러리에 들러 오래된 인쇄기와 단순 처리된 작품들도 재밌게 구경했다. 작품들을보면서 모든 것은 작가의 정열과 그 한계만큼 다가오는 것임을 새삼 깨달았다. 시간과 경험 축적만이작품에 우러나온다는 그 절대 법칙을 알기에 나는 늘 숙제처럼 마음 무거운 학생이 되기도 한다.
철제문에 깨어진 유리 조각 같은 색색의 스테인 글래스로 장식된 문을 열고 들어서니 정원에 스위스의조각가 자코메티의 기다란 조각품이 서 있다. 페기 구겐하임 콜렉션을 그대로 재현한 침실 다이닝 룸과사진들 60년대 피카소, 잭슨 폴락 작품도 있다. 흑백 사진으로 자주 봤던 자코베티의 의상, 액세서리,안경, 샌들 등이 선물 코너에서 판매되고 있다. 그녀는 생전 예술가들을 후원하기도 하고 많은 작품을사는 것으로 잘 알려지기도 했지만 화려한 스캔들로 더 유명하기도 하다.
사람은 가도 그 작품은 이렇게 남아있는 것이다. 걷는 것이 별로 불편하지 않아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야채 시장에 들렀다. 바구니에 담긴 싱싱한 채소와 탐스러운 과일을 보니 직업의식이 살아나 주부 본업인 장보기를 했다. 동서양과 아프리카 가면에 관심이 있는 나는 가게에 들어가 화려한 것부터 광대에이르기까지 모두 둘러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운하에 곤돌라들이 저녁 손님을 맞이하려고 즐비하게 떠 있다. 연인도 없이 데이트 하며 곤돌라를 타기보다는 차라리 오페라를 보자고 세 사람이 의견을 보았다.
저녁 오페라는 오래된 교회에서 공연됐는데 고유의 의상을 입고 바로 가까이서 들을 수 있어 참으로 편안하게 즐겼다. 그 멋진 공연을 보면서 예술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고 긴 역사의 소산이라는 것을 또 한번 느꼈다. 베니스의 밤은 바다 바람과 레스토랑의 불빛, 방랑객들의 발길과 함께 한 낮의 햇살아래서보다 더 그윽하게 다가왔다.
낯선 곳에서의 밤길이 무섭지 않은 것은 섬 안이어서 자동차 공해와 소음에서 벗어났다는 심리적 안정감 때문일까? 골목마다 손님들로 가득 찬 곳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인생의 애환을 담고 있는 듯 하다.내일이면 여행의 일정이 끝난다. 르네상스 운동의 본고장인 이곳에서 느낀 것은 중세의 암흑과 종교적억압에서 피어난 인간성의 존중, 자유, 그리고 인간의 의지를 찾으려 했던 많은 예술가들의 혼이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단테 갈릴레이, 마르코 폴로. 그들의 영혼의 흔적이 어려있는 베니스는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향기와 발자취는 영원하기만 하다.
파리를 돌아보면서…… 1999
주불 한국 문화원에서 열린 한미 미술인 협회 그룹전에 출품하기 위해 최근 파리를 다녀왔다. 에펠탑에 2천이란 숫자가 걸려있다. 2년 전 갔을 때 걸려있던 7백이라는 숫자는 이미 세느강 물결과 함께 흘러가 버렸다.
회원 6명과 파리를 좋아하고 프랑스어가 유창한 언니와 함께하는 여행은 마법의 끈처럼 끝없이 회상의 실타래로 이어져 나갔다. 문화원 직원들의 적극적인 협조아래 전시준비는 진행되었고 전시실의 구조는 작품을 걸기에 좋았다. 리셉션 준비로 슈퍼마켓에서 와인, 치즈, 비스켓, 과일 등을 사며 바게트 빵을 사 들고 나왔다.
작품을 다 걸고 숙소로 돌아올 때 메트로를 타고 오래된 6층 계단을 올라 긴 창문을 열고 창 밖을 보니 촛불을 켠 건너편에 아담한 거실이 보인다.
‘아, 파리의 밤이구나……’
헤밍웨이는 “파리는 하나의 축제”라고 하지 않았던가? 우수와 낭만이 감미롭게 흐르는 샹송, 대화 없는 프렌치 영화의 영상들이 오버랩 되어 가슴 속에 수를 놓는다.
시차도 없이 아침을 맞이했다. 차선이 없는 도로들 사이로 무질서 속의 질서가 보인다. 경적소리 하나 없이 차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3차선 문화, 획일화되지 않은 자유분방한 사고의 소유자들. 상대방을 향한 배려가 일상적인 교통지서 속에도 있다.
세계 3대 미술관 가운데 하나인 루브르에는 여전히 관광객들의 긴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한미 미술인협회 회원증의 위력이 효과를 보았다. 무사통과. 무엇보다 단체의 힘이 시간을 절약해 주었다. 각자 보고 싶은 곳에서 보고 나중에 한자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처음 왔을 때의 흥분보다는 여유 있게 느긋한 마음으로 아프리카 전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무로 깎아 만든 샤마니즘적 인간본능의 원초적 아름다움이 심장을 멈추게 한다. 조각상 모두 남자보다 여자의 키가 더 크다. 모성애, 다산, 생명 등을 중요시 하는 것은 태고 때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진리이다. 자연 그 자체가 신앙인 것이다.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많이 가진 프랑스는 그들의 예술적 안목으로 아름다움을 발굴했지만 지금은 인종문제로 사회화되어 외국 이민 통제를 시도하지만 프랑스인들은 국가의 상징인 자유, 평화, 박애 정신으로 ‘의식 높은’ 국민임을 자부하는 것이다.
2층 드농 평면 회화관을 스쳐 지나면서 선, 빛, 색의 강렬한 인상으로 진정할 수 없는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조각실로 내려왔다. 그리스 조각을 대하니 매끈한 대리석의 잘 다듬어진 선과 돌의 차가움을 느끼면서 작가의 고뇌와 갈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서양 예술의 진수를 다시 한번 맛보는 순간이었다. 예술가의 길은 끊임없는 자기성찰로 끝까지 예술, 그 한 길로 가는 ‘지구전’과 같다.
노상 카페에서 따뜻한 스프와 샐러드를 점심으로 먹으며 각자 본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누었다. 기념사진도 함께 찍었다. 어디를 가나 프랑스어 판이다. 중학교 때 언니가 불어를 가르쳐줄 때마다 좀 더 열심히 배우지 못한 것이 조금 후회스러웠다.
프랑스 헌법에 ‘프랑스 공화국의 언어는 프랑스어이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프랑스인들은 프랑스어 보호 작업을 철저히 벌이고 있다. 하지만 국제적인 흐름에 대응하기 위해 콧대 높은 그들도 요즘 사정이 조금 달라지는 것 같다. 젊은이들은 영어를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국가 문화정책 차원에서 프랑스는 세계 1백 20여 개국, 1백 60여 개 도시에 문화원을 갖추고 있다. 문화 강국 프랑스의 국민답게 그들은 외국 문화에 대해 높은 관심을 갖고 있다. 그들의 그런 열정이 프랑스 문화의 질을 높인다고 생각한다.
유년 시절 주한 프랑스 문화원에서 그림 전시회, 영화, 패션쇼 등을 보면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파리는 나에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날 문화원 오프닝 리셉션에서 주불한국 대사의 유창한 프랑스어와 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이 퍽 인상적이었다. 많은 손님들이 와 주었다. 문화원의 정성 어린 후원에 감사의 인사를 했다. 멋쟁이 파리지앵의 외모에서 풍기는 우아함과 리드미컬하게 들리는 프랑스어는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좋은 사람들, 맛있는 음식 그리고 예술품이 함께 만날 때가 바로 가장 행복한 시간이 아닐까……
엄마! 일기 숙제! 1999
저녁을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는 나에게 와서, “엄마, 나 숙제 일기 해야 돼. 뭐라고 쓰지?” “오늘 날씨는 해를 그리고, 놀이터에서 노는 그림을 그려봐. 그리고 네가 한 번 교과서에서 글자를 찾아서 쓰고 와서 엄마를 보여줘요. 리나가 다 쓰고 나서 엄마가 틀린 것 고쳐 줄게.” “엄마, 왜 일기는 맨날 써야 해?” “그래야 리나가 커서 이 일기를 읽으면서 어렸을 때를 기억할 수 있잖니.” “나 모르는 말 있어. 놀이터 못 써.” “너 그 글자 배웠어. 교과서에서 읽었을 거야.” “O.K. 찾아서 할게.”
설거지가 끝난 후 앉아 있으면 리나는 일기장을 가지고 다가온다.
“리나야, 글자도 다 잘 썼고 그림도 참 예쁘다!” 그런데 이 글자 다시 한번 책을 보고 써봐. 받침이 다르지? 이거 보고 리나가 다시 한번 잘 써봐. 그래 이제 다 잘 했다. 그럼 이 닦고 세수하고 예쁜 꿈 꾸게 책 하나 읽고 자자.”
“엄마, 내일은 나 어느 학교 가? 미국 학교 가? 나 빨리 한국 학교 가고 싶어.”
“토요일이 와야지. 한국 학교에 가서 친구도 많이 만들고 무용도 배우는 리나는 좋겠다.”
매일 저녁 반복되는 리나와 나의 대화이다. 처음에는 “엄마, 어떻게 해?” 하던 아이가 한 학기가 지나고 방학 숙제 일기를 쓰고 나서부터 제법 문장을 쓸 줄 알고, 안 보고 쓸 줄 아는 글자가 생기더니 요즘은 문장이 다듬어져 가는 것이다.
아직 학부모로써는 햇병아리인 나는 한국 학교에서 배운 그 동안의 공부들, 여러 강사님들의 좋으신 말씀들은 유아관과 교육관을 정리 시켜주며 교장 선생님의 헌신적인 교육열과 40년 넘은 경험에서 나오는 산 교육을 보며 생각하는 부모, 공부하는 엄마의 길잡이로 만들어 주시는 것에 감사함을 드린다.
리나와 데나를 데리고 새벽부터 준비해 달려가는 차 안에는 리나는 차 안에서 리나 가방을 뒤지고, 학교에 도착하면 교실 창가에서 수업 시간 들려오는 책 읽는 소리가 나와 내 딸이 서로 공감하는 한국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교류가 이루어져 이 미국 땅에서 내가 만끽하는 가장 큰 즐거움의 시간이 되곤 한다.
이중 문화 속에서 일주일에 한 번 딸아이와 내가 같은 문화를 계승하는 날인 것이다.
“엄마, 엄마도 나처럼 한국어 이렇게 배웠어?”
“엄마, 왜 우리는 한국 사람이면서 여기서 살아?”
“아빠가 공부 하고 뉴욕에는 세계의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서로 열심히 배우면서 사는 거야.”
아직 그 나이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에 대해 이제 서서히 묻기 시작하는 그 신선한 질문들이 나를 어린 시절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엄마, 왜 달, 별들은 밤에만 빛나? 하늘은 왜 파래? 사람은 왜 말을 해?”
하루에도 몇 번씩 많은 질문들을 나에게 물어오는 것이다. 한국신문, 책을 보고 아는 글자가 나오면 큰 소리로 읽고, 음식점, 식료품 가게에 가면, 이게 글자를 읽고 아는 말이면 너무 좋아하는 그 아이를 보면 막 내가 글자를 배워 어렸을 때 엄마와 길을 걸을 때 간판을 보며 글자를 읽던 그 시절이 떠오른다.
그 동안 가르치는 입장에서 내가 알았던 것과 학부모가 되어서 내가 느끼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학교는 가르치기 보다 문제를 제시하고 공부는 집에서 부모가 시키는 것이고, 선생님은 그것을 검사하는 삼위일체 속에서 교육의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한다.
내가 그것을 깨닫고 생활 속에 시도하려 할 때는 늘 시행착오에 부딪히지만 시작은 반이라고 내 자신이 보여줌으로써 행함으로써 내 마음을 딸 아이에게 전하고 싶다.
“리나, 엄마는 리나가 너무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워. 리나는 건강하고 착하고 한국어도 열심히 공부해서 이제 읽고 쓰고 하니까……”
“엄마, 난 엄마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
“얼만큼, 리나야?”
“하늘만큼 높고, 땅만큼 넓게!”
“그래, 엄마도 그래. 그럼 잘자! 고운 꿈꾸고 안녕!”
오늘 하루도 이렇게 보내며 먼 훗날 딸 아이가 커서도 일기 숙제를 하며 변함없이 내게 달려올 것을 상상하며 그 순간들을 리나와 나와의 사랑의 끈을 묶는 대화의 시간으로 삼으리라. 둘째는 이러한 훌륭한 분들이 부모님들을 위해서 그 바쁜 시간을 쪼개어 와 주시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며 그것도 봉사해 주신다는 데는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이 모든 분들의 열의와 봉사정신, 훌륭하게 학교를 이끌어 가시는 교장선생님의 노고에 마음 속 깊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여름 바다가 주는 신비 1998
어디론가 떠난다는 사실만으로 여행은 즐겁다. 아이들은 여름 방학 선물로 바다로의 여행을 제일 좋아한다. 뉴저지 해안선은 대서양을 따라 이어져 있어 집에서 스테이트 파크웨이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리면 조용하고 깨끗한 오션 그로브 비치를 만날 수 있다.
주중이어서 예약 없이도 고풍스러운 호텔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1920년대에 지은 빅토리아 스타일의 아담한 건물이 바닷가의정취를 더해 주었다. 로비에는 마호가니로 만든 전화부스까지 있어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방. 우리는 짐을 풀자 마자 아이들처럼 파라솔과 의자를 들고 바닷가로 달려 갔고 남편도 책 한권을 들고 함께 나섰다. 한 폭의 아름다운 병풍 같은 푸른 바다가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짙푸른 바닷빛은 반짝이는 은빛 물결로 찰랑이고 비릿한 바다 내음도 바람에 실려온다.
백사장의 타오르는 태양 아래서 젊음을 태우기라도 하듯이 한가롭게 선탠을 즐기는 선남선녀들, 셀폰을 들고서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는 사람들. 올 해는 그들 모습에서도 유난히 낭만이 깃들여 보였다.
드넓은 바다. 밀물과 썰물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념을 감싸안고 출렁거린다. 먼 전쟁터로부터 기다리던 연인의 비보에 접한 듯 그 무엇인가 원인 모를 슬픔으로 밀려와 허무의 노래가 되어 부서지기도 한다.
광야에 홀로 선 것처럼 고독한 오늘의 문명인들. 회색 숲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쌓여 몸부림치는 도시의 육신들. 바다는 그런 현대인들의 모든 상처를 보듬어 준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나 지금이나 바다에 와서 시를 노래하며 그림을 그리며 사랑을 가꾸었던가!
일출과 일몰의 태양 빛. 갈매기가 날아오르고 뱃고동 소리 울리는 항구의 부둣가, 달빛이 교교한 밤 바닷가의 산책. 산책길에 부는 바닷바람의 감미로움…..
바다는 문명의 뒷켠에서 고독해 하는 현대인의 고달픈 삶을 침묵의 대화로 어루만져 준다. 고해의 인생길. 얽히고 설킨 실타래처럼 엉클어진 세상사. 저 바닷속 깊숙이 인간을 빨아들이는 자연은 조각난 인간들의 가슴을 한 없는 모성애처럼 되어 포옹해 준다. 한 손 가득 조개를 주워서 들고 오는 아이들은 다시 모래성을 쌓기 시작한다. 남편은 책을 접고 아이들과 어울려 바다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는다.
파라솔 그늘 아래서 먼 지평선 넘어 아스라히 보이는 돛단배를 찾아본다. 해마다 오는 바다지만 여름 바다는 또 다른 것을 느끼게 한다. 명상에 젖게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깨달음을 주며, 껍질을 벗기고 새롭게 거듭나는 법도 가르쳐 준다. 진정한 삶은 뜻을 이루어 완성하는데 있지 않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끝는 미완성의 길에 서는 것. 끝 없이 준비하는 과정 그 자체이던가.
암초에 부딪히며 흰 거품을 토하고는 다시 밀려갔다가 되돌아 오는 파도처럼 바다는 나를 그렇게 살라고 한다. 바다는 생명의 신비를 일깨우게 해주고 넉넉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대 자연의 어머니이다.
고흐의 집에서 1998
오베르 쉬르 우와즈에 도착했다. 역 앞의 고흐의 공원 구청 앞에 고흐 그림 포스터가 보인다. 마을 전체가 이곳에서 마지막 불꽃처럼 타 버린 화가의 숨결로 가득한 것 같았다.
차가 지나가면 꽉 차 버릴 것 같은 골목길의 양쪽으로 들어서 있는 시골집들의 아담한 정원들이 아름답다. 거기서 돌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오베르 교회의 종탑의 시계가 보인다. 고흐의 그림 속의 교회가 실제로 시야에 확장되어 온다. 아치형 창과 돌 벽담들, 이끼 낀 지붕의 타일들,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묵묵히 서 있다. 증명사진처럼 고흐의 그림이 붙어 있다.
일본 영화 ‘드림’에서처럼 100년 전 그 시절 ‘까마귀가 나는 밀 밭’ 사이 속으로 나는 들어간다.
아침 햇살과 언덕길 길가에 핀 가을 꽃들 코스모스가 흔들거린다. 조용한 농가의 아침이다. 비탈길을 올라서니 그림처럼 끝 없이 펼쳐진 밀밭이 보인다. 까마귀는 상상에서 푸드득 소리를 내며 나와 끼르륵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듯 하늘에서 날갯짓을 한다.
검은색 죽음의 예감, 까마귀 떼들이 환영 속에서 푸드덕 댄다. 길가에 떨어진 깃털과 돌을 주웠다. 깊은 숨과 밀밭을 가슴속 깊이 들이마셔 폐부 속에 담았다.
자연에는 폭풍우의 드라마가 있고 인생에는 고통의 드라마가 있다던 고흐는 37세에 권총 자살을 한 주의 이틀 동안 그 고통 속에서 마지막 이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묘지로 향하는 길에서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800여 통의 편지 중 이 구절들이 내 귓가를 울리고 있다.
화가는 비록 죽어서 땅에 묻힐지라도 작품을 통해서 후에 오는 여러 세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위대한 화가는 광인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무한한 믿음과 찬사를 보내는 사람도 광인이다.
도시와 마을을 상징하는 지도의 점은 나를 꿈꾸게 한다. 기차를 타고 가듯 별들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고흐의 죽음 후 그 상실감에 곧이어 따라 죽은 테오의 무덤이 고흐 옆에 나란히 누워있다. 그들은 지하 속에서도 편지로 나누지 못한 사연들을 나누고 있으리라.
10년 동안 그린 876점, 정규 미술 학교 수업을 받지 않고 뒤 늦게 독학으로 그려낸 그림들, 선천적 뇌 장애를 갖고 요양 생활 중 신경증 발작증세를 일으키면서 화폭 속에 그 모든 것을 발산하여 토해낸 그 빛은 영혼의 울림으로 발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목사의 아버지 밑에서 신학대학에 떨어지고 광부 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며 그린 그림 중 <감자 먹는 사람들>은 밀레의 영향을 받아 농민을 주제로 하여 그린 하층민의 비애 서린 어두운 그림들 중 하나였다. 판화 복제와 해부학 원근법을 책을 사서 공부하다 테오가 있는 파리로 가서 인상파 물결에 따라 밝은 색채의 화풍 세라의 정묘법과 일본 판화에 강한 인상을 받고 색의 분해를 터득했다.
그 모든 것을 색감으로 보고, 자연과의 교감을 위해 산책을 하며 하늘의 움직임, 나뭇가지의 흔들림 등을 관찰하며 느꼈던 환청과 환각 증세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붓과의 씨름이었다.
<자화상 시리즈>, <해바라기 시리즈>, <밤의 카페 테라스>, <붓꽃> 등의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그 고통의 잔해들을 지친 붓 자국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생활고에 힘겨운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그림을 팔아야 하고, 잘 팔리게 되도록 더 나은 그림을 그려야 했지만, 열악한 상황을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들, 파리의 분위기와 심리적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는 튜브 물감을 먹고, 파라핀 기름을 들이킨다. 절망, 우울, 무기력, 그 모든 것을 함께 작업을 위해 파리를 떠났다.
로트렉과는 서신을 교환하였으며, 고갱과의 생활에서 성격 차이로 격분하여 귀를 자르고 마는 싸움 끝에 헤어지게 된다. 커크 더글라스가 고흐로 나온 영화에서 자화상처럼 흡사한 불타는 두 눈과 수염, 후질구레한 옷차림, 첫 구혼에 실연 당하고 광분하던 모습, 붕대 감은 얼굴들의 영상들이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내내 시야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삶의 아이러니 이다. 살아 생전 그림 한 점 팔리지 않던 것이 100년 후 지금 경매장에서 기하학적 숫자로 팔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양원 생활,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그림만이 일상의 전부였던 작가의 고통의 무게가 사후의 인정과 물질로 환원이 되는 것인가, 신의 도전의 산물인가?
3층 좁은 지붕 밑 다락방에 왔다. 침대, 책상, 의자만이 있다. 마지막 숨을 거둔 곳, 죽음을 지켜본 의사 가셰 박사는 말했다. “그는 결코 죽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이 창조해낸 위대한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그는 예술을 향한 사랑 앞에 순교한 것이다.”
고흐의 주머니에서 나온 부치지 못한 마지막 편지에는 “내 작품들, 난 거기에 내 인생을 걸었지. 그러다가 거의 다 결단이 났어. 테오, 난 지금 죽었으면 좋겠구나…… . 그림으로써 밖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라고 쓰여 있었다.
한 영혼의 소진, 타버린 불꽃, 빈곤과 고독, 고뇌의 생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이다. 유작 전시 이후 인정을 받아 20세기 초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남아 기록되고,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밖에, 아무 말도 할 수 가 없었다.
나는 다락방에서 내려와 선물 가게에서 고흐 전 노란색의 해바라기 그림 브로치를 사서 가슴에 달고 고인에게 안녕을 고했다.
중국 기행문 1998
서울에서 2시간 거리 중국의 수도 북경의 공항은 새 첨단의 국제 공항이었다. 군복을 입은 젊은 공안원 의 무표정이 대리석의 바닥의 차리움 과 대조가 되어 보인다. 공항에서 만난 가이드는 군용 밴 을 대기 시키고 조선족 3세 이기에 이북 사투리가 섞인 억양으로 반갑게 맞아준다. 천년 의 도읍지 북경. 근대적 건물과 옛 것이 공존하는 시가지에 무더운 7월의 40’C 가 넘는 폭염이 거리에 배어있다. 소호의 차이나 타운 분위기에 익숙해서 인지 악취와 지저분함, 웃통을 벗은 남자가 부채질하며 걸어 다닌다. 시가지의 고층빌딩과 달리 옷가지가 널린 서민 아파트들이 보인다. 천안 공원 명, 청 황제들이 오곡풍년 제사를 지내던 곳, 지대한 규모가 압도적이다. 지방 상경인 들의 깃발 부대의 노란색 타이와 빨강 머플러가 사회주의의 유니폼 같다. 에코의 소리가 울린다는 회음벽 에 귀를 대고 있는 이들, 외국인 관광객 보다는 내국인들의 물결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검은 머리가 일색이지만 (한족, 조선족, 몽고족, 티벳트족) 동양인 인종시장을 방불케 한다. 경산공원 큰 부처 마이다라불 앞에 큰절을 합장하는 이들 향은 불조심 때문에 키지 않는다고 한다. 멋을 한껏 부린 처녀들이 두 손 모아 소원성취 기도를 한다. 그런 뒤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다. 등뒤로 땀줄기가 흐른다. 바람 한 점 없는 뙤약볕에서 황제들도 자기보다 높이 있는 하늘과 소통하기 위해서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유년시절 사직공원에서 기우제를 한다기에 놀러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비는 만물을 소생케 하는 대 자연의 신비, 생명의 물인 것이다. 동양철학에서 음양론의 이치, 하늘은 남자고 땅은 여자이며, 빛과 소리, 그 진동 뒤에 적시는 창조의 물을 생각해 보았다.
저녁시간 티베트족 고유 전통의 춤과 남방 분위기의 식당에서 북경요리를 먹고 나서 서커스 구경을 하였다. 단원들은 어린 나이에 오로지 연습만을 위하여 지냈듯이 단련된 기교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애처롭게 다가온다. 몸의 유연성을 위하여 매일 한 컵씩 식초를 마신다고 하니 화려한 복장과 화장이 땀이 안쓰럽게 보인다. 공산국가에서 조기교육과 스파르타 식 예체능의 훈련이 과연 장기적 교육의 효율성이 있으며 진정 자신들이 좋아서 하는 열정 속 에서 창조의 미가 주어질 것이다.
아침 출근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짧은 치마와 선글라스를 끼고 자신 있게 달리는 여자들을 보니 그들의 인력이 사회에 얼마나 많이 기여하는가를 볼 수가 있다. 중년 여성들도 일터로 향하고 있다. 전족을 하였다던 그 풍습은 사라져 버린 중국여성의 모습이며 활기차며 거세 보이기만 하다. 직장에 돌아와서 남편은 요리를 하며 부인들은 마작을 하며 지낸다고 하지만 아들선호 사상으로 호적에도 못 오르는 딸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상경하여 불법적인 행위로 호적을 만들기도 한다는 소리에 1억이 넘는 인구, 중국의 국가 정책에 1명만 낳아서 잘 키우라는 운동을 이해해 본다. 만만디 성경으로 대륙기질, 느긋하고 여유가 있어 차 사고율이 적다고 하는데 교통량의 붐비는 속에서도 무질서 속에 질서적인 자전거 행렬이 한가로워 보인다. 신형 벤츠 차가 미끄러지듯 지나가고 그 뒤로 외국차들도 보인다. 중국경제가 지금 포만 경제로 가득하고 언론의 자유가 있기에 예전보다 좋지만 탐관오리들의 비리가 있지만 앞으로 더 잘살게 되리라는 가이드의 열띤 소리가 아침 출근 거리에서 사회경제의 한 단면도를 보는 것 같다. 중국 여자들이 키도 크며 날씬한 이유는 기름기 음식을 먹지만 쟈스민 차를 마시고 자전거로 운동을 하기에 의자 생활이 몸에 배여서 나이든 노인들도 허리를 펴고 다니는 이들이 눈에 띄게 보인다. 현대사의 아버지 손문의 처, 송 경령과 요룽개의 부인, 하향음 여성 해방사상가로 노동자 교육 여성 지도자 양성을 한 그녀들은 주은래는 국가의 진귀한 보물, 중국 민족을 위해 모범을 수립한 여성이라고 극찬을 했다. 당원으로써 인력을 쓰기 위해 평등의 자격을 주어서 여성의 지위가 높아 진 것일까?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인들이 이렇게 오래 마음의 잔상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진정한 자유는 경제적 자립 속에서만이 남녀의 동등권이 부여된다는 원칙을 그녀들은 터득한 것 같다.
천안문 광장 뉴스와 신문에서만 보던 모택동의 큰 인물화가 걸려있다. 백만이 모인다는 광장, 천안문 사태 학생과 시민의 데모 중심지 건너편 현대식 빌딩 호텔과 인민 대회당이 보이고 군인들이 행진을 한다. 사진 촬영을 금지하기에 모두들 서서 구경을 한다. 황사 현상의 날씨와 무더위가 아침부터 느껴진다. 인파속을 헤치며 황금 빛의 지붕, 자금성으로 들어가니 역사의 무게가 눌러온다. 지대하고 웅장한 중국성에 그 옛날 우리 조상 사대부 사신들이 황제에게 인사하려 왔을 때 기분을 느껴본다. 사대주의는 외교정책으로 속국이 되지 않고 조선으로 남은 우리 한국민의 슬기가 가슴 저리게 여며온다.
화려한 중국 도자기 무늬처럼 장식된 도안들 장식품. 마지막 황제 영화 장면이 기억이 난다. 선이 곧은 타일 지붕 기와의 비취색 빛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다. 버선코처럼 휘어진 한국기와 진회색 깊은 멋을 떠오르며 경복궁의 아담함의 정취가 영상처럼 스치며, 황제가 있는 지붕에는 9개의 동물 앞에 사람이 선두에 있다. 9자는 복이 온다는 숫자라고 한다. 3천 궁녀 아닌 8천 궁녀가 살만한 장소다. 황제는 사라져도 성만이 남아서 역사의 흔적을 보여준다. 여름의 별궁, 이화원 에서 서태후의 권력을 보는 듯 했다. 인공호수 곤명호, 집채만한 배가 관광객을 싣고 가고 있다. 호수를 만들기 위해 퍼낸 흙으로 인공산 만수산이 되었다고 한다. 대리석 기단의 정자, 문과 창문이 청동으로 되었으며 728M 장도 복도에 삼국지, 손오공 그림들이 섬세한 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걸어도 걸어도 보고 또 봐도 연결되어버리는 그림들, 무수한 이야기가 들려 오는듯 하다. 예술성 보다는 민화처럼 친근하게 중국의 역사를 한눈에 들어와서 글 보다는 그림의 무한성 의미, 유니버셜 랭귀지인 것이다.
연못에 피어난 꽃분홍 연꽃이 한 여름에 자태를 뽐내고 있다. 진흙 속 에서 뿌리를 내려 피어나는 영롱한 연꽃, 불화에서 늘 보던 그 꽃 이다. 연꽃에 유난히 애착이 가는 이유는 내 이름이 자가 있기에 정이 가며 불교를 공부하게 된 인연도 연꽃위에 앉은 부처상의 의미를 알고 싶었고 끊임없는 자아추구를 하게 된 동기 이기도 하다. 세상이 혼탁해도 연꽃처럼 피어나라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나는 사랑한다.
만리장성으로 향하는 길가에 복숭아 나무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농부들이 길가에 나와 파는 것을 10원주고 사니 한 봉지 가득 이다. 맛도 기막히게 좋은 천도화이다. 중국화 미인도의 뺨 같은, 르노와르의 여체 복숭아 빛 살결 같이 고운 껍질을 누르면 벗겨져서 단물이 흐른다. 한입을 베어 먹으니 입안에 단맛이 그윽하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 진의 시황제가 연결을 시작하여 명대에 만들어 졌다는 만리장성을 케이블카를 타면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눈을 감고 말았다. 혹시나 아찔한 생각에 그리고 성루만 쳐다 보았다. 산 마루를 따라 전개되는 역사의 유적지, 이 긴 성벽의 연결을 만든 이들은 저 흙 벽 속의 땀방울로 남아서 사라졌던가…병사들은 성벽에 기대어 무엇을 기다렸을까? 오랑캐 적군의 무리들은 이 끝없이 긴 성을 쳐다보며 무슨 상념에 젖었을까 싶다. 시원한 바람 줄기가 불어온다. 일행들과 한낮의 더위를 끌려가며 오른 성 위 에서 다시 내려갈 길들을 내려다 보며, 쉬어갈 자리를 찾아 앉으며 차가운 음료수를 마시러 갔다. 세계 어디를 가도 있는 콜라를 마셔다.
명십왕릉 13명의 황제가 묻힌 무덤은 거목들이 울창하여 그 뿌리들이 땅 위에 용트림하게 뻗어나 있다. 상상의 동물 말, 기린, 코끼리, 낙타, 해태 등의 석상들이 사후세계 신하들처럼 늘어서 있다. 지하궁전의 출구는 서늘하고 늘 황후용 의자가 놓여있다. 중앙석대 앞에 지폐들이 사방에 흩어져있다. 중국인들이 제사 때 돈을 태운다는 그 풍습을 보며 사라져간 이들의 넋 앞에서 그 누구의 기원을 하였을까? 어디를 가나 인해전술 중공군 대열처럼 내국인 행렬로 붐빈다. 지친 몸을 차에 싣고 이제는 대 자연의 품으로 갔다. 용정협 호수는 신선들이 풍류를 즐긴 것 같이 옛 모습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배를 타고 돌면서 화폭 속으로 들어가며 붓을 날려 가듯 그린 그 선들의 나열처럼 서있는 돌들이 절묘한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저 말없이 대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 하나가 되어본다.
아침에 모여 무술 기공을 하던 이들이 오후에는 남녀노소들이 꽹가리 장단에 맞추어서 부채를 들고 전통춤을 추고 있다. 선두에선 노인들을 따라 실타래처럼 연결되어 움직인다. 젖을 물리면서 쳐다보는 젊은 아낙네의 모습이 사라져 가는 모성애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춤을 추던 이들을 찍으면서 훔쳐보듯 본 모습을 사진에 담아 두었다. 관광코스를 끝내고 자유시간이 주어져도 정엄한 분위기와 말이 통하지 않으니 불안도 하지만 서민들이 사는 모습과 부딪치고 싶어서 북경의 번화가 왕부정을 가기 위해 택시가 호텔 앞에 있기에 가이드에게 물어서 가기로 했다. 밤거리에 데이트하는 젊은이들 시원한 바람이 불고 파라솔 의자 아래서 이야기 소리가 흩어져 들려온다. 백화점 주위에 유명상품 선전 사진들이 서구화 물결처럼 즐비해 있다. 관광부 토산품 가게의 일률적인 상품들, 붓, 차, 도자기, 칠보공예, 비취, 한약, 중국옷, 동양화 그림들. 어디를 가나 같은 것이 사회주의의 체제하 에서 운영되는 국영관리이기에 특색이 없으나, 이곳에 오니 개인상점들이 있어서 다채롭다. 중국 전통 과자들이 즐비해 있는 곳에 월병과와 과일 말린 것, 약과들의 크기가 다양하며 맛도 일품이다. 사탕종류도 여러 가지로 장식되어 있어서 아이들 생각에 사며 어디를 여행해도 식품정의 살아있는 생기와 그 곳의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대하게 되어서 좋아한다. 차 종류의 다양함은 알고 있어도 본토의 가게여서 그런지 더욱 많다. 국화를 말려 만든 국화차를 샀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 말린 꽃이 살아나듯 피어나는 모습과 향을 다가오는 가을날 마시고 싶었다. 검정 실크에 병풍의 수처럼 놓인 옷을 샀다. 화려한 꽃 수와 나비들이 어울려 섬세한 수가 너무 곱
다. 입기보다는 걸어 두어서 수를 감상 하고, 문양들의 의미를 알고 싶다. 전통옷들은 유행을 타지 않고 그 나라를 기억하기에 장만하여서 둔다. 뉴욕에서는 어느 모임이나 다민족 문화가 있기에 장소에 따라 어느 파티복보다 다양한 연출이 되기에 잘 입는다. 몸매가 들어나는 차이나 컬러와 옆이 트인 원피스와 실크자켓은 패션잡지나 영화에서 인상깊게 늘 보았기에 서양인들도 즐겨 입는다. 한복과 기모노도 그 뒤를 이어 각국 디자이너들이 각기 고유선과 스타일로 만들어 패션쇼도 하고 있지만 차이나 복처럼 스타들이 선호하기에는 더 시일이 걸리는 듯싶다. 보석가게에도 비취의 다양함과 디자인의 섬세함이 있다. 중국여인들 몸에는 금이나 비취용 액세서리가 늘 하고 다니기에 한눈에 중국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의 문화상품으로 온 세계에 퍼져가는 기공술 단전호흡은 맨하탄 거리에 의자를 펴놓고 맛사지를 해주는 모습이 어디서나 볼수있따. 한방약 동양의 신비 침술도 의약계에서 인정받고 있으니 전통을 상품화 시키며 영화도 세계시장을 파고 들고 있다. 노자, 장자, 공자의 동양철학들이 21C 첨단 문명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열기를 더해가는 요즘 중국인들의 그 자신감은 대국의 기질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조상들의 선물인 것 같다. 세계 어디를 가나 참새와 중국식당은 있다고 하니 가이드는 일본인에게 일본말을 하면 절대로 D.C 가 안되니 사용하지 말라고 안다. 어디를 가나 정찰가격을 믿을수 없으니 불편함 정도는 있지만 깎아주는 인정을 중국의 상술로 보고싶다. 일본인을 증오하는 항일정신은 역사가 말해주듯 남아있지만 요즘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받은 설움을 본토에 있는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에게 갚는다고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은 조심성 있게 염려를 하는 것이다. 급하게 빨리 확장하다가 문닫고 나오면 손해보는 것은 지름길인 것이다. 붉은 빛 글자들이 불빛에서 복자를 뿜고 있다. 복을 기원하는 그들은 목욕마저 지난 복이 나가기에 자주하지 않는 것은 지형적으로 물이 부족해서 나온 습관이 아닌가도 싶다. 인력거를 타기 위해서 관장으로 가니 고풍스럽게 벨벳으로 의자를 만든 것을 골랐다. 시내 한 바퀴 돌며 야경을 구경하는데 운치가 있다. 멀리서 보이는 주마들 처럼 보이는 붉은 등이 뒷 골목가를 밝혀주고 한산해 지는 거리 인파들이 사라져 가고 밤이 깊어감을 보고 있다. 격변하는 현대의 중국은 지금 깨어나고 있다. 밀수, 도박, 매춘, 마약의 문제도 안고 있지만 만단디 정신으로 서서히 움직이고 뻗어나가는 중이다. 북한도 사회적, 정치적 체제를 중국처럼 되어가듯이 다가오는 문제점을 문호 개방으로 열어가며 받아들이면서 세계화 대열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동양의 정신적 뿌리, 역사의 현장을 보고나니 그들의 저력에 맞서서 대응 하여할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뉴욕에 돌아가면 차이나 타운가면 북경식의 요리와 억양을 듣고 싶다. 아이들에게 한자의 중요성을 알리면 더 가르치며 중국의 역사, 당, 송, 원, 명, 청 나라의 역사를 알며 노자 책을 끝내며 중용을 다시 읽으며 중국화를 더 보고싶다. 대중 예술 영화, 음악을 찾으며, 숙제만을 머리 속에 잔뜩 담고 돌아오는 여행이었지만 그 속에서 지난날 한국과의 관계와 앞으로 미래가 보일 것 같다.
바닷가에서
끝없는 망망대해를 바라본다. 어디서부터 시작 되어진 것일까? 지구가 우주에서 생겨났을 때부터 물이 있기에 생명체가 존재하고 지구의 반이 넘게 바다인 것이다. 아득히 먼 지평선 위에 흰구름이 두둥실 걸려있다. 머나먼 미지의 대륙을 향하여 인간들은 모험의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파도가 출렁거린다. 한시도 바다는 고요하지가 않다. 밀물과 썰물이 일고 있다. 넓고도 넓은 끝없이 푸른 바다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파도의 높낮이를 주어주고, 펼쳐진 모래사장에 은빛의 모래가 밀려가는 물살에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조개들이 씻기어져서 줄을 그러 세월을 새기고 날카로운 면은 다듬고 씻기어서 부드러운 선을 만든다. 수많은 시간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바람과 물살이 한 면을 이루어 형태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들의 모습이 그 속에서 보여진다. 자연 속에서 깨달음이 주어진다. 조개의 빗살무늬에서 인생의 연륜 나이테를 보았다.
두 딸아이는 파도놀이와 조개, 돌을 줍는다. 모래 위에 주운 것을 모아둔다. 물결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바다와 동화되어 논다. 나는 백사장에 앉아서 심연의 깊은 바다처럼 내 마음은 바다와 하나가 되어서 관조를 한다.
아이들은 뛰어놀고 나는 않아서 마음으로 바다를 가슴속 깊이 담아두려고 한다. 부드러운 감촉이다. 씻기고 씻기어서 다듬어진 환전한 조각품이 손 안에 쥐어진다. 되돌아가는 파도 줄기가 다시 돌아와 부딪힌다. 부숴지는 흰 물살이 거품을 내며 암초에 부딪히며 소리를 낸다. 하염없이 바라보아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처럼 이어지는 물살들의 선들이 고운 레이스처럼 수를 자아낸다.
바닷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서 강에서 바다로 흘러 흘러서 어디로 가는 것 일까? 둥근 지구를 돌고 돌아서 다시 한순간이 지점에 있다가 다시 또 흘러갈 것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아도, 아니 내가 물이 되어서 그 속에 합류되어 지는 날도 머지 않아 올 것이다…
푸른 바다는 손 안에 담으면 그 빛깔이 사라진다. 바닷물은 왜 그다지도 짤까? 과학으로 배우는 정답보다 자연이 주는 뜻을, 이치를 깨닫고 싶다.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며 끝도 시작도 없는 수많은 생각을 하여 본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며 날다가 바다속에 부리를 넣었다가 V자를 그으며 창공을 날아간다. 노부부가 손자를 데리고 모래사장을 거닐다가 손자가 앞에 무언가를 집으면 가만히 서서 바라보며 기다려 주고 다시 걸어가면 뒷전에서 걸어간다. 재촉하지 않는 모습이 삶의 지혜와 여유로움을 보며 한 걸음 물러서서 아이들을 볼수 있는 눈을 갖고 싶다.
오후가 되면서 하늘은 먹구름으로 엎혀 지며 해가 지고 어스름한 저녁바다 모래사장에는 아무도 없다. 발코니에서 밤바다를 바라본다. 그 푸르던 바다와 하늘이 암흑으로 한 면이 적막의 바다 위에 비를 뿌린다. 맞닿아 버린 수면을 보며 둥근 원을 한 지구를 그리며 보이지 않는 별을 찾는다. 파도는 하얀 물거품을 투하며 어둠속에서 한줄기의 선으로 이어진다. 광활한 바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 속에서 수억 년 내려오는 저 소리의 의미, 우주의 신비가 그 속에 담겨져 있다.
이른 새벽 바다가 보고 싶었다. 3시에 일어나 바다를 바라보니 하늘 위편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다. 해를 안고 대지를 서서히 깨어나며 어둠이 걷혀지려고 한다. 바람이 감미롭다. 새 날을 맞이 하는 태동의 느낌이 감싸온다. 시간이 오는 건지, 가는 건지 멈춤은 아닌 것 같다. 새벽 하늘과 수면은 이등분 되어지려고 한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보여진다. 쏴아……. 쏴…. 철썩…. 처얼썩..
큰 물결이 파선되어 부숴지고 일듯이 생의 의미를 바다와 같이 생각하고 복잡한 세상사 그 속의 모든 번민을 저 바다 속에 나는 던져 버렸다.
어디론가 떠난다는 사실만으로 여행은 즐겁다. 아이들은 여름 방학 선물로 바다로의 여행을 제일 좋아한다. 뉴저지 해안선은 대서양을 따라 이어져 있어 집에서 스테이트 파크웨이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리면 조용하고 깨끗한 오션 그로브 비치를 만날 수 있다.
주중이어서 예약 없이도 고풍스러운 호텔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1920년대에 지은 빅토리아 스타일의 아담한 건물이 바닷가의정취를 더해 주었다. 로비에는 마호가니로 만든 전화부스까지 있어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탁 트인 바다가 보이는 방. 우리는 짐을 풀자 마자 아이들처럼 파라솔과 의자를 들고 바닷가로 달려 갔고 남편도 책 한권을 들고 함께 나섰다. 한 폭의 아름다운 병풍 같은 푸른 바다가 시야에 가득 들어온다. 짙푸른 바닷빛은 반짝이는 은빛 물결로 찰랑이고 비릿한 바다 내음도 바람에 실려온다.
백사장의 타오르는 태양 아래서 젊음을 태우기라도 하듯이 한가롭게 선탠을 즐기는 선남선녀들, 셀폰을 들고서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는 사람들. 올 해는 그들 모습에서도 유난히 낭만이 깃들여 보였다.
드넓은 바다. 밀물과 썰물은 끊임없이 일어나는 사념을 감싸안고 출렁거린다. 먼 전쟁터로부터 기다리던 연인의 비보에 접한 듯 그 무엇인가 원인 모를 슬픔으로 밀려와 허무의 노래가 되어 부서지기도 한다.
광야에 홀로 선 것처럼 고독한 오늘의 문명인들. 회색 숲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쌓여 몸부림치는 도시의 육신들. 바다는 그런 현대인들의 모든 상처를 보듬어 준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예나 지금이나 바다에 와서 시를 노래하며 그림을 그리며 사랑을 가꾸었던가!
일출과 일몰의 태양 빛. 갈매기가 날아오르고 뱃고동 소리 울리는 항구의 부둣가, 달빛이 교교한 밤 바닷가의 산책. 산책길에 부는 바닷바람의 감미로움…..
바다는 문명의 뒷켠에서 고독해 하는 현대인의 고달픈 삶을 침묵의 대화로 어루만져 준다. 고해의 인생길. 얽히고 설킨 실타래처럼 엉클어진 세상사. 저 바닷속 깊숙이 인간을 빨아들이는 자연은 조각난 인간들의 가슴을 한 없는 모성애처럼 되어 포옹해 준다. 한 손 가득 조개를 주워서 들고 오는 아이들은 다시 모래성을 쌓기 시작한다. 남편은 책을 접고 아이들과 어울려 바다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는다.
파라솔 그늘 아래서 먼 지평선 넘어 아스라히 보이는 돛단배를 찾아본다. 해마다 오는 바다지만 여름 바다는 또 다른 것을 느끼게 한다. 명상에 젖게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깨달음을 주며, 껍질을 벗기고 새롭게 거듭나는 법도 가르쳐 준다. 진정한 삶은 뜻을 이루어 완성하는데 있지 않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끝는 미완성의 길에 서는 것. 끝 없이 준비하는 과정 그 자체이던가.
암초에 부딪히며 흰 거품을 토하고는 다시 밀려갔다가 되돌아 오는 파도처럼 바다는 나를 그렇게 살라고 한다. 바다는 생명의 신비를 일깨우게 해주고 넉넉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대 자연의 어머니이다.
고흐의 집에서 1998
오베르 쉬르 우와즈에 도착했다. 역 앞의 고흐의 공원 구청 앞에 고흐 그림 포스터가 보인다. 마을 전체가 이곳에서 마지막 불꽃처럼 타 버린 화가의 숨결로 가득한 것 같았다.
차가 지나가면 꽉 차 버릴 것 같은 골목길의 양쪽으로 들어서 있는 시골집들의 아담한 정원들이 아름답다. 거기서 돌계단을 따라 걸어 올라가면 오베르 교회의 종탑의 시계가 보인다. 고흐의 그림 속의 교회가 실제로 시야에 확장되어 온다. 아치형 창과 돌 벽담들, 이끼 낀 지붕의 타일들,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묵묵히 서 있다. 증명사진처럼 고흐의 그림이 붙어 있다.
일본 영화 ‘드림’에서처럼 100년 전 그 시절 ‘까마귀가 나는 밀 밭’ 사이 속으로 나는 들어간다.
아침 햇살과 언덕길 길가에 핀 가을 꽃들 코스모스가 흔들거린다. 조용한 농가의 아침이다. 비탈길을 올라서니 그림처럼 끝 없이 펼쳐진 밀밭이 보인다. 까마귀는 상상에서 푸드득 소리를 내며 나와 끼르륵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듯 하늘에서 날갯짓을 한다.
검은색 죽음의 예감, 까마귀 떼들이 환영 속에서 푸드덕 댄다. 길가에 떨어진 깃털과 돌을 주웠다. 깊은 숨과 밀밭을 가슴속 깊이 들이마셔 폐부 속에 담았다.
자연에는 폭풍우의 드라마가 있고 인생에는 고통의 드라마가 있다던 고흐는 37세에 권총 자살을 한 주의 이틀 동안 그 고통 속에서 마지막 이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묘지로 향하는 길에서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800여 통의 편지 중 이 구절들이 내 귓가를 울리고 있다.
화가는 비록 죽어서 땅에 묻힐지라도 작품을 통해서 후에 오는 여러 세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위대한 화가는 광인일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무한한 믿음과 찬사를 보내는 사람도 광인이다.
도시와 마을을 상징하는 지도의 점은 나를 꿈꾸게 한다. 기차를 타고 가듯 별들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고흐의 죽음 후 그 상실감에 곧이어 따라 죽은 테오의 무덤이 고흐 옆에 나란히 누워있다. 그들은 지하 속에서도 편지로 나누지 못한 사연들을 나누고 있으리라.
10년 동안 그린 876점, 정규 미술 학교 수업을 받지 않고 뒤 늦게 독학으로 그려낸 그림들, 선천적 뇌 장애를 갖고 요양 생활 중 신경증 발작증세를 일으키면서 화폭 속에 그 모든 것을 발산하여 토해낸 그 빛은 영혼의 울림으로 발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목사의 아버지 밑에서 신학대학에 떨어지고 광부 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며 그린 그림 중 <감자 먹는 사람들>은 밀레의 영향을 받아 농민을 주제로 하여 그린 하층민의 비애 서린 어두운 그림들 중 하나였다. 판화 복제와 해부학 원근법을 책을 사서 공부하다 테오가 있는 파리로 가서 인상파 물결에 따라 밝은 색채의 화풍 세라의 정묘법과 일본 판화에 강한 인상을 받고 색의 분해를 터득했다.
그 모든 것을 색감으로 보고, 자연과의 교감을 위해 산책을 하며 하늘의 움직임, 나뭇가지의 흔들림 등을 관찰하며 느꼈던 환청과 환각 증세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붓과의 씨름이었다.
<자화상 시리즈>, <해바라기 시리즈>, <밤의 카페 테라스>, <붓꽃> 등의 인물화와 풍경화에서 그 고통의 잔해들을 지친 붓 자국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생활고에 힘겨운 작업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그림을 팔아야 하고, 잘 팔리게 되도록 더 나은 그림을 그려야 했지만, 열악한 상황을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들, 파리의 분위기와 심리적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그는 튜브 물감을 먹고, 파라핀 기름을 들이킨다. 절망, 우울, 무기력, 그 모든 것을 함께 작업을 위해 파리를 떠났다.
로트렉과는 서신을 교환하였으며, 고갱과의 생활에서 성격 차이로 격분하여 귀를 자르고 마는 싸움 끝에 헤어지게 된다. 커크 더글라스가 고흐로 나온 영화에서 자화상처럼 흡사한 불타는 두 눈과 수염, 후질구레한 옷차림, 첫 구혼에 실연 당하고 광분하던 모습, 붕대 감은 얼굴들의 영상들이 비탈길을 내려오면서 내내 시야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삶의 아이러니 이다. 살아 생전 그림 한 점 팔리지 않던 것이 100년 후 지금 경매장에서 기하학적 숫자로 팔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요양원 생활,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그림만이 일상의 전부였던 작가의 고통의 무게가 사후의 인정과 물질로 환원이 되는 것인가, 신의 도전의 산물인가?
3층 좁은 지붕 밑 다락방에 왔다. 침대, 책상, 의자만이 있다. 마지막 숨을 거둔 곳, 죽음을 지켜본 의사 가셰 박사는 말했다. “그는 결코 죽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이 창조해낸 위대한 아름다움은 영원하다. 그는 예술을 향한 사랑 앞에 순교한 것이다.”
고흐의 주머니에서 나온 부치지 못한 마지막 편지에는 “내 작품들, 난 거기에 내 인생을 걸었지. 그러다가 거의 다 결단이 났어. 테오, 난 지금 죽었으면 좋겠구나…… . 그림으로써 밖에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라고 쓰여 있었다.
한 영혼의 소진, 타버린 불꽃, 빈곤과 고독, 고뇌의 생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이다. 유작 전시 이후 인정을 받아 20세기 초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남아 기록되고,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밖에, 아무 말도 할 수 가 없었다.
나는 다락방에서 내려와 선물 가게에서 고흐 전 노란색의 해바라기 그림 브로치를 사서 가슴에 달고 고인에게 안녕을 고했다.
중국 기행문 1998
서울에서 2시간 거리 중국의 수도 북경의 공항은 새 첨단의 국제 공항이었다. 군복을 입은 젊은 공안원 의 무표정이 대리석의 바닥의 차리움 과 대조가 되어 보인다. 공항에서 만난 가이드는 군용 밴 을 대기 시키고 조선족 3세 이기에 이북 사투리가 섞인 억양으로 반갑게 맞아준다. 천년 의 도읍지 북경. 근대적 건물과 옛 것이 공존하는 시가지에 무더운 7월의 40’C 가 넘는 폭염이 거리에 배어있다. 소호의 차이나 타운 분위기에 익숙해서 인지 악취와 지저분함, 웃통을 벗은 남자가 부채질하며 걸어 다닌다. 시가지의 고층빌딩과 달리 옷가지가 널린 서민 아파트들이 보인다. 천안 공원 명, 청 황제들이 오곡풍년 제사를 지내던 곳, 지대한 규모가 압도적이다. 지방 상경인 들의 깃발 부대의 노란색 타이와 빨강 머플러가 사회주의의 유니폼 같다. 에코의 소리가 울린다는 회음벽 에 귀를 대고 있는 이들, 외국인 관광객 보다는 내국인들의 물결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검은 머리가 일색이지만 (한족, 조선족, 몽고족, 티벳트족) 동양인 인종시장을 방불케 한다. 경산공원 큰 부처 마이다라불 앞에 큰절을 합장하는 이들 향은 불조심 때문에 키지 않는다고 한다. 멋을 한껏 부린 처녀들이 두 손 모아 소원성취 기도를 한다. 그런 뒤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는다. 등뒤로 땀줄기가 흐른다. 바람 한 점 없는 뙤약볕에서 황제들도 자기보다 높이 있는 하늘과 소통하기 위해서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유년시절 사직공원에서 기우제를 한다기에 놀러 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비는 만물을 소생케 하는 대 자연의 신비, 생명의 물인 것이다. 동양철학에서 음양론의 이치, 하늘은 남자고 땅은 여자이며, 빛과 소리, 그 진동 뒤에 적시는 창조의 물을 생각해 보았다.
저녁시간 티베트족 고유 전통의 춤과 남방 분위기의 식당에서 북경요리를 먹고 나서 서커스 구경을 하였다. 단원들은 어린 나이에 오로지 연습만을 위하여 지냈듯이 단련된 기교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서 애처롭게 다가온다. 몸의 유연성을 위하여 매일 한 컵씩 식초를 마신다고 하니 화려한 복장과 화장이 땀이 안쓰럽게 보인다. 공산국가에서 조기교육과 스파르타 식 예체능의 훈련이 과연 장기적 교육의 효율성이 있으며 진정 자신들이 좋아서 하는 열정 속 에서 창조의 미가 주어질 것이다.
아침 출근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짧은 치마와 선글라스를 끼고 자신 있게 달리는 여자들을 보니 그들의 인력이 사회에 얼마나 많이 기여하는가를 볼 수가 있다. 중년 여성들도 일터로 향하고 있다. 전족을 하였다던 그 풍습은 사라져 버린 중국여성의 모습이며 활기차며 거세 보이기만 하다. 직장에 돌아와서 남편은 요리를 하며 부인들은 마작을 하며 지낸다고 하지만 아들선호 사상으로 호적에도 못 오르는 딸들은 농촌에서 도시로 상경하여 불법적인 행위로 호적을 만들기도 한다는 소리에 1억이 넘는 인구, 중국의 국가 정책에 1명만 낳아서 잘 키우라는 운동을 이해해 본다. 만만디 성경으로 대륙기질, 느긋하고 여유가 있어 차 사고율이 적다고 하는데 교통량의 붐비는 속에서도 무질서 속에 질서적인 자전거 행렬이 한가로워 보인다. 신형 벤츠 차가 미끄러지듯 지나가고 그 뒤로 외국차들도 보인다. 중국경제가 지금 포만 경제로 가득하고 언론의 자유가 있기에 예전보다 좋지만 탐관오리들의 비리가 있지만 앞으로 더 잘살게 되리라는 가이드의 열띤 소리가 아침 출근 거리에서 사회경제의 한 단면도를 보는 것 같다. 중국 여자들이 키도 크며 날씬한 이유는 기름기 음식을 먹지만 쟈스민 차를 마시고 자전거로 운동을 하기에 의자 생활이 몸에 배여서 나이든 노인들도 허리를 펴고 다니는 이들이 눈에 띄게 보인다. 현대사의 아버지 손문의 처, 송 경령과 요룽개의 부인, 하향음 여성 해방사상가로 노동자 교육 여성 지도자 양성을 한 그녀들은 주은래는 국가의 진귀한 보물, 중국 민족을 위해 모범을 수립한 여성이라고 극찬을 했다. 당원으로써 인력을 쓰기 위해 평등의 자격을 주어서 여성의 지위가 높아 진 것일까? 자전거를 타고 가는 여인들이 이렇게 오래 마음의 잔상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진정한 자유는 경제적 자립 속에서만이 남녀의 동등권이 부여된다는 원칙을 그녀들은 터득한 것 같다.
천안문 광장 뉴스와 신문에서만 보던 모택동의 큰 인물화가 걸려있다. 백만이 모인다는 광장, 천안문 사태 학생과 시민의 데모 중심지 건너편 현대식 빌딩 호텔과 인민 대회당이 보이고 군인들이 행진을 한다. 사진 촬영을 금지하기에 모두들 서서 구경을 한다. 황사 현상의 날씨와 무더위가 아침부터 느껴진다. 인파속을 헤치며 황금 빛의 지붕, 자금성으로 들어가니 역사의 무게가 눌러온다. 지대하고 웅장한 중국성에 그 옛날 우리 조상 사대부 사신들이 황제에게 인사하려 왔을 때 기분을 느껴본다. 사대주의는 외교정책으로 속국이 되지 않고 조선으로 남은 우리 한국민의 슬기가 가슴 저리게 여며온다.
화려한 중국 도자기 무늬처럼 장식된 도안들 장식품. 마지막 황제 영화 장면이 기억이 난다. 선이 곧은 타일 지붕 기와의 비취색 빛이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시다. 버선코처럼 휘어진 한국기와 진회색 깊은 멋을 떠오르며 경복궁의 아담함의 정취가 영상처럼 스치며, 황제가 있는 지붕에는 9개의 동물 앞에 사람이 선두에 있다. 9자는 복이 온다는 숫자라고 한다. 3천 궁녀 아닌 8천 궁녀가 살만한 장소다. 황제는 사라져도 성만이 남아서 역사의 흔적을 보여준다. 여름의 별궁, 이화원 에서 서태후의 권력을 보는 듯 했다. 인공호수 곤명호, 집채만한 배가 관광객을 싣고 가고 있다. 호수를 만들기 위해 퍼낸 흙으로 인공산 만수산이 되었다고 한다. 대리석 기단의 정자, 문과 창문이 청동으로 되었으며 728M 장도 복도에 삼국지, 손오공 그림들이 섬세한 화풍으로 그려져 있다. 걸어도 걸어도 보고 또 봐도 연결되어버리는 그림들, 무수한 이야기가 들려 오는듯 하다. 예술성 보다는 민화처럼 친근하게 중국의 역사를 한눈에 들어와서 글 보다는 그림의 무한성 의미, 유니버셜 랭귀지인 것이다.
연못에 피어난 꽃분홍 연꽃이 한 여름에 자태를 뽐내고 있다. 진흙 속 에서 뿌리를 내려 피어나는 영롱한 연꽃, 불화에서 늘 보던 그 꽃 이다. 연꽃에 유난히 애착이 가는 이유는 내 이름이 자가 있기에 정이 가며 불교를 공부하게 된 인연도 연꽃위에 앉은 부처상의 의미를 알고 싶었고 끊임없는 자아추구를 하게 된 동기 이기도 하다. 세상이 혼탁해도 연꽃처럼 피어나라는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나는 사랑한다.
만리장성으로 향하는 길가에 복숭아 나무 과수원이 펼쳐져 있다. 농부들이 길가에 나와 파는 것을 10원주고 사니 한 봉지 가득 이다. 맛도 기막히게 좋은 천도화이다. 중국화 미인도의 뺨 같은, 르노와르의 여체 복숭아 빛 살결 같이 고운 껍질을 누르면 벗겨져서 단물이 흐른다. 한입을 베어 먹으니 입안에 단맛이 그윽하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 진의 시황제가 연결을 시작하여 명대에 만들어 졌다는 만리장성을 케이블카를 타면서 아래를 내려다 보니 눈을 감고 말았다. 혹시나 아찔한 생각에 그리고 성루만 쳐다 보았다. 산 마루를 따라 전개되는 역사의 유적지, 이 긴 성벽의 연결을 만든 이들은 저 흙 벽 속의 땀방울로 남아서 사라졌던가…병사들은 성벽에 기대어 무엇을 기다렸을까? 오랑캐 적군의 무리들은 이 끝없이 긴 성을 쳐다보며 무슨 상념에 젖었을까 싶다. 시원한 바람 줄기가 불어온다. 일행들과 한낮의 더위를 끌려가며 오른 성 위 에서 다시 내려갈 길들을 내려다 보며, 쉬어갈 자리를 찾아 앉으며 차가운 음료수를 마시러 갔다. 세계 어디를 가도 있는 콜라를 마셔다.
명십왕릉 13명의 황제가 묻힌 무덤은 거목들이 울창하여 그 뿌리들이 땅 위에 용트림하게 뻗어나 있다. 상상의 동물 말, 기린, 코끼리, 낙타, 해태 등의 석상들이 사후세계 신하들처럼 늘어서 있다. 지하궁전의 출구는 서늘하고 늘 황후용 의자가 놓여있다. 중앙석대 앞에 지폐들이 사방에 흩어져있다. 중국인들이 제사 때 돈을 태운다는 그 풍습을 보며 사라져간 이들의 넋 앞에서 그 누구의 기원을 하였을까? 어디를 가나 인해전술 중공군 대열처럼 내국인 행렬로 붐빈다. 지친 몸을 차에 싣고 이제는 대 자연의 품으로 갔다. 용정협 호수는 신선들이 풍류를 즐긴 것 같이 옛 모습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배를 타고 돌면서 화폭 속으로 들어가며 붓을 날려 가듯 그린 그 선들의 나열처럼 서있는 돌들이 절묘한 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 그저 말없이 대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 하나가 되어본다.
아침에 모여 무술 기공을 하던 이들이 오후에는 남녀노소들이 꽹가리 장단에 맞추어서 부채를 들고 전통춤을 추고 있다. 선두에선 노인들을 따라 실타래처럼 연결되어 움직인다. 젖을 물리면서 쳐다보는 젊은 아낙네의 모습이 사라져 가는 모성애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춤을 추던 이들을 찍으면서 훔쳐보듯 본 모습을 사진에 담아 두었다. 관광코스를 끝내고 자유시간이 주어져도 정엄한 분위기와 말이 통하지 않으니 불안도 하지만 서민들이 사는 모습과 부딪치고 싶어서 북경의 번화가 왕부정을 가기 위해 택시가 호텔 앞에 있기에 가이드에게 물어서 가기로 했다. 밤거리에 데이트하는 젊은이들 시원한 바람이 불고 파라솔 의자 아래서 이야기 소리가 흩어져 들려온다. 백화점 주위에 유명상품 선전 사진들이 서구화 물결처럼 즐비해 있다. 관광부 토산품 가게의 일률적인 상품들, 붓, 차, 도자기, 칠보공예, 비취, 한약, 중국옷, 동양화 그림들. 어디를 가나 같은 것이 사회주의의 체제하 에서 운영되는 국영관리이기에 특색이 없으나, 이곳에 오니 개인상점들이 있어서 다채롭다. 중국 전통 과자들이 즐비해 있는 곳에 월병과와 과일 말린 것, 약과들의 크기가 다양하며 맛도 일품이다. 사탕종류도 여러 가지로 장식되어 있어서 아이들 생각에 사며 어디를 여행해도 식품정의 살아있는 생기와 그 곳의 주민들의 일상적인 삶을 대하게 되어서 좋아한다. 차 종류의 다양함은 알고 있어도 본토의 가게여서 그런지 더욱 많다. 국화를 말려 만든 국화차를 샀다. 뜨거운 물을 부으면 말린 꽃이 살아나듯 피어나는 모습과 향을 다가오는 가을날 마시고 싶었다. 검정 실크에 병풍의 수처럼 놓인 옷을 샀다. 화려한 꽃 수와 나비들이 어울려 섬세한 수가 너무 곱
다. 입기보다는 걸어 두어서 수를 감상 하고, 문양들의 의미를 알고 싶다. 전통옷들은 유행을 타지 않고 그 나라를 기억하기에 장만하여서 둔다. 뉴욕에서는 어느 모임이나 다민족 문화가 있기에 장소에 따라 어느 파티복보다 다양한 연출이 되기에 잘 입는다. 몸매가 들어나는 차이나 컬러와 옆이 트인 원피스와 실크자켓은 패션잡지나 영화에서 인상깊게 늘 보았기에 서양인들도 즐겨 입는다. 한복과 기모노도 그 뒤를 이어 각국 디자이너들이 각기 고유선과 스타일로 만들어 패션쇼도 하고 있지만 차이나 복처럼 스타들이 선호하기에는 더 시일이 걸리는 듯싶다. 보석가게에도 비취의 다양함과 디자인의 섬세함이 있다. 중국여인들 몸에는 금이나 비취용 액세서리가 늘 하고 다니기에 한눈에 중국인임을 알 수가 있었다. 그들의 문화상품으로 온 세계에 퍼져가는 기공술 단전호흡은 맨하탄 거리에 의자를 펴놓고 맛사지를 해주는 모습이 어디서나 볼수있따. 한방약 동양의 신비 침술도 의약계에서 인정받고 있으니 전통을 상품화 시키며 영화도 세계시장을 파고 들고 있다. 노자, 장자, 공자의 동양철학들이 21C 첨단 문명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열기를 더해가는 요즘 중국인들의 그 자신감은 대국의 기질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조상들의 선물인 것 같다. 세계 어디를 가나 참새와 중국식당은 있다고 하니 가이드는 일본인에게 일본말을 하면 절대로 D.C 가 안되니 사용하지 말라고 안다. 어디를 가나 정찰가격을 믿을수 없으니 불편함 정도는 있지만 깎아주는 인정을 중국의 상술로 보고싶다. 일본인을 증오하는 항일정신은 역사가 말해주듯 남아있지만 요즘 조선족들이 한국에서 받은 설움을 본토에 있는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에게 갚는다고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은 조심성 있게 염려를 하는 것이다. 급하게 빨리 확장하다가 문닫고 나오면 손해보는 것은 지름길인 것이다. 붉은 빛 글자들이 불빛에서 복자를 뿜고 있다. 복을 기원하는 그들은 목욕마저 지난 복이 나가기에 자주하지 않는 것은 지형적으로 물이 부족해서 나온 습관이 아닌가도 싶다. 인력거를 타기 위해서 관장으로 가니 고풍스럽게 벨벳으로 의자를 만든 것을 골랐다. 시내 한 바퀴 돌며 야경을 구경하는데 운치가 있다. 멀리서 보이는 주마들 처럼 보이는 붉은 등이 뒷 골목가를 밝혀주고 한산해 지는 거리 인파들이 사라져 가고 밤이 깊어감을 보고 있다. 격변하는 현대의 중국은 지금 깨어나고 있다. 밀수, 도박, 매춘, 마약의 문제도 안고 있지만 만단디 정신으로 서서히 움직이고 뻗어나가는 중이다. 북한도 사회적, 정치적 체제를 중국처럼 되어가듯이 다가오는 문제점을 문호 개방으로 열어가며 받아들이면서 세계화 대열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동양의 정신적 뿌리, 역사의 현장을 보고나니 그들의 저력에 맞서서 대응 하여할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뉴욕에 돌아가면 차이나 타운가면 북경식의 요리와 억양을 듣고 싶다. 아이들에게 한자의 중요성을 알리면 더 가르치며 중국의 역사, 당, 송, 원, 명, 청 나라의 역사를 알며 노자 책을 끝내며 중용을 다시 읽으며 중국화를 더 보고싶다. 대중 예술 영화, 음악을 찾으며, 숙제만을 머리 속에 잔뜩 담고 돌아오는 여행이었지만 그 속에서 지난날 한국과의 관계와 앞으로 미래가 보일 것 같다.
바닷가에서
끝없는 망망대해를 바라본다. 어디서부터 시작 되어진 것일까? 지구가 우주에서 생겨났을 때부터 물이 있기에 생명체가 존재하고 지구의 반이 넘게 바다인 것이다. 아득히 먼 지평선 위에 흰구름이 두둥실 걸려있다. 머나먼 미지의 대륙을 향하여 인간들은 모험의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파도가 출렁거린다. 한시도 바다는 고요하지가 않다. 밀물과 썰물이 일고 있다. 넓고도 넓은 끝없이 푸른 바다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파도의 높낮이를 주어주고, 펼쳐진 모래사장에 은빛의 모래가 밀려가는 물살에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조개들이 씻기어져서 줄을 그러 세월을 새기고 날카로운 면은 다듬고 씻기어서 부드러운 선을 만든다. 수많은 시간은 끊임없이 밀려오는 바람과 물살이 한 면을 이루어 형태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들의 모습이 그 속에서 보여진다. 자연 속에서 깨달음이 주어진다. 조개의 빗살무늬에서 인생의 연륜 나이테를 보았다.
두 딸아이는 파도놀이와 조개, 돌을 줍는다. 모래 위에 주운 것을 모아둔다. 물결처럼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며 바다와 동화되어 논다. 나는 백사장에 앉아서 심연의 깊은 바다처럼 내 마음은 바다와 하나가 되어서 관조를 한다.
아이들은 뛰어놀고 나는 않아서 마음으로 바다를 가슴속 깊이 담아두려고 한다. 부드러운 감촉이다. 씻기고 씻기어서 다듬어진 환전한 조각품이 손 안에 쥐어진다. 되돌아가는 파도 줄기가 다시 돌아와 부딪힌다. 부숴지는 흰 물살이 거품을 내며 암초에 부딪히며 소리를 낸다. 하염없이 바라보아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번뇌처럼 이어지는 물살들의 선들이 고운 레이스처럼 수를 자아낸다.
바닷물이 증발하여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서 강에서 바다로 흘러 흘러서 어디로 가는 것 일까? 둥근 지구를 돌고 돌아서 다시 한순간이 지점에 있다가 다시 또 흘러갈 것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아도, 아니 내가 물이 되어서 그 속에 합류되어 지는 날도 머지 않아 올 것이다…
푸른 바다는 손 안에 담으면 그 빛깔이 사라진다. 바닷물은 왜 그다지도 짤까? 과학으로 배우는 정답보다 자연이 주는 뜻을, 이치를 깨닫고 싶다. 바다를 한없이 바라보며 끝도 시작도 없는 수많은 생각을 하여 본다.
갈매기가 끼룩끼룩 울며 날다가 바다속에 부리를 넣었다가 V자를 그으며 창공을 날아간다. 노부부가 손자를 데리고 모래사장을 거닐다가 손자가 앞에 무언가를 집으면 가만히 서서 바라보며 기다려 주고 다시 걸어가면 뒷전에서 걸어간다. 재촉하지 않는 모습이 삶의 지혜와 여유로움을 보며 한 걸음 물러서서 아이들을 볼수 있는 눈을 갖고 싶다.
오후가 되면서 하늘은 먹구름으로 엎혀 지며 해가 지고 어스름한 저녁바다 모래사장에는 아무도 없다. 발코니에서 밤바다를 바라본다. 그 푸르던 바다와 하늘이 암흑으로 한 면이 적막의 바다 위에 비를 뿌린다. 맞닿아 버린 수면을 보며 둥근 원을 한 지구를 그리며 보이지 않는 별을 찾는다. 파도는 하얀 물거품을 투하며 어둠속에서 한줄기의 선으로 이어진다. 광활한 바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모습 속에서 수억 년 내려오는 저 소리의 의미, 우주의 신비가 그 속에 담겨져 있다.
이른 새벽 바다가 보고 싶었다. 3시에 일어나 바다를 바라보니 하늘 위편에 붉은 기운이 감돌고 있다. 해를 안고 대지를 서서히 깨어나며 어둠이 걷혀지려고 한다. 바람이 감미롭다. 새 날을 맞이 하는 태동의 느낌이 감싸온다. 시간이 오는 건지, 가는 건지 멈춤은 아닌 것 같다. 새벽 하늘과 수면은 이등분 되어지려고 한다.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보여진다. 쏴아……. 쏴…. 철썩…. 처얼썩..
큰 물결이 파선되어 부숴지고 일듯이 생의 의미를 바다와 같이 생각하고 복잡한 세상사 그 속의 모든 번민을 저 바다 속에 나는 던져 버렸다.
호숫가의 풍경 1998
파란 하늘 위에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흰 줄이 나 있다.
구름 위를 스쳐간 자리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 그 아래 수면 위로 비치는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파문에 일렁이고 있다.
그 위에서 오리들이 노닐고 있다.
한 무리들이 줄지어 간다.
가족 나들이. 선두에 선 오리는 세차게 두 줄의 물줄기를 그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그 뒤를 두 마리가 장난을 치듯 부리를 물 속에 담그고 튕기면서 날개 짓을 파드락 푸드덕… 거리면서 두 물줄기 사이를 헤집고 간다.
두 오리가 지나간 물 위에 선들이 사라질 무렵 갓 태어난 듯 여린 새 털을 나부끼며 물장구 치듯, 힘겹게 아기 오리가 길을 잃은 듯 조심스레 가고 있는데, 저만치 뒷전에서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햇살 아래서 깃털의 우아함을 내뿜으며 가족들의 한가로운 나들이를 만끽하며 보살피듯이 가고 있다. 앞장선 이들의 안전을 위하여 맨 뒤에서 지켜보며, 모두들 무사히 풀밭 위로 올라섰다. 아기 오리 주위로 가족들이 빙빙 돌면서 다가서서 모여든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자연 속에 동물세계에서 배워야 할 생존방식을 한 단면으로 보여준다. 집 근처 호숫가는 계절의 풍경을 담고 있다. 오리 가족의 위계질서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며 각자의 위치 역할을 되새기며, 언젠가는 해체되어 홀로서기를 할 때까지 뒷전에서 지켜주며 보살피는 어미 오리의 지혜를 배웠다.
수면 위에 새털갈이로 떠 있는 깃털과 풀밭에 기다란 깃털을 주어 모았다. 섬세하며 부드러운 털의 감촉을 느끼며 흩어 보았다. 일제히 빗살처럼 펴진다.
깃털의 상징은 고대에서 인디언, 아프리카 추장, 중세궁중의 장식품으로 가벼움, 속도감, 다른 세계로 날수 있는 능력으로 위대한 영적의 힘을 준다고 믿었다. 올해에도 디자이너들이 깃털의 화려함을 패션에 응용하고 세기가 흘러도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깃털로 표현할 것이다.
무성한 수풀 속 그늘 아래 새들의 지저귐과 고목을 타고 올라가는 포도 넝쿨을 바라보며 무상으로 주어지는 이 대지의 풍요로움에 감사함을 드리고 사계절의 색상을 담고 있는 호숫가이다.
초록= 한 여름이 녹아가고
주황= 불타는 가을이 다가오는 길목에서
하양= 정적인 겨울을 맞이하여 다시
노랑= 새순의 봄을 피우며
파랑= 하늘은 늘 위에 떠 있으며
이 숲 속 호숫가는 사색의 인생 대 경전인 것이다.
마음을 열어 영안의 눈을 떠서 삼라만상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이 벤치를 어느 가을날에 다시 오리라.
생활 단상 – 모네의 정원 1998
부슬부슬 비 내리는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 벤치에 앉아서 연못을 바라본다.
푹 눌러쓴 밀짚모자, 덥수룩한 하얀 수염, 작업복 차림의 정원사 모네가 숲 속 사이로 걸어 나오는 듯 하다.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한 세기 그 시대 모습을 그대로 담은 채 재현된 연못 속의 수련과 꽃들, 그 모든 것이 이 자리에 있다. 2년 전, 보스톤에서 열린 인상파 거장 모네 특별전에 걸렸던 그의 ‘수련(睡蓮) 연작’ 80여 점을 보고 나서 느꼈던 그 감동이 다시 살아난다.
대가가 많은 시간을 보낸 작업의 현장이자 영감의 원천지인 깊은 심연 속에서 솟아나는 비밀스런 교감이 교차되는 듯 하다. 오랜 세월 속에서 연마된 색채의 기법은 성숙 과정에 이르러, 예술혼의 혜안을 갖게 한 그 연못은 모네가 직접 손수 땅을 파서 만들었다고 한다.
50세에 이사를 와서 86세까지 살았던 이곳,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으면서 그려낸 수련의 연작 시리즈. 물의 흐름 속에서 피어난 꽃들의 음영, 흔들림, 빛의 떨림 등이 그의 독창적인 붓 처리로 다시 태어나 색조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의 사물을 보는 시각은 남달랐다. 그는 자연 대상물에 모든 정신을 몰입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에 따라 사물의 느낌이 달라지는 순간을 포착 했었다. 그는 순간순간의 느낌을 재빠른 붓 놀림으로 담아 나갔다. 그의 삶은 마치 붓으로 도를 닦는 구도자의 일생이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모네의 다양한 색채 감각은 그림 그리는 것 이외에 유일한 취미인 원예 책 읽기와 정원 가꾸기 등에서도 느낄 수 있다. 자연의 본질과 인간 내면의 통찰, 우주가 보여주는 것을 붓으로 증명하고자 한 그의 작업과 창작의 비밀이 정원에서 실마리를 찾을 것 같다.
모네의 예술관은 독특하다. 그는 평소에 이렇게 말했다. “쓸 것 보다 그릴게 더 많은 것이 화가다. 붓으로 말을 한다. 그림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내 그림은 대중의 것이다.”
그는 특히 정원을 직접 가꾸면서 정원의 연꽃과 풀, 연못에 비친 녹음 등에 집중하며 자연 속에서 철학을 찾은 것이다. 노적가리, 포플러, 루앙 대성당, 수련 등의 연작 시리즈 등에서 볼 수 있듯, 한 대상을 연작기법으로 빛의 끊임없는 변화에 따라 동일한 사물의 풍경이 달라지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끝없이 노력한 흔적들이 바로 그를 인상파의 거장으로 만들었다.
구름의 끝없는 움직임, 바다의 거친 파도, 꽃의 다양함을 담고자 매 순간 같은 장소에서 그리며 꿈 속에서까지 전날 놓쳤던 새로운 형상이 무의식 속에 떠올랐다는 작업의식은 도를 향한 수도자의 고행 길과 같았으리라.
비는 계속 내리고 잿빛 하늘 아래 이름 모를 꽃들이 형형색색의 모습으로 비에 젖어 함초롬히 피어나 있다.
그 당시 판화들 속 가구들의 배치가 화목한 대가족의 집안 분위기를 잘 살려내고 있다.
인상파 화가들을 초대, 이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낸 부엌의 기구와 그릇들은 부인 알리스의 헌신적인 내조와 따스함이 그대로 배어 나오는 듯 하다.
모네는 여행 스케치를 다니면서도 가족들과 그의 정원에 피어나는 꽃들과 시드는 꽃들을 염려하는 등 꽃에 대한 열정으로 노후의 생활을 평화 속에 보내면서 지베르니의 집을 사랑했던 것이다.
집 옆 선물가게는 그 어느 곳보다 상품들이 다양하게 디자인 되어있다. 리빙아트 생활용품 전부를 모네 그림으로 채워 넣었다. 모네의 작품이 일반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풍경화에서 느낄 수 있는 잔잔한 감동, 색채의 진동이 그대로 눈 속으로 들어와 마음 한 곳에 고향과도 같은 푸근함으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투명한 쪽빛 하늘과 부드러운 바람의 따스함 아래 영롱하게 피어난 꽃들의 하늘거림과 속삭임이 들리는 듯 하다.
자연 현장에서 느낀 것을 표현하기 위한 빠른 붓질의 유연함과 오랜 세월 속에 다듬어진 대가의 경지가 감동으로 스며든다. 대 진리를 깨달았을 때 오는 진정한 자유와 평안함이
그림 속에서 전달된다.
물에 갇힌 도시 1998
차가 없는 곳 수중의 도시 베니스로 왔다. 갯벌 위에 서있는 오래된 집들의 벽에 침수 흔적이 붓 자국처럼 나있다.
북쪽이어서 그런지 봄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망토와 스웨터를 꺼내 입는다. 어디를 가려면 보트를 타야 하는 이곳은 영화에서 봤던 장면들이 현실로 펼쳐지는 곳이다. 그리고 낭만적일 뿐만 아니라 소매치기와 집시로부터도 해방된 여행객에게는 아주 이상적인 곳이다.
나는 이 이상적인 곳에 그곳 주민들과 같이 호흡하며 갇힌 신세가 되었다.
현재와 옛날이 교차하는 미로의 길을 지나서 호텔은 좁은 골목 속에 숨어 있었다. 어디를 가나 다리를건너야 하고 나는 건널 때 마다 운하 옆의 집들이 처연히 물속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모두가 이곳을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정한 이유는 이 자유로운 도시에서 좀 느긋하게 지내고 싶어서였다. 미혼인 두사람들과 그리고 일본인이 함께 한방을 같이 쓴다. 처음 보다는 서로의 행동방식에 익숙해져서 이제는 그다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호흡이 잘 맞는다.
대부분 서로의 관심사에 맞게 관광하다가 식사시간과 취침시간에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철저히나 홀로 여행을 즐기다가 저녁식사 시간에 흥겨운 대화로 서로가 여행하면서 느낀 것 들을 말하면 다음날 스케줄을 의논하곤 한다. 요꼬는 이태리에 흠뻑 빠지고 멋지고 상냥한 이태리 남자에게 매료되었다고 한다. 일본여자 특유의 몸짓과 미국생활에서 얻은 매너를 동시에 갖춘 당돌하면서도 예의가 느껴지는 독특한 매력이 있는 여자이다.
오래된 선술집 같은 식당의 마음씨 좋은 주인 아저씨가 반갑게 우리를 맞아 준다. 퇴근 후 남자들끼리술 한잔 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여기서 술마시며 노래 부르는 이태리 남자들을 보니 삼면이 바다여서 보수적이고 성격이 다혈질인 한국 남자들과 비슷하다는 얘기에 동감이 간다.
갖가지 신선하고 풍부한 해물요리와 샐러드를 종류대로 시키고 백포도주의 달콤함에 베네치아의 첫날밤을 흥겹게 보낸다.
다음날, 베니스의 아침을 맞았다. 보트를 타고 출퇴근하는 이들, 부산한 분위기속에 운하 옆 건물들이아침에서 깨어나고 있다. 산마르코 광장 앞에 비둘기와 관광객들이 몰린다.
마르코 교회 앞 광장, 역시 영화나 엽서따위에서 기억된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베니스의 수호신날개 달린 사자를 보고, 산마르코 사원의 근 천장의 모자이크화를 목이 뻐근하도록 쳐다보았다. 광장주위에 들어선 상가에 토산품들이 쇼윈도를 통해 이쁘게 진열되어 있고 섬세한 무늬의 자수들이 널려있는 러이스 전문점은 유럽인들의 화려한 드레스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깨어물고 싶도록달콤한 색상과 모양의, 작은 유리로 만든 사탕을 선물용으로 샀다. 일일이 종이에 싸서 포장해주는 서비스 정신에 관광국의 국민성을 보는 듯 하다.
색깔 있는 도시 코르소 1998
로마는 잠재 의식 속에 숨겨진 모험심을 끌어내는 매력 있는 도시이다.
유명한 부티크들이 죽 늘어서 있는 코르소 거리에는 디자이너들의 봄 상품들이 유리창을 통해 공연을하는 듯 하다.
파스텔 색조의 은은한 회색과 분홍의 화사함이 온 거리 가득하며 한껏 봄을 느끼게 한다.
집시들이 아이를 안고 어수룩한 관광객들을 물색하듯 두 눈을 반짝이며 무리를 지어 다닌다.
관광객 한 명이 집시- 하며 소리치자 인파들이 일제히 각자의 소지품을 점검하며 바라본다.
재빠르게 길 모퉁이로 사라지는 집시. 그리고 그 뒤를 쫓아 어린 아이 하나가 허둥대며 뛰어간다.
가장 화려한 허영의 욕구가 빚어놓은 패션과 어두운 가난함이 함께 공존하며 보색 대비되어 우리 앞에펼쳐진다. 햇살이 지려고 한다. 다시 길을 떠나자.
나는 머물 수 없는 안락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트리타나 디몬디 교회로 향한다. 수 많은 계단을 오르니 고대 로마 미술의 전형적인 색조(폼페이의 붉은색)의 화려한 저택이 눈 앞에 떡 하니 서 있다. 그광경이 석양과 어우러져 나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전율을 느끼게 한다.
땡그렁 땡-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말들이 달렸던 거리의 돌 바닥 위에 화구들이 널부러져 있다. 이제거리의 초상화가가 그 화구를 챙기며 길 떠날 채비를 한다. 초상 화가의 쓸쓸한 뒷모습 속에 왠지 모를생활의 슬픔이 배어있다.
나보나 광장의 분수대는 밤에 더 운치를 더하며 물을 뿜는다.
1934년 시작한 레스토랑에서 마신 와인은 이태리 정통 음식들과 잘 어우러져
의 미각을 돋우며 여정을 더해준다.
어느덧 하늘은 어둠으로 깔렸다. 모든 사람들마다 삶의 흔적이 있듯 로마도 그 나름대로의 전쟁 속에서빚어진 훈장을 갖고 있다.
이런 로마를 보며 느끼는 것이 있다. 우리 모두가 하나쯤 가지고 있는 상처를 우려 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 모든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그것을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수있는 여유 있는 마음과 상대방을 배려해 주는 넉넉함을 이제는 지니고 싶다.
다양한 민족과 그에 따른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미국에 살면서 좀 더 넓은 시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며, 그것을 인정하며 배우며 즐기는 이민 1세. 그 이민 1세가 다시 2세들에게 그것을 준다면 이민 역사의 어려움을 일깨우며 전한 속에서도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일깨워 문화를 재 창조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꽃, 예술, 고풍의 도시 1998
꽃의 도시 피렌체는 봄의 열기로 그윽하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예술 혼과 라파엘로의 작품을 인정한메디치가의 위력을 풍긴다.
그런 피렌체 거리에 고풍스러운 건물과 아르노강 위를 지르는 산타 토지나타 다리가 서로를 의지한 채역사를 지켜나가고 있다. 이런 조그마한 마을에 관광객들이 항상 붐빈다.
나는 작은 흥분과 함께 산 쵸반니 예배당 옆 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호텔 방의 오래된 벽지와 격자 무늬나무 장식이 된 유리창은 나를 중세 시대로 훌쩍 데리고 간다.
창 밖으로 백색, 분홍색, 짙은 녹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높은 8각형 건물이 보인다. 짐 정리를 하고주위를 둘러보러 나갔다가 호텔을 찾아올 때 의지 삼으면 되겠다.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거리로 나왔다.
시뇨리아 광장 이곳 저곳에 여행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큰 배낭을 베개로 삼고 봄 햇살을 받으며 누워있고, 어떤 이들은 비둘기에게 모이를 준다.
미켈란젤로의 거작 다비드 상이 눈에 들어온다. 남성미, 신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이 이 조각품을통해 온 몸을 휘감아 온다. 사진 찍는 이들이 장난기 있게 손으로 가르키는 곳을 유심히 쳐다보니 모두들 남성의 심벌을 향하고 있다.
최초의 나체상 다비드 상은 그렇게 웅장하게 서 있었다.
약간의 장난끼와 함께 두 딸아이들에게 보여줄 성 교육용으로 나 역시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모처럼 크게 웃었다.
8각형 건물을 등대 삼아 호텔로 와서 점심을 먹고 피렌체 거리의 윗 골목으로 접어든다. 갖가지 모조품과 가죽 제품, 수제품이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이 마치 남대문 시장을 보는 듯하다.
피렌체는 질감이 부드럽고 다양한 디자인의 가죽 제품으로 유명하다. 귀금속 역시 이태리 제를 알아 주듯 뉴욕에서 보지 못한 금 줄의 다양한 세공이 눈에 띤다. 은색 가죽 반 코트와 행운을 준다는 빨간 풍뎅이 귀걸이를 기분 좋게 샀다. 오후에는 시내 관광표를 사서 피렌체 시내를 전체적으로 둘러본다. 피렌체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언덕 위의 조용한 마을에서 르네상스 문화를 만들어낸 예술의 도시 피렌체를 내려다 본다. 눈 앞에 보이는 오래된 건물에서 건축가 부르넬레스키의 영혼의 숨결이 스쳐 지나간다.
또 다시 우피치 미술관, 전원 풍경의 그림 속에서 봄의 요정들이 춤을 춘다.
그 이미지를 기억하기 위해 엽서와 머리핀을 샀다. 그곳에서 기차 역 앞 집시 소녀의 눈물이 고여있는듯한 눈과 마주친다. 잘생긴 청년 한 명이 서성거리며 우리 일행을 쳐다본다. 얼른 감정을 접고 현실로돌아와 내 주위를 챙긴다.
여자만 셋이고 가방이 2개씩 되니 짐을 가지고 움직일 때마다 열심히 안전 점검을 서로 하고 있다.
일본인 요꼬가 문을 사러가고, 한국 학교 동료 친구인 해경씨가 엽서를 사러 갔기에 가방을 실은 카트에 혼자 앉아서 여행 일지를 쓴다.
로마의 봄 향기 1998
3월의 로마는 봄 바람의 감미로움, 진한 역사의 향기와 숨결로 여행객을 취하게 한다.
화사한 벚 꽃이 피어난 길목 길목마다 오늘과 옛날이 한 데 어울려 시공을 초월한 하나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에스프레소 커피 향이 짙게 풍겨 나오는 카페 창가의 섬세한 레이스 커튼 너머로 개나리 꽃이 다소곳이꽂혀있는 화병이 눈가에 머문다. 노상 카페에 앉아서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쉬어가는 나그네가 잠시 되어본다. 무심코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쳐다보는 나의 영혼에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든다.
지난 세월 테베레 강물에 씻겨 모두 사라졌다 해도 이 순간 봄은 너무나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야자수의 잎사귀가 나풀거리고 지나가는 차들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로마 시민들의 이상적인 삶은 즐기는 것이다. 택시 운전사부터 웨이터까지 조각처럼 핸섬한 얼굴로 모두들 여유를 가지고 오페라적 억양의 높낮이로 관광객을 맞이한다.
아테네에서 시작한 그리스 문화가 시간을 뛰어넘어 그 절정의 아름다움을 로마 거리에 남긴 탓일까?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보르게네 공원 잔디밭 사이에 피어난 꽃들을 배경으로 누워 일광욕을 하며 사랑을 나누는 남녀는 자연과 어우러진 원초적인 한 쌍이다. 좁은 길 사이를 누비는 오토바이의 행렬과 원색 장난감 자동차 같은조그만 차들은 유적지를 보존하려는 역사 의식을 지닌 국민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전철역 모자이크로 장식된 벽화와 그 벽화의 어두운 공간의 타일에서 나오는 빛들이 조화를 이루어 지하도의 단조로움을 설치미술이 전시된 공간으로 변신시켜 시각적 즐거움을 안겨준다.
베네치아 궁전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아담의 창조. 조각가이며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가원근법을 이용해 표현한 깊이 있는 공간의 부조적 입체감과 회화적인 음영은 현대인들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극치를 이룬다. 로마적 우주관이 교회 천장에 중세 14세기에 신격화된 영감으로 그려져있는 것이다.
포름(고대 로마시 중앙의 대 광장), 목욕탕 등 일상적인 모습에서도 로마의 향기가 느껴진다. 영화 벤허의 원형 경기장에서는 전차 경주의 흙 먼지와 열광하는 시민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피자리아에서 버섯을 썰어 덮은 피자를 간단하게 먹고 스페인 광장으로 간다. 그 곳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청춘 남녀들은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그대로이다.
로마는 누구나 영상의 한 주인공처럼 만들고, 때로는 우리가 영화 속에 실제 존재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나보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1998
프랑스 파리 샹제리제 거리의 한 벤치에 앉아 흘러간 중세의 시간을 음미해 본다. 개선문에서 콩크르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귀족들이 담소를 나누며 거닐었던 산책로로 연결된다. 화려한 문화와 긴 역사를 간직한 파리. 시간의 숨결이 담겨있는 이 도시를 제대로 느끼려면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 보다 골목 골목을 걸어다니는 것이 좋다. 그래야 이 도시의 진정한 모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대 부호들이 샹제리제 거리를 선호하는 것은 오트쿠트르 패션의 원조를 창조한 디자이너들의 창작품이 비즈니스로 상품화 되어 거리를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액세서리, 스카프, 향수 등으로 유명한 샤넬, 크리스챤 디오르, 루이비통이 대를 이어가고 있다. 패션 학교 ‘에스모드’를 나와서도 능력있는 기업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프랑스의 문화정책 덕택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의 젊은 디자이너들은 역사의 향기를 자신들의 아이디어와 스타일로 재 창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유명 부띠끄마다 전통과 현대식 실내장식이 돋보인다. 신흥 졸부들이 가질 수 없는 역사를 그들은 간직 한 채 우아한 품격을 유지한다. 이곳 매장 직원들의 친절함은 사르르 녹는 봉봉 캔디를 먹는 듯 하다.
화폐를 단일화 한 유러머니가 가게마다 가격표로 붙어있다. 달러와 비슷해 셈하기가 어렵지 않다. 유럽 통합은 로마제국에서 나폴레옹 히틀러에 이어 이제 경제로 연결 되어지는 것 같다.
프랑스 인들은 아시아 국가들의 장래성을 인정하며 문화 발상지에 대한 역사적인 가치를 존중한다. 또 객관적으로 그 나라보다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경제대국 일본 보다 중국, 인도의 보이지 않는 잠재력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가톨릭 다음으로 불교에 관심을 쏟고 있다. 특히 동양 철학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거리 상점에는 동양을 포함, 다국적 문화의 토산품들이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다. 그들은 수입된 다른 문화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다시 창조하는 ‘톨레랑스(관용)’ 정신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일행이 머문 곳은 오페라 하우스 근처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교통이 아주 편리해 같이 간 동료 모두 만족해 했다. 이곳에서 발길 닿는대로 걸어가면 어디를 가더라도 유적지이다. 국립 도서관 근처 고풍스러운 가게들과 방돔광장의 초 현대식 고급 상점이 무척 대조적이었다.
산책 중 자주 들른 팔레 루와왈 정원은 곱게 단장 되어 있었다. 검은 줄 무늬 낮은 원기둥의 돌 벤치는 높낮이가 다르게 설치되어 있었다. 왕궁의 정원이 지금은 시민들의 안식처로 변했다. 시민들이 그냥 바라만 보는 곳에서 생활하는 곳으로 바뀐 것이다.
상점 진열장에 샤넬의 오래된 핸드백과 원피스들이 눈에 띄었다. 중고지만 새 제품과는 다른 깊은 멋이 담겨 있었다. 유행은 돌고 도는 것. 판매 전략으로 선의 변형이 소비자의 구매욕을 불러 일으키고 있지만 파리 사람들은 최신의 유행만 선호하지 않는다. 자신에 맞는 스타일을 스스로 개발, 진정한 멋을 표현한다.
파리에 온 기념으로 미장원에 갔다. 일본 식당 만큼이나 일본인들이 많았다. 미용사는 일본인이었다. 미용사는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섬세하고 친절한 서비스가 마음에 들었다.
그날 저녁 동료들과 몽마르트로 향했다.
귀에 익은 멜로디가 가슴에 스며든다. 우리는 음악이 흘러 나오는 한 카페로 들어갔다. 가난한 화가들과 시인들이 모여서 이렇게 음악을 들으며 밤이 깊도록 인생과 사랑과 예술을 찬미했을 것이다.
피카소와 장콕도가 앉았던 자리에 낙서가 어지럽다. 데르트르 광장에 즐비하게 서 있던 거리의 화가들이 현실의 생활고를 초월해서 자신들의 예술 세계를 인정해주는 이들과 오늘도 이 밤을 지새우고 있을 것이다.
파리 밤 하늘 아래 몽마르트 언덕 비탈길에서 진정한 작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그들과 함께 축배를 들고 싶다.
끝없이 투명한 에머랄드 블루 빛 바다 1998
비행기 창 밖으로 초록의 정글 숲 너머로 바다가 보이며 끝없이 펼쳐진 하얀 모래사장에 투명한 블루 빛 바다가 시야에 들어온다. Cancun 이름 그대로 뱀처럼 긴 섬이 펼쳐진다. 공항에 내리니 멕시코 특유의 체취가 느껴지며 아열대 기후가 후끈 스며든다.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나서 아이들이 타보고 싶어하는 잠수함을 타고 바닷속 물고기 구경을 하였다.
수 십 종류의 물고기가 바다 잔디 사이로 오가며 보라색 부채 모양의 산호초에 나이가 만년 이라고 한다. 뇌 모양의 물결을 따라 흠이 파여진 돌 사이로 큰 거북이가 보이며 바윗돌처럼 큰 가오리가 유리창 사이로 스쳐간다. 야광 노랑색의 물고기 떼가 한 방향으로 따라오며 네온 싸인 불 빛처럼 바다 속은 현란한 색으로 가득하였다. 배를 기다리는 동안 두 딸은 머리를 땋고 구슬장식을 해주는 핀의 색깔을 고르는 동안 남편과 나는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서 백사장을 거닐며 어디서나 들려오는 음악소리 야자수 나무와 붉고 흰 향기 짙은 꽃들이 이국의 정취를 더해주었다. 하얀 고운 모래를 담아오고 나무껍질을 줍고 꽃잎들을 모아 담았다. 늘 나의 머리 속에는 판화에 쓰이는 재료로 모든 것이 보여지는 것이다. 여행은 일상적인 생활의 궤도에서 벗어나 잠재력 속에 잠긴 또 다른 이미지를 갖게 해주기에 감성의 활력소가 재충전 된다. 저녁식사를 망고탱고다이스에서 하며 접시에 꽃으로 장식을 한 생선 요리가 이채로웠다.
쇼 시간이 되면서 분위기는 고조되어 춤추는 무희의 긴 눈썹과 땀방울에 지워지는 화장을 가까이 보았다. 정열적인 고혹적인 혼혈 미인들의 웃음이 비애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날 Chichen itza 사원을 가기로 했다. 길거리의 소형 차 폭스바겐의 원색과 찌그러진 차들 일본제 택시들의 물결이 멕시코의 경제를 나타내주며 느긋한 열대지방 사람들의 낙천적인 모습이 길에 서서 야자수 열매를 먹고 있는 노무자들의 눈에 낯설지 않은 이유는 늘 한국 식당, 가게에서 본 듯한 검정머리에 키 작은 땅딸한 모습이 한국 시골 청년을 보는 듯 친근하다.
기억의 파편들이 유년의 강으로 흘러가듯 60년대의 한국과도 같아서 늘 연결된 듯싶다. 시골장터에 바구니에 들고나온 과일 채소를 파는 노인네들 학교 앞의 노점상들의 쭈그리고 앉은 모습이 정겹다.
곱게 차려 입고 나온 신요리따의 붉은 루즈색깔,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 너머로 대형간판 코카콜라가 뽐내며 걸려있다. 180년 성당건물에 앉아있는 밀짚모자에 샌달을 신은 이들이 한가하게 잡담을 하며 플라스틱 장 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아낙네들 그들의 얼굴은 여유로움과 기계문명에 물들지 않은 인간미가 넘쳐나고 있었다. 너무나 좋은 신이 준 기후의 축복이 어디에서나 주어지는 풍성한 열매들이 그들이 삶을 안이하게 만든 것일까? 화려한 원색의 parrot의 날개와도 같은 파랑, 분홍, 황금색의 집들 강렬한 햇살은 하얀 벽에 피어난 꽃들과 나에게 색대비의 색감을 눈뜨게 해 주었다. Yucatm의 동굴은 천 년 그대로 보존되어 뿌리의 뒤엉킴과 줄기가 실 가닥처럼 늘어져 물 속까지 내려져 있으며 23미터의 높이에서 수심 50미터가 들여다 보인다.
원주민 소년의 다이빙은 날쌘 새와 같이 물속을 날아 들었다. 점심 때 민속춤을 추는 남녀들 통풍 좋은 하얀 옷에 꽃 무늬 수가 같이 따라 움직이듯 보인다. 그 옛날 스페인 지배자처럼 하얀 모자와 콧수염을 기른 하얀 옷을 입은 웨이터의 시중을 받으며 달콤한 망고를 먹었다.
동네 아이들이 들고 나와 파는 목각 조각을 30페소에 샀다. 나중에 선물가게에 가서 보니 싸게 산 것을 알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유적지에 도착하여 마야 문명 3천 년의 비밀을 대하듯 경건해지는 마음이 든다. 자연과 신에 제사를 지내는 1400년 전 석회석 돌로 만든 피라미드들. 어디서 날라온 빨간 잠자리가 우리 주위를 맴돈다. Chac Mool의 조각이 한가롭게 햇살에서 관광객을 쳐다보는 듯 하다. 피라미드 91계단을 오르는데 어디선가 조장들의 축제의 춤과 노래가 허공에서 울리는 듯싶다. 울긋불긋한 제사장들의 모습이 실루엣처럼 보인다.
좀 더 하늘 가까이 신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나에게도 시공을 초월해 다가온 듯 싶었다. 오르고 나니 가파른 계단에 유적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멀리 정글 숲 사이로 제사를 지내려 오는 원주민의 행렬을 이렇게 서서 보았으리라 싶다. 돌아오는 길 시골 농가의 초가집에 실 침대 위에 누운 아이들 자전거 타고 가는 학생들 들판에 하얀 소들과 마당의 돼지와 닭장이 보인다.
바가지에 물 빨래를 하는 여인네들의 가난한 모습이 정겹게 다가온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다음 날도 비가 와서 바닷가 보다는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으로 갔다. 재래시장에 가서 Pinata 별 모양을 사고 종이, 약초, 향, 토산품을 샀다. 가격이 다 달라서 딸들의 스패니시 실력을 발휘하면서 남편과 나는 흐뭇하게 딸들을 앞장 세우고 다녔다.
실버 액세서리에서 마야 고유의 문양 목거리를 사고 글자를 그려 보았다. 늘어난 짐 때문에 플라스틱 체크무늬 장바구니를 사서 담았는데 가볍고 튼튼해서 아이들 것도 골랐다. 택시를 탔는데 앞 좌석에 어린애가 기사의 자녀라고 한다. 부인은 일터로 가고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운전을 하기에 측은한 마음에 팁을 아이들에게 주었다. 재래시장에서 흠뻑 인간미의 체취를 느끼고 한국의 장터가 사라지는 것의 아쉬움을 가져보았다. 좋은 관광객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내일이면 회색의 겨울도시로 돌아가기에 밤 바다를 보기 위해 베란다 창문을 여니 하얀 망사 커튼이 휘날리며 바람이 들어온다. 온 몸을 휘감는 남미의 바람이 내 마음 속까지 스며든다. 바람결에 흔들거리는 야자수 잎들이 사이사이로 바람이 일며 비가 뿌리고 있다.
가족들이 있는데 나는 인간적 고독감이 엄습을 한다. 경비원들이 해안가와 원두막 사이 풀장을 다니고 있고, 어둠깔린 바닷가에 파도 소리와 비 소리가 구성지게 들려온다. 자연의 음악 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어본다. 좀 더 크게, 강하게 연주해 다오, 파도 소리여, 바람이여, 태고의 신비를 노래 해주오. 검은 벨벳의 휘장 같은 밤 하늘이 걷힐 때까지…… 깊은 상념에 빠지며 밤 바다는 자연의 관조 세계를 나에게 불러 주었다.
파란 하늘 위에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흰 줄이 나 있다.
구름 위를 스쳐간 자리가 선명하게 그어져 있다. 그 아래 수면 위로 비치는 나뭇잎들이 흔들리며 파문에 일렁이고 있다.
그 위에서 오리들이 노닐고 있다.
한 무리들이 줄지어 간다.
가족 나들이. 선두에 선 오리는 세차게 두 줄의 물줄기를 그으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그 뒤를 두 마리가 장난을 치듯 부리를 물 속에 담그고 튕기면서 날개 짓을 파드락 푸드덕… 거리면서 두 물줄기 사이를 헤집고 간다.
두 오리가 지나간 물 위에 선들이 사라질 무렵 갓 태어난 듯 여린 새 털을 나부끼며 물장구 치듯, 힘겹게 아기 오리가 길을 잃은 듯 조심스레 가고 있는데, 저만치 뒷전에서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햇살 아래서 깃털의 우아함을 내뿜으며 가족들의 한가로운 나들이를 만끽하며 보살피듯이 가고 있다. 앞장선 이들의 안전을 위하여 맨 뒤에서 지켜보며, 모두들 무사히 풀밭 위로 올라섰다. 아기 오리 주위로 가족들이 빙빙 돌면서 다가서서 모여든다.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자연 속에 동물세계에서 배워야 할 생존방식을 한 단면으로 보여준다. 집 근처 호숫가는 계절의 풍경을 담고 있다. 오리 가족의 위계질서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며 각자의 위치 역할을 되새기며, 언젠가는 해체되어 홀로서기를 할 때까지 뒷전에서 지켜주며 보살피는 어미 오리의 지혜를 배웠다.
수면 위에 새털갈이로 떠 있는 깃털과 풀밭에 기다란 깃털을 주어 모았다. 섬세하며 부드러운 털의 감촉을 느끼며 흩어 보았다. 일제히 빗살처럼 펴진다.
깃털의 상징은 고대에서 인디언, 아프리카 추장, 중세궁중의 장식품으로 가벼움, 속도감, 다른 세계로 날수 있는 능력으로 위대한 영적의 힘을 준다고 믿었다. 올해에도 디자이너들이 깃털의 화려함을 패션에 응용하고 세기가 흘러도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깃털로 표현할 것이다.
무성한 수풀 속 그늘 아래 새들의 지저귐과 고목을 타고 올라가는 포도 넝쿨을 바라보며 무상으로 주어지는 이 대지의 풍요로움에 감사함을 드리고 사계절의 색상을 담고 있는 호숫가이다.
초록= 한 여름이 녹아가고
주황= 불타는 가을이 다가오는 길목에서
하양= 정적인 겨울을 맞이하여 다시
노랑= 새순의 봄을 피우며
파랑= 하늘은 늘 위에 떠 있으며
이 숲 속 호숫가는 사색의 인생 대 경전인 것이다.
마음을 열어 영안의 눈을 떠서 삼라만상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는 이 벤치를 어느 가을날에 다시 오리라.
생활 단상 – 모네의 정원 1998
부슬부슬 비 내리는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 벤치에 앉아서 연못을 바라본다.
푹 눌러쓴 밀짚모자, 덥수룩한 하얀 수염, 작업복 차림의 정원사 모네가 숲 속 사이로 걸어 나오는 듯 하다.
인적이 드문 이곳에서 한 세기 그 시대 모습을 그대로 담은 채 재현된 연못 속의 수련과 꽃들, 그 모든 것이 이 자리에 있다. 2년 전, 보스톤에서 열린 인상파 거장 모네 특별전에 걸렸던 그의 ‘수련(睡蓮) 연작’ 80여 점을 보고 나서 느꼈던 그 감동이 다시 살아난다.
대가가 많은 시간을 보낸 작업의 현장이자 영감의 원천지인 깊은 심연 속에서 솟아나는 비밀스런 교감이 교차되는 듯 하다. 오랜 세월 속에서 연마된 색채의 기법은 성숙 과정에 이르러, 예술혼의 혜안을 갖게 한 그 연못은 모네가 직접 손수 땅을 파서 만들었다고 한다.
50세에 이사를 와서 86세까지 살았던 이곳,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으면서 그려낸 수련의 연작 시리즈. 물의 흐름 속에서 피어난 꽃들의 음영, 흔들림, 빛의 떨림 등이 그의 독창적인 붓 처리로 다시 태어나 색조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의 사물을 보는 시각은 남달랐다. 그는 자연 대상물에 모든 정신을 몰입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에 따라 사물의 느낌이 달라지는 순간을 포착 했었다. 그는 순간순간의 느낌을 재빠른 붓 놀림으로 담아 나갔다. 그의 삶은 마치 붓으로 도를 닦는 구도자의 일생이었다고 표현하고 싶다.
모네의 다양한 색채 감각은 그림 그리는 것 이외에 유일한 취미인 원예 책 읽기와 정원 가꾸기 등에서도 느낄 수 있다. 자연의 본질과 인간 내면의 통찰, 우주가 보여주는 것을 붓으로 증명하고자 한 그의 작업과 창작의 비밀이 정원에서 실마리를 찾을 것 같다.
모네의 예술관은 독특하다. 그는 평소에 이렇게 말했다. “쓸 것 보다 그릴게 더 많은 것이 화가다. 붓으로 말을 한다. 그림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내 그림은 대중의 것이다.”
그는 특히 정원을 직접 가꾸면서 정원의 연꽃과 풀, 연못에 비친 녹음 등에 집중하며 자연 속에서 철학을 찾은 것이다. 노적가리, 포플러, 루앙 대성당, 수련 등의 연작 시리즈 등에서 볼 수 있듯, 한 대상을 연작기법으로 빛의 끊임없는 변화에 따라 동일한 사물의 풍경이 달라지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끝없이 노력한 흔적들이 바로 그를 인상파의 거장으로 만들었다.
구름의 끝없는 움직임, 바다의 거친 파도, 꽃의 다양함을 담고자 매 순간 같은 장소에서 그리며 꿈 속에서까지 전날 놓쳤던 새로운 형상이 무의식 속에 떠올랐다는 작업의식은 도를 향한 수도자의 고행 길과 같았으리라.
비는 계속 내리고 잿빛 하늘 아래 이름 모를 꽃들이 형형색색의 모습으로 비에 젖어 함초롬히 피어나 있다.
그 당시 판화들 속 가구들의 배치가 화목한 대가족의 집안 분위기를 잘 살려내고 있다.
인상파 화가들을 초대, 이들을 위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낸 부엌의 기구와 그릇들은 부인 알리스의 헌신적인 내조와 따스함이 그대로 배어 나오는 듯 하다.
모네는 여행 스케치를 다니면서도 가족들과 그의 정원에 피어나는 꽃들과 시드는 꽃들을 염려하는 등 꽃에 대한 열정으로 노후의 생활을 평화 속에 보내면서 지베르니의 집을 사랑했던 것이다.
집 옆 선물가게는 그 어느 곳보다 상품들이 다양하게 디자인 되어있다. 리빙아트 생활용품 전부를 모네 그림으로 채워 넣었다. 모네의 작품이 일반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은 풍경화에서 느낄 수 있는 잔잔한 감동, 색채의 진동이 그대로 눈 속으로 들어와 마음 한 곳에 고향과도 같은 푸근함으로 자리잡기 때문이다. 투명한 쪽빛 하늘과 부드러운 바람의 따스함 아래 영롱하게 피어난 꽃들의 하늘거림과 속삭임이 들리는 듯 하다.
자연 현장에서 느낀 것을 표현하기 위한 빠른 붓질의 유연함과 오랜 세월 속에 다듬어진 대가의 경지가 감동으로 스며든다. 대 진리를 깨달았을 때 오는 진정한 자유와 평안함이
그림 속에서 전달된다.
물에 갇힌 도시 1998
차가 없는 곳 수중의 도시 베니스로 왔다. 갯벌 위에 서있는 오래된 집들의 벽에 침수 흔적이 붓 자국처럼 나있다.
북쪽이어서 그런지 봄바람은 차갑기만 하다.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망토와 스웨터를 꺼내 입는다. 어디를 가려면 보트를 타야 하는 이곳은 영화에서 봤던 장면들이 현실로 펼쳐지는 곳이다. 그리고 낭만적일 뿐만 아니라 소매치기와 집시로부터도 해방된 여행객에게는 아주 이상적인 곳이다.
나는 이 이상적인 곳에 그곳 주민들과 같이 호흡하며 갇힌 신세가 되었다.
현재와 옛날이 교차하는 미로의 길을 지나서 호텔은 좁은 골목 속에 숨어 있었다. 어디를 가나 다리를건너야 하고 나는 건널 때 마다 운하 옆의 집들이 처연히 물속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모두가 이곳을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정한 이유는 이 자유로운 도시에서 좀 느긋하게 지내고 싶어서였다. 미혼인 두사람들과 그리고 일본인이 함께 한방을 같이 쓴다. 처음 보다는 서로의 행동방식에 익숙해져서 이제는 그다지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호흡이 잘 맞는다.
대부분 서로의 관심사에 맞게 관광하다가 식사시간과 취침시간에 만나서 함께 시간을 보낸다. 철저히나 홀로 여행을 즐기다가 저녁식사 시간에 흥겨운 대화로 서로가 여행하면서 느낀 것 들을 말하면 다음날 스케줄을 의논하곤 한다. 요꼬는 이태리에 흠뻑 빠지고 멋지고 상냥한 이태리 남자에게 매료되었다고 한다. 일본여자 특유의 몸짓과 미국생활에서 얻은 매너를 동시에 갖춘 당돌하면서도 예의가 느껴지는 독특한 매력이 있는 여자이다.
오래된 선술집 같은 식당의 마음씨 좋은 주인 아저씨가 반갑게 우리를 맞아 준다. 퇴근 후 남자들끼리술 한잔 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여기서 술마시며 노래 부르는 이태리 남자들을 보니 삼면이 바다여서 보수적이고 성격이 다혈질인 한국 남자들과 비슷하다는 얘기에 동감이 간다.
갖가지 신선하고 풍부한 해물요리와 샐러드를 종류대로 시키고 백포도주의 달콤함에 베네치아의 첫날밤을 흥겹게 보낸다.
다음날, 베니스의 아침을 맞았다. 보트를 타고 출퇴근하는 이들, 부산한 분위기속에 운하 옆 건물들이아침에서 깨어나고 있다. 산마르코 광장 앞에 비둘기와 관광객들이 몰린다.
마르코 교회 앞 광장, 역시 영화나 엽서따위에서 기억된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베니스의 수호신날개 달린 사자를 보고, 산마르코 사원의 근 천장의 모자이크화를 목이 뻐근하도록 쳐다보았다. 광장주위에 들어선 상가에 토산품들이 쇼윈도를 통해 이쁘게 진열되어 있고 섬세한 무늬의 자수들이 널려있는 러이스 전문점은 유럽인들의 화려한 드레스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깨어물고 싶도록달콤한 색상과 모양의, 작은 유리로 만든 사탕을 선물용으로 샀다. 일일이 종이에 싸서 포장해주는 서비스 정신에 관광국의 국민성을 보는 듯 하다.
색깔 있는 도시 코르소 1998
로마는 잠재 의식 속에 숨겨진 모험심을 끌어내는 매력 있는 도시이다.
유명한 부티크들이 죽 늘어서 있는 코르소 거리에는 디자이너들의 봄 상품들이 유리창을 통해 공연을하는 듯 하다.
파스텔 색조의 은은한 회색과 분홍의 화사함이 온 거리 가득하며 한껏 봄을 느끼게 한다.
집시들이 아이를 안고 어수룩한 관광객들을 물색하듯 두 눈을 반짝이며 무리를 지어 다닌다.
관광객 한 명이 집시- 하며 소리치자 인파들이 일제히 각자의 소지품을 점검하며 바라본다.
재빠르게 길 모퉁이로 사라지는 집시. 그리고 그 뒤를 쫓아 어린 아이 하나가 허둥대며 뛰어간다.
가장 화려한 허영의 욕구가 빚어놓은 패션과 어두운 가난함이 함께 공존하며 보색 대비되어 우리 앞에펼쳐진다. 햇살이 지려고 한다. 다시 길을 떠나자.
나는 머물 수 없는 안락한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트리타나 디몬디 교회로 향한다. 수 많은 계단을 오르니 고대 로마 미술의 전형적인 색조(폼페이의 붉은색)의 화려한 저택이 눈 앞에 떡 하니 서 있다. 그광경이 석양과 어우러져 나의 가슴으로 파고들어 전율을 느끼게 한다.
땡그렁 땡-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말들이 달렸던 거리의 돌 바닥 위에 화구들이 널부러져 있다. 이제거리의 초상화가가 그 화구를 챙기며 길 떠날 채비를 한다. 초상 화가의 쓸쓸한 뒷모습 속에 왠지 모를생활의 슬픔이 배어있다.
나보나 광장의 분수대는 밤에 더 운치를 더하며 물을 뿜는다.
1934년 시작한 레스토랑에서 마신 와인은 이태리 정통 음식들과 잘 어우러져
의 미각을 돋우며 여정을 더해준다.
어느덧 하늘은 어둠으로 깔렸다. 모든 사람들마다 삶의 흔적이 있듯 로마도 그 나름대로의 전쟁 속에서빚어진 훈장을 갖고 있다.
이런 로마를 보며 느끼는 것이 있다. 우리 모두가 하나쯤 가지고 있는 상처를 우려 하기 보다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어떨까? 모든 삶의 다양성을 인정하며 그것을 편안하게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줄 수있는 여유 있는 마음과 상대방을 배려해 주는 넉넉함을 이제는 지니고 싶다.
다양한 민족과 그에 따른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미국에 살면서 좀 더 넓은 시야로 모든 사물을 바라보며, 그것을 인정하며 배우며 즐기는 이민 1세. 그 이민 1세가 다시 2세들에게 그것을 준다면 이민 역사의 어려움을 일깨우며 전한 속에서도 한국인의 역사의식을 일깨워 문화를 재 창조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꽃, 예술, 고풍의 도시 1998
꽃의 도시 피렌체는 봄의 열기로 그윽하다.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예술 혼과 라파엘로의 작품을 인정한메디치가의 위력을 풍긴다.
그런 피렌체 거리에 고풍스러운 건물과 아르노강 위를 지르는 산타 토지나타 다리가 서로를 의지한 채역사를 지켜나가고 있다. 이런 조그마한 마을에 관광객들이 항상 붐빈다.
나는 작은 흥분과 함께 산 쵸반니 예배당 옆 호텔에 여정을 풀었다. 호텔 방의 오래된 벽지와 격자 무늬나무 장식이 된 유리창은 나를 중세 시대로 훌쩍 데리고 간다.
창 밖으로 백색, 분홍색, 짙은 녹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높은 8각형 건물이 보인다. 짐 정리를 하고주위를 둘러보러 나갔다가 호텔을 찾아올 때 의지 삼으면 되겠다.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거리로 나왔다.
시뇨리아 광장 이곳 저곳에 여행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큰 배낭을 베개로 삼고 봄 햇살을 받으며 누워있고, 어떤 이들은 비둘기에게 모이를 준다.
미켈란젤로의 거작 다비드 상이 눈에 들어온다. 남성미, 신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이 이 조각품을통해 온 몸을 휘감아 온다. 사진 찍는 이들이 장난기 있게 손으로 가르키는 곳을 유심히 쳐다보니 모두들 남성의 심벌을 향하고 있다.
최초의 나체상 다비드 상은 그렇게 웅장하게 서 있었다.
약간의 장난끼와 함께 두 딸아이들에게 보여줄 성 교육용으로 나 역시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모처럼 크게 웃었다.
8각형 건물을 등대 삼아 호텔로 와서 점심을 먹고 피렌체 거리의 윗 골목으로 접어든다. 갖가지 모조품과 가죽 제품, 수제품이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이 마치 남대문 시장을 보는 듯하다.
피렌체는 질감이 부드럽고 다양한 디자인의 가죽 제품으로 유명하다. 귀금속 역시 이태리 제를 알아 주듯 뉴욕에서 보지 못한 금 줄의 다양한 세공이 눈에 띤다. 은색 가죽 반 코트와 행운을 준다는 빨간 풍뎅이 귀걸이를 기분 좋게 샀다. 오후에는 시내 관광표를 사서 피렌체 시내를 전체적으로 둘러본다. 피렌체 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언덕 위의 조용한 마을에서 르네상스 문화를 만들어낸 예술의 도시 피렌체를 내려다 본다. 눈 앞에 보이는 오래된 건물에서 건축가 부르넬레스키의 영혼의 숨결이 스쳐 지나간다.
또 다시 우피치 미술관, 전원 풍경의 그림 속에서 봄의 요정들이 춤을 춘다.
그 이미지를 기억하기 위해 엽서와 머리핀을 샀다. 그곳에서 기차 역 앞 집시 소녀의 눈물이 고여있는듯한 눈과 마주친다. 잘생긴 청년 한 명이 서성거리며 우리 일행을 쳐다본다. 얼른 감정을 접고 현실로돌아와 내 주위를 챙긴다.
여자만 셋이고 가방이 2개씩 되니 짐을 가지고 움직일 때마다 열심히 안전 점검을 서로 하고 있다.
일본인 요꼬가 문을 사러가고, 한국 학교 동료 친구인 해경씨가 엽서를 사러 갔기에 가방을 실은 카트에 혼자 앉아서 여행 일지를 쓴다.
로마의 봄 향기 1998
3월의 로마는 봄 바람의 감미로움, 진한 역사의 향기와 숨결로 여행객을 취하게 한다.
화사한 벚 꽃이 피어난 길목 길목마다 오늘과 옛날이 한 데 어울려 시공을 초월한 하나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에스프레소 커피 향이 짙게 풍겨 나오는 카페 창가의 섬세한 레이스 커튼 너머로 개나리 꽃이 다소곳이꽂혀있는 화병이 눈가에 머문다. 노상 카페에 앉아서 앉아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쉬어가는 나그네가 잠시 되어본다. 무심코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행인들을 쳐다보는 나의 영혼에 햇살이 부드럽게 스며든다.
지난 세월 테베레 강물에 씻겨 모두 사라졌다 해도 이 순간 봄은 너무나도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야자수의 잎사귀가 나풀거리고 지나가는 차들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로마 시민들의 이상적인 삶은 즐기는 것이다. 택시 운전사부터 웨이터까지 조각처럼 핸섬한 얼굴로 모두들 여유를 가지고 오페라적 억양의 높낮이로 관광객을 맞이한다.
아테네에서 시작한 그리스 문화가 시간을 뛰어넘어 그 절정의 아름다움을 로마 거리에 남긴 탓일까?보이는 모든 것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보르게네 공원 잔디밭 사이에 피어난 꽃들을 배경으로 누워 일광욕을 하며 사랑을 나누는 남녀는 자연과 어우러진 원초적인 한 쌍이다. 좁은 길 사이를 누비는 오토바이의 행렬과 원색 장난감 자동차 같은조그만 차들은 유적지를 보존하려는 역사 의식을 지닌 국민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
전철역 모자이크로 장식된 벽화와 그 벽화의 어두운 공간의 타일에서 나오는 빛들이 조화를 이루어 지하도의 단조로움을 설치미술이 전시된 공간으로 변신시켜 시각적 즐거움을 안겨준다.
베네치아 궁전의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에 그려진 아담의 창조. 조각가이며 건축가였던 미켈란젤로가원근법을 이용해 표현한 깊이 있는 공간의 부조적 입체감과 회화적인 음영은 현대인들도 흉내내기 어려울 정도로 극치를 이룬다. 로마적 우주관이 교회 천장에 중세 14세기에 신격화된 영감으로 그려져있는 것이다.
포름(고대 로마시 중앙의 대 광장), 목욕탕 등 일상적인 모습에서도 로마의 향기가 느껴진다. 영화 벤허의 원형 경기장에서는 전차 경주의 흙 먼지와 열광하는 시민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피자리아에서 버섯을 썰어 덮은 피자를 간단하게 먹고 스페인 광장으로 간다. 그 곳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지는청춘 남녀들은 ‘로마의 휴일’의 한 장면 그대로이다.
로마는 누구나 영상의 한 주인공처럼 만들고, 때로는 우리가 영화 속에 실제 존재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하나보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1998
프랑스 파리 샹제리제 거리의 한 벤치에 앉아 흘러간 중세의 시간을 음미해 본다. 개선문에서 콩크르 광장으로 이어지는 길은 귀족들이 담소를 나누며 거닐었던 산책로로 연결된다. 화려한 문화와 긴 역사를 간직한 파리. 시간의 숨결이 담겨있는 이 도시를 제대로 느끼려면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것 보다 골목 골목을 걸어다니는 것이 좋다. 그래야 이 도시의 진정한 모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의 대 부호들이 샹제리제 거리를 선호하는 것은 오트쿠트르 패션의 원조를 창조한 디자이너들의 창작품이 비즈니스로 상품화 되어 거리를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액세서리, 스카프, 향수 등으로 유명한 샤넬, 크리스챤 디오르, 루이비통이 대를 이어가고 있다. 패션 학교 ‘에스모드’를 나와서도 능력있는 기업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프랑스의 문화정책 덕택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의 젊은 디자이너들은 역사의 향기를 자신들의 아이디어와 스타일로 재 창조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유명 부띠끄마다 전통과 현대식 실내장식이 돋보인다. 신흥 졸부들이 가질 수 없는 역사를 그들은 간직 한 채 우아한 품격을 유지한다. 이곳 매장 직원들의 친절함은 사르르 녹는 봉봉 캔디를 먹는 듯 하다.
화폐를 단일화 한 유러머니가 가게마다 가격표로 붙어있다. 달러와 비슷해 셈하기가 어렵지 않다. 유럽 통합은 로마제국에서 나폴레옹 히틀러에 이어 이제 경제로 연결 되어지는 것 같다.
프랑스 인들은 아시아 국가들의 장래성을 인정하며 문화 발상지에 대한 역사적인 가치를 존중한다. 또 객관적으로 그 나라보다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경제대국 일본 보다 중국, 인도의 보이지 않는 잠재력을 더 높게 평가하고 있다. 가톨릭 다음으로 불교에 관심을 쏟고 있다. 특히 동양 철학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거리 상점에는 동양을 포함, 다국적 문화의 토산품들이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다. 그들은 수입된 다른 문화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다시 창조하는 ‘톨레랑스(관용)’ 정신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다.
일행이 머문 곳은 오페라 하우스 근처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호텔이었다. 교통이 아주 편리해 같이 간 동료 모두 만족해 했다. 이곳에서 발길 닿는대로 걸어가면 어디를 가더라도 유적지이다. 국립 도서관 근처 고풍스러운 가게들과 방돔광장의 초 현대식 고급 상점이 무척 대조적이었다.
산책 중 자주 들른 팔레 루와왈 정원은 곱게 단장 되어 있었다. 검은 줄 무늬 낮은 원기둥의 돌 벤치는 높낮이가 다르게 설치되어 있었다. 왕궁의 정원이 지금은 시민들의 안식처로 변했다. 시민들이 그냥 바라만 보는 곳에서 생활하는 곳으로 바뀐 것이다.
상점 진열장에 샤넬의 오래된 핸드백과 원피스들이 눈에 띄었다. 중고지만 새 제품과는 다른 깊은 멋이 담겨 있었다. 유행은 돌고 도는 것. 판매 전략으로 선의 변형이 소비자의 구매욕을 불러 일으키고 있지만 파리 사람들은 최신의 유행만 선호하지 않는다. 자신에 맞는 스타일을 스스로 개발, 진정한 멋을 표현한다.
파리에 온 기념으로 미장원에 갔다. 일본 식당 만큼이나 일본인들이 많았다. 미용사는 일본인이었다. 미용사는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섬세하고 친절한 서비스가 마음에 들었다.
그날 저녁 동료들과 몽마르트로 향했다.
귀에 익은 멜로디가 가슴에 스며든다. 우리는 음악이 흘러 나오는 한 카페로 들어갔다. 가난한 화가들과 시인들이 모여서 이렇게 음악을 들으며 밤이 깊도록 인생과 사랑과 예술을 찬미했을 것이다.
피카소와 장콕도가 앉았던 자리에 낙서가 어지럽다. 데르트르 광장에 즐비하게 서 있던 거리의 화가들이 현실의 생활고를 초월해서 자신들의 예술 세계를 인정해주는 이들과 오늘도 이 밤을 지새우고 있을 것이다.
파리 밤 하늘 아래 몽마르트 언덕 비탈길에서 진정한 작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그들과 함께 축배를 들고 싶다.
끝없이 투명한 에머랄드 블루 빛 바다 1998
비행기 창 밖으로 초록의 정글 숲 너머로 바다가 보이며 끝없이 펼쳐진 하얀 모래사장에 투명한 블루 빛 바다가 시야에 들어온다. Cancun 이름 그대로 뱀처럼 긴 섬이 펼쳐진다. 공항에 내리니 멕시코 특유의 체취가 느껴지며 아열대 기후가 후끈 스며든다. 호텔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나서 아이들이 타보고 싶어하는 잠수함을 타고 바닷속 물고기 구경을 하였다.
수 십 종류의 물고기가 바다 잔디 사이로 오가며 보라색 부채 모양의 산호초에 나이가 만년 이라고 한다. 뇌 모양의 물결을 따라 흠이 파여진 돌 사이로 큰 거북이가 보이며 바윗돌처럼 큰 가오리가 유리창 사이로 스쳐간다. 야광 노랑색의 물고기 떼가 한 방향으로 따라오며 네온 싸인 불 빛처럼 바다 속은 현란한 색으로 가득하였다. 배를 기다리는 동안 두 딸은 머리를 땋고 구슬장식을 해주는 핀의 색깔을 고르는 동안 남편과 나는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서 백사장을 거닐며 어디서나 들려오는 음악소리 야자수 나무와 붉고 흰 향기 짙은 꽃들이 이국의 정취를 더해주었다. 하얀 고운 모래를 담아오고 나무껍질을 줍고 꽃잎들을 모아 담았다. 늘 나의 머리 속에는 판화에 쓰이는 재료로 모든 것이 보여지는 것이다. 여행은 일상적인 생활의 궤도에서 벗어나 잠재력 속에 잠긴 또 다른 이미지를 갖게 해주기에 감성의 활력소가 재충전 된다. 저녁식사를 망고탱고다이스에서 하며 접시에 꽃으로 장식을 한 생선 요리가 이채로웠다.
쇼 시간이 되면서 분위기는 고조되어 춤추는 무희의 긴 눈썹과 땀방울에 지워지는 화장을 가까이 보았다. 정열적인 고혹적인 혼혈 미인들의 웃음이 비애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날 Chichen itza 사원을 가기로 했다. 길거리의 소형 차 폭스바겐의 원색과 찌그러진 차들 일본제 택시들의 물결이 멕시코의 경제를 나타내주며 느긋한 열대지방 사람들의 낙천적인 모습이 길에 서서 야자수 열매를 먹고 있는 노무자들의 눈에 낯설지 않은 이유는 늘 한국 식당, 가게에서 본 듯한 검정머리에 키 작은 땅딸한 모습이 한국 시골 청년을 보는 듯 친근하다.
기억의 파편들이 유년의 강으로 흘러가듯 60년대의 한국과도 같아서 늘 연결된 듯싶다. 시골장터에 바구니에 들고나온 과일 채소를 파는 노인네들 학교 앞의 노점상들의 쭈그리고 앉은 모습이 정겹다.
곱게 차려 입고 나온 신요리따의 붉은 루즈색깔,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 너머로 대형간판 코카콜라가 뽐내며 걸려있다. 180년 성당건물에 앉아있는 밀짚모자에 샌달을 신은 이들이 한가하게 잡담을 하며 플라스틱 장 바구니를 들고 다니는 아낙네들 그들의 얼굴은 여유로움과 기계문명에 물들지 않은 인간미가 넘쳐나고 있었다. 너무나 좋은 신이 준 기후의 축복이 어디에서나 주어지는 풍성한 열매들이 그들이 삶을 안이하게 만든 것일까? 화려한 원색의 parrot의 날개와도 같은 파랑, 분홍, 황금색의 집들 강렬한 햇살은 하얀 벽에 피어난 꽃들과 나에게 색대비의 색감을 눈뜨게 해 주었다. Yucatm의 동굴은 천 년 그대로 보존되어 뿌리의 뒤엉킴과 줄기가 실 가닥처럼 늘어져 물 속까지 내려져 있으며 23미터의 높이에서 수심 50미터가 들여다 보인다.
원주민 소년의 다이빙은 날쌘 새와 같이 물속을 날아 들었다. 점심 때 민속춤을 추는 남녀들 통풍 좋은 하얀 옷에 꽃 무늬 수가 같이 따라 움직이듯 보인다. 그 옛날 스페인 지배자처럼 하얀 모자와 콧수염을 기른 하얀 옷을 입은 웨이터의 시중을 받으며 달콤한 망고를 먹었다.
동네 아이들이 들고 나와 파는 목각 조각을 30페소에 샀다. 나중에 선물가게에 가서 보니 싸게 산 것을 알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유적지에 도착하여 마야 문명 3천 년의 비밀을 대하듯 경건해지는 마음이 든다. 자연과 신에 제사를 지내는 1400년 전 석회석 돌로 만든 피라미드들. 어디서 날라온 빨간 잠자리가 우리 주위를 맴돈다. Chac Mool의 조각이 한가롭게 햇살에서 관광객을 쳐다보는 듯 하다. 피라미드 91계단을 오르는데 어디선가 조장들의 축제의 춤과 노래가 허공에서 울리는 듯싶다. 울긋불긋한 제사장들의 모습이 실루엣처럼 보인다.
좀 더 하늘 가까이 신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 나에게도 시공을 초월해 다가온 듯 싶었다. 오르고 나니 가파른 계단에 유적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멀리 정글 숲 사이로 제사를 지내려 오는 원주민의 행렬을 이렇게 서서 보았으리라 싶다. 돌아오는 길 시골 농가의 초가집에 실 침대 위에 누운 아이들 자전거 타고 가는 학생들 들판에 하얀 소들과 마당의 돼지와 닭장이 보인다.
바가지에 물 빨래를 하는 여인네들의 가난한 모습이 정겹게 다가온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더니 다음 날도 비가 와서 바닷가 보다는 버스를 타고 다운타운으로 갔다. 재래시장에 가서 Pinata 별 모양을 사고 종이, 약초, 향, 토산품을 샀다. 가격이 다 달라서 딸들의 스패니시 실력을 발휘하면서 남편과 나는 흐뭇하게 딸들을 앞장 세우고 다녔다.
실버 액세서리에서 마야 고유의 문양 목거리를 사고 글자를 그려 보았다. 늘어난 짐 때문에 플라스틱 체크무늬 장바구니를 사서 담았는데 가볍고 튼튼해서 아이들 것도 골랐다. 택시를 탔는데 앞 좌석에 어린애가 기사의 자녀라고 한다. 부인은 일터로 가고 남편이 아이를 데리고 운전을 하기에 측은한 마음에 팁을 아이들에게 주었다. 재래시장에서 흠뻑 인간미의 체취를 느끼고 한국의 장터가 사라지는 것의 아쉬움을 가져보았다. 좋은 관광객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내일이면 회색의 겨울도시로 돌아가기에 밤 바다를 보기 위해 베란다 창문을 여니 하얀 망사 커튼이 휘날리며 바람이 들어온다. 온 몸을 휘감는 남미의 바람이 내 마음 속까지 스며든다. 바람결에 흔들거리는 야자수 잎들이 사이사이로 바람이 일며 비가 뿌리고 있다.
가족들이 있는데 나는 인간적 고독감이 엄습을 한다. 경비원들이 해안가와 원두막 사이 풀장을 다니고 있고, 어둠깔린 바닷가에 파도 소리와 비 소리가 구성지게 들려온다. 자연의 음악 소리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어본다. 좀 더 크게, 강하게 연주해 다오, 파도 소리여, 바람이여, 태고의 신비를 노래 해주오. 검은 벨벳의 휘장 같은 밤 하늘이 걷힐 때까지…… 깊은 상념에 빠지며 밤 바다는 자연의 관조 세계를 나에게 불러 주었다.
레드 와인 빛깔의 가을날 1998
끝없이 맑고 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기에 수채화 물감을 풀어서 큰 붓으로 칠한 듯 투명하다. 단풍들은 어느새 잎들을 형형색색의 색채로 물들여 버렸나, 우리네 인생살이처럼 유아기의 연두색 새싹에서 청년기의 무성한 초록 잎, 그리고 중년의 여러 모습처럼 노랑, 주황, 붉은색 한 잎에 이 빛깔을 다 가지고 있는 단풍들이 푸른 하늘과 잘 어우러져 이 가을을 수를 놓고 물들이고 있다. 매 주마다 가족들과 허드슨 강줄기에 있는 여러 빌리지 페스티벌과 박물관, 유적지를 찾아 다녔다. 지난 주말에는 NYS Thruway Brotherhood에 이름난 Winery로 갔었다.
일주일 사이 산등성이 나무들이 붉다 못해 검붉게 타고 있으며 유유히 흘러가는 허드슨 강 물결이 마치 풍경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멀리서 고풍스러운 빨간 벽돌집과 나무로 만든 큰 술통이 집 문패로 보인다. 1839년에 생긴 뉴욕주에서 제일 오래된 포도주 제조장답게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조그만 갤러리에 전시된 지방 화가들의 소박한 그림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안내자와 함께 모여서 지하실로 내려가니 바깥 온도와 달리 서늘하고 침침하며 온통 집채만한 술통들, 먼지 낀 와이병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슬라이드 필름으로 만드는 과정을 보고 창고에 몇 백년 묵은 포도주병들이 쌓여있다. 거미줄이 얽혀있고 녹슨 창살이 잠겨 있었다.
Wine tasting을 하기 위해 조그만 잔에 수십 종류를 부어준다. 최고의 상술 맛배기로 선전을 하여 원하는 것을 표시하라며 종이를 준다.
남편은 운전을 하기에 나보고 맛을 보며 살 것을 결정하라고 해서 진지하게 맛, 빛깔, 향기를 음미하였다. 아이들에게 Alcohol-free의 백포도주 Rosaria를 주는데 맛있고 달다고 한다. 선물가게에 들어섰는데 한글로 된 인삼 포도주 포스터가 붙어있고 몇 종류 전시되어 있었다. 델리 가게에서 인삼 껌을 봤을 때처럼 역시 고려 인삼의 효력은 세계적인 것 같다.
밖에서 들리는 음악소리와 테이블마다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먹는 소박한 농촌 대가족 식구들이 피크닉을 즐기며 쇼 진행자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무대 앞에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다시 살아온 듯 너무나 흡사한 모습이다. 딱 붙는 맘보바지, 귀 옆의 구렛나루 수염, 옆으로 입을 벌려 웃는 모습, 마이크 잡는 것 하며 이름 역시 엘비스라고 한다.
흥에 겨워 춤을 추는 노인들과 젊은 여인들의 어울림이 미국의 수평적 인간관계의 어울림을 보는 것 같다. 나무통에 포도를 넣어 맨발로 밟기 대회, 일불 속에 있는 번호 맞추는 게임도 다들 같이 한다. 축제 분위기에서 나와 한적한 풀밭에 앉았다. 아까 마신 와인의 취기가 오는 건지 기분이 센치해지며 이미 떨어져 퇴색되어 바랜 마른 잎들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오며……
바람결에 사뿐히 떨어지는 붉고 짙은 레드 와인 빛깔의 단풍잎을 주워서 수첩에 끼워 두었다. 얻어온 콜크 마개에 단풍을 새겨 스탬프로 찍어서 카드로 만들어 보고픈 친구에게 곱게 짙어져 가는 단풍 잎처럼 물들어가는 내 마음을 전해보고 싶다.
와인 맛처럼 가을의 빛깔과 향기에 취해 갔다.
Multi Media와 가정생활 1998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 상업광고의 문장이 다채로워지고 신세대 감각으로 획기적이며 다양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카피라이터 직업이 인기직종이 된 것이다. 잡지 역시 여러 분야로 전문 교양잡지에서 여성 월간지가 10여종 넘게 발간되고 있다. 미혼여성, 중년여성의 구분 보다는 십대, 미시족, 미즈, 싱글 3, 40대로 나뉘어 화려한 패션 감각과 인테리어 소모품, 결혼관, 직업관, 인생관, 성 지식 등을 과감하고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대학 시절 일본 잡지 논노, 엘르, 미국 잡지 보그를 사보던 시절이 이제는 지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경제상승으로 밀려오는 급변한 물질문명으로 인해 의식주의 발달과 고객취향이 높아진 점도 있지만 한국적 사고방식이 서구지향적이 되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일본 잡지의 뛰어난 사진술과 미국잡지와 제휴한 잡지들의 자유분방한 연애관, 전문직 여성들의 싱글의 화려함만을 미화시키는 점도 우려가 된다. 이곳에 사는 여성들이 더 보수적인 경향을 띠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정 안으로 들어서는 수많은 문명 매개체를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문제이다. 특히 자녀들에게 있어 무방비, 무법 시대이기도 하며 인터넷으로 침투, 방문 하나 닫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양상을 부모들은 그저 공부하겠지 하고 넘겨 짚는 것 보다 점검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 세대는 공부 할 때 음악을 듣고 한다고 야단하시던 부모님들의 성화를 다른 형태로 우리가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부모가 되었을 때 또 어떤 양상으로 세대차이를 가질까? 궁금해 지기도 한다.
라디오 심야 프로를 듣고 팝송, 샹송, 칸소네와 접하게 되고 클래식 음악보다 더 많은 유행가 가사를 외우고 다음날 학교에 가서 친한 친구들과 지난 밤 사연과 음악 이야기로 우정을 돈독히 하였던 낭만이 떠오른다. TV는 60년대 어린이 프로가 5시가 되면 노래로 시작해 나오는 것을 흑백으로 보다가 70년대 AFKN에서 나오는 프로를 컬러 화면으로 접하였을 때 그 선명한 화면에 매료 당하면서 컬러 TV가 우리 생활 속에 보급되면서부터 옛날 영화를 흑백으로 볼 때 그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다가오고 작품사진을 대하듯 더 감명과 애착이 있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이런 문명의 발달과정을 생활 속에서 느껴보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이런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떤 절차나 과정이 없이 다 주어졌기에…… 그러나 공통점 한가지는 바보상자(TV)는 정보상자의 가정에서의 역할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다 같은 것 같다. 그저 넋 나간 듯 화면에 빠져 소파에 자석이 붙은 듯 떨어지지 않고 리모콘 때문에 채널을 돌리려 일어나지도 않은 채 TV를 보는 아이들을 대할 때 부모들 역시 그런 모습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가족들과 같이 즐길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간식과 함께 담소를 나누며 시청을 한다면 좋은 오락기구가 될 수 있겠지만 아이들의 베이비 시터로 전락해 버린다면 위험한 공해 도구가 될 것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작년에 TV 프로를 등급으로 선별해 놓았지만 그 수 많은 채널의 전선을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적당한 기준을 두어서 아이들 수준에 맞게 그들이 선택한 프로그램을 보고 이해해야만 학교에 가서도 친구들과의 대화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부모가 되어서 규칙을 세워 지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아이들이 시사성에 익숙하게 하기 위해 뉴스를 보다가 자연히 그 다음 프로그램으로 넘기기에 큰 아이에게 알람이 있는 라디오를 사주었다.
아침에 알람 소리에 일어나 라디오 뉴스를 듣고 그날의 일기와 전날의 뉴스거리를 화제로 삼으며 아침을 먹는 아이가 대견스러워 나는 물어보았다. “리나! TV보다 라디오가 좋은 점은 무엇이니?” “다른 일을 하면서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고 숙제 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아이들에게 잔소리 안하고 지내면서 그 노래 좋으니? 물으면 엄마도 들어봐요 좋아하실거야. 하면서 노래의 제목을 가르쳐 준다. 난 속으로 안 듣고 하면 더욱 좋겠지만 TV를 앉아서 보는 것 보다는 상상력을 키울 수 있게 라디오를 듣는 것이 좋다고 생각이 든다. 나 역시 한국어 방송으로 가사일을 하면서 음식을 만들 때 들을 수 있는 음악과 세상사 이야기, 운전을 하면서 무료하지 않게 듣는 라디오가 있기에 각박한 이민생활에 정서의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멀티미디어의 최대의 효과를 가지기 위해 각자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생활도구가 되어 지배 당하지 않으며 사용 할 수 있는 것 같다.
학교 운동장의 밤 하늘 1998
어스름한 초저녁 노을이 대지 위에 깔리기 시작한다. 불그스레한 하늘에는 한 떼의 철새들이 수 많은 연속적인 점으로 무리를 지어 날아가고, 아름드리 고목의 단풍이 바람결에 떨어진다. 축구 연습을 하던 학생들이 잔디밭에 앉아서 코치의 설명을 듣고 관중석에 앉아있던 학부형들도 한 두 명씩 일어난다. 건너편 테니스 코트장에 오가던 공도 멈췄다. 응원 연습을 하던 음악소리도 어둠의 정적에 묻혀져 버렸다.
저녁 바람과 사라져 가는 운동장의 삽화가 가랑잎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가듯 흩어져 버린다. 붉은 벽돌 위에 붙은 전등이 일제히 켜지기 시작하며 악기를 들고 밴드실로 들어가는 학생들과 스쿨 버스를 타고 게임에 가던 학생들이 지친 듯 내리고 있다. 아이들이 하교 후 활동으로 일주일에 몇 번 데리고 다니면서 눈에 익은 장면들이다.
올 해 큰 아이는 고등학교에 가면서 테니스를 치고, 작은 아이는 치어리딩 연습으로 운동장과 친숙해졌다. 좀 전까지 유니폼을 입고 무리를 짓던 학생들이 사라지고, 어둠이 깔린 운동장은 정적으로 잠잠하다.
아이는 소리를 내어 본다.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춤을 추듯 돌기도 하며 뛰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그 넓은 운동장이 무대처럼 보인다.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다가 잔디밭에 앉았다.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오래 전 그때도 이렇게 별이 반짝일 때…… 밤 하늘을 쳐다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교 후 반 전체가 기합을 받고 교문을 나설 때와 교련훈련으로 늦게까지 남아서 연습을 하고 다음 날 비가 오길 기다리며 별이 뜨지 않기를 바라며 쳐다보던 하늘에 총총히 떠 있던 별들…… 지난 날의 밤 하늘 별과 가을바람은 시공을 초월하여 같건만 운동장과 부모가 된 후의 의미는 다르게 다가온다.
미국의 정신교육은 운동인 것 같다. 도덕과 윤리 정신도 운동의 소속팀과 협동심, 리더쉽에서 몸도 체험하여 배워 나가는 전인 교육의 현장인 것이다. 청소년 때 체력적으로 단련 시켜서 지성을 키워가는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저 하늘에도 슬픔이” 영화를 학교에서 촬영을 하고 나서 영화를 볼 때 그 슬픈 영화를 보면서 울면서도 가을 운동회 청, 백으로 나누어져 응원하는 모습과 엄마의 모습이 나올 때 즐거워서 소리를 쳤다.
30여 년 전 흑백영화의 영상과 학교 운동장에 바람이 일던 것이 눈에 선하다. 아이들의 초등학교 운동대회는 전 학년이 한 종목마다 참여해서 다 해보는 것이 주목적이기에 승부욕의 열기보다는 야외수업의 연장놀이인 공부로 보여졌다.
부모들은 선생님들을 도와주고 학교 잔디 밭 뒤편에서 바비큐로 핫도그를 구워서 점심시간 때 반 아이들과 같이 먹으면서 학년마다 다르게 만든 흰 티셔츠의 그림과 염색이 든 디자인이 검정색 반바지 한국의 가을 운동 대회의 아스라한 그리움과 함께 낯설게 느껴지는 황량함이 다양한 티셔츠의 색상처럼 가슴속을 물들였다.
차갑게 밤공기가 몸을 움츠리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면서 다가오는 학교 건물이 내 마음의 무게처럼 눌려 오는 듯 하다. 학교 뒷문 타운 도서실의 불빛이 새어 나온다. 정겹게 느껴지며 딸 아이의 손목을 꼭 잡고 걸으면서, “그래! 이렇게 이어져 가는 거야!” 서로 다른 운동장이지만, 지금 우리는 유년의 숲 속으로 이어져 가고 시간의 강은 우리 사이로 흘러가는 물 소리처럼 가을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Maybe 1998
I ask an acquaintance.
Are you staying here?
Maybe……
The acquaintance asks me.
Are you staying here?
Maybe……
We all live here as if it were not our home,
Someday hoping and thinking that
There is a place somewhere that we can go back to.
Not even knowing where we want to go.
Where is that place we long for?
Living life is but all the same.
Why is that we can not forget the other place?
Always longing for a faraway and unknown world
We live on keeping our home country
Close to our hearts.
때때로 비 그리고 흐리고 맑고 개임 1998
어디서부터 기억 되어져야 할까요? 우리의 만남을 그리고 끝남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사랑이 떠난 그 자리도 사랑의 연속 인 것을, 떨어져서 언제까지라도 이대로 이렇게 그리워 한다는 것도 그 시간의 흔적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것도 승화된 한 부분을 가슴속 깊은곳에서 언제나 함께 한다는 것이 인생을 풍부하게 살아가게 하는 젊은 날의 초상을 기억 한다는 것, 애틋한 삶의 한 부분 이라는 것을 남은 세월의 시간도 간작하며 지내려 합니다. 한 때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못하고 헤어지는 일이라고 아픔을 견디다가 힘들어 했지만, 감미롭고 순수했던 순정의 시절 짝사랑의 애달픔을 지니고 맨 처음 이성이라는 존재에 눈을 뜬 그 존재를 의식하게 해준 여러 애정의 증세와 문학과 예술에 대하여 많은 영향을 준 그분을 만난것과 이루어지지 않는 그 만남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 조차 축복이었다는 것을 모든 기억들이 푸른 날개 짓을 하며 다시 일어 납니다.
오월의 봄은 사춘기 소녀에게는 마음을 진동 시키기에 완벽한 자연의 아름다움의 배경으로 충만한 나날이었다. 피어 오르는 꽃들과 신록의 푸르름과 지저귀는 새소리는 생의 환희를 노래 부르는 듯 다가왔다. 미술과 교생실습으로 나온 졸업반 미대생 교생선생님으로 첫 대면이 주어 졌다. 처음 본 순간 나의 가슴은 연분홍 빛으로 물들어 갔다. 동경의 대상 미술학도와 외모에서 풍기는 일반 교사들과 달리 신선함과 약간 긴 머리와 젊은 감각의 옷차림이 우선 시선을 머물게 하였다. 부드러운 목소리의 울림 가끔 애수 어린 눈동자가 눈이 마주칠 때 강한 빛을 느꼈다. 이상형 그 자체였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이 크나큰 비밀을 어떻게 감당을 할 수 있을까?
어린 소녀의 가슴은 지진과도 같은 진동으로 다가왔다. 열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주위의 그 모든 것의 의미가 다르게 받아졌다. 열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주위의 그 모든 것의 의미가 다르게 받아졌따. 오로지 관심의 대상은 내가 그분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 그것이 최대의 목적이었다. 말이 적어지고 친구들과의 이야기 중에도 먼 곳을 응시하며 넋이 나간 듯이 온통 머리 속을 첫인상의 모습을 그리곤 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생각 같이 있는 순간만을 상상하다가 괜스레 웃음이 나 곤 했다. 수업시간에도 창가를 바라보고 가방속에는 연애소설과 시집을 넣고 다니며 쉬는 시간에 탐독을 했다. 내 마음의 증상들이 책 속에 있고 길도 주어지리라 믿었고 무엇보다 내 심정의 나열들을 읽으며 주인공이 된 듯 빠져들었다. 가슴 앓이는 갈수록 더하고 식욕은 떨어지고 잠도 잘 이룰 수 없고 가족들은 봄을 탄다고 크려고 그런다고 도리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조숙한 소녀의 가슴은 봄날과 함께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교내 복도에서 부딪치면 가벼운 목례인사를 하면서도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몸은 굳어져 왔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미술실에 가서 우연한 만남을 만들며 주위를 맴돌았다. 그것만이 유일한 만남의 확인 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날이 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미술 실기대회가 경복궁에서 하게 되었을 때 미술부 반장으로 그림수거를 하면서 뒷정리를 도와 주게 되었다. 내 그림을 보여 달라고 하시면서 칭찬을 해 주셨다. 재능이 있으며 계속 열심히 그리라고 하시면서 칭찬을 해 주셨다. 재능이 있으며 그리라며 풍경화의 원근법과 수채화기법 물감의 농담을 가르쳐 주면서 미술전집을 보여 주시겠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많은 감상을 하듯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명곡을 들어야 한다면서 끊임없는 노력만이 좋은 작품을 할수 있다고 하셨다. 그때 가까이 다가 섰을 때 풍겨오던 내음 셰이브로션의 체취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최초의 남성의 향기로 기억 되어 진다.
본부석에 그림을 갖다 주고 걸어 나올 때 한산해진 고궁은 마치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준비된 것 같았다. 교생과 학생의 사이를 범어서 여인으로 둘만이 걸어 본 고궁의 산책 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 감동을 억누를수 없어서 일기장에 쓰면서 미래의 꿈을 꾸었다. 그림을 그리리라!!
화가가 되어야 만이 만남이 지속되고 그길만이 사랑의 환성이라고 마음을 다짐하여 굳혔다 거울을 볼 때 마다 단발머리가 원망스러웠고 교복만이 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안타까웠다. 성숙해져 가는 여성스러움을 보여 주고 싶었다. 수줍게 웃어 보면서 거울 속에서 그 분의 환영이 보이는 듯 했지만, 슬픔의 비애가 스쳐 감을 느꼈다. 온통 가득히 얼굴과 목소리가 투명인간이 되어 내 주위에서 맴돌았다. 가만히 누워서 그리다가 잠들고 깨어나서도 떠오르는 모습 드디어 상사병 난 것이다. 매사에 흥미가 없어지고 만나고 싶다는 열정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10살의 나이차이와 학생과 교생선생님으로 사제지간이니 넘을 수 없는 벽 이었다. 머나먼 미지의 상대이기에 더욱더 간절함이 더했다.
그리고 몇 주 후면 대학으로 돌아 가고 만날수 없다는 절박함이 우울하게 만들었다. 특별활동 반 미술부 모임이 방과후 미술실 에서 있어서 석고 뎃상을 하게 되었다. 종례가 끝나기만 기다렸다 4층 미술실로 달려갔다.
어느날 내가 맨 처음 오게 되고 선생님이 혼자 계셨다. 나를 쳐다보시더니 옆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며 이름도 참 이쁘고 좋다고 하시면서, 연꽃은 환생의 상징으로 진흙 속에서도 오묘한 빛깔로 피어나며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피어나며 연꽃의 작설차 향기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주며 신성스러운 꽃으로 동 서양 화가들이 많이 주제로 다루었다고 하시며, 모네의 대작 연꽃 시리즈는 서양화면서 동양화 붓터치가 있으며 모네가 마지막까지 다루었듯 연꽃을 빛의순간 포착으로 잘 표현한 작품이라며 대가의 그림이라고 화집을 보여 주셨다.
뎃상을 하면서 기쁨에 들떠 목탄을 부러뜨리고 지우개로 쓰려던 식빵이 온통 땀에 젖어 뭉개져 버렸다. 줄리앙의 석고는 내마음을 아는지 입술선 이 그날 따라 입술이 위로 올라가서 미소를 보내는듯 보였다.
석양이 질 무렵 미술부 원들과 교정을 나올 때 우리들에게 언덕 위에 붉은 노을을 보라고 하시며 주홍빛 노을은 먼지의 반사로 색이 주어지지만 얼마나 다양한 색감이 하늘에 있는가를 보어여 한다고 늘 자연을 보면서 색을 느끼고 캔버스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나에게만 들려주시는 말씀처럼 노을 빛은 그 순간 마음을 온통 물들이게 하였다. 그 날밤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밤새 끄적거리다가 일기장 속에 묻혀 버렸다. 다음주면 교생실습기간이 끝나는 날이 온다는 절망감으로 가득 차 버렸다. 학교에서 인기 투표를 하였는데 역시 1위였다.
모든 학생들에게도 인기 만점인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마지막 수업이 있는 날 학생들에게 선물과 편지를 받고서 그 보답으로 미술부 원들과 야외 스케치를 가자고 하셨다. 미술선생님도 승낙을 하셨고 모두들 좋아했다. 교복을 입지 않고 만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이 부풀어서 어떤 옷을 입을까 고심을 했다.
70년대로 최신휴행 나팔바지와 짝 붙는 티셔츠 모자 구두는 언니에게 빌리고 도마핀대신 색핀으로 하고 미술도구가 들어갈 가방까지 준비하였다. 거울 앞에서 입어 볼 때 언니가 들어와 보더니, 그림 그리러 가는 거니 옷자랑을 하는거니 핀잔을 주면서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같이 가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웃으며 하는 말 나도 너 나이 때 그랬어 그 누군가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팔청춘이지, 그때는 플라토닉 러브로 정신적인 생각을 하기에 괴로웠는데 지나고 보니까는 그때가 그립고 아름다웠던 시절 이었어 이루어 지지 않기에 첫사랑으로 기억되어지고 연연해 하곤하지 그런데 누구니? 머뭇거리는 나를 보더니 “한때야 한때” 하며 문을 닫고 나간다.
갑자기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그럼 모두들 다 이런 과정을 스치고 가는 걸까 특별히 나한테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 누구나 겪는 사춘기의 열병일까? 혼돈속에 절대로 평범해서는 안된다는 예술가적 기질은 남과 다른 것이라고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토요일 밤부터 내리는 비는 줄기차게 창문을 두들기며 내렸다.
일기 예보는 일요일은 “때때로 비가오며 흐리다가 맑고 개임” 이라고 하며 우산을 준비하라고 했다. 걱정이 되어 선생님께 전화를 하니 전화선을 통하여 울리는 웃음 소리는 내 귀 전전을 울렸다.
“때때로 비 흐리고 맑고 개임” 을 들으시고 인생살이 바로 그런 것이라며 푸른 하늘 보다 비 개인 하늘의 변화 무쌍한 하늘을 볼수 있어서 더 좋다고 하시며, 약속은 약속이니 비와도 덕수궁 앞에서 다 모이라고 부탁하셨다. 초 여름의 소낙비는 밤새 내리더니 초록 잎들은 싱그러움을 더해 가고 이슬을 머금은 듯 피어난 꽃들도 만발하였다. 다음날 아침 부산하게 준비하며 가방과 이젤 때문에 우산을 가져가지 않는다고 엄마에게 말하며 내심 선생님과 비오는 거리를 한 우산을 쓰며 걷는 것을 떠올랐다. 덕수궁에 도착을 하니 학생들과 선생님이 보이며 그 뒤에 긴 생머리의 날씬한 몸매와 세련된 여대생 눈에 들어와 박힌다. 아이들은 수근거리며 선생님의 애 인이라며 한 쌍의 멋진커플이라며 부러운 듯 쳐다보곤 한다.
갑자기 모든 희망은 사라지고 꿈은 깨어지고 산산조각이 나며 거미줄처럼 얽히었던 질투심이 쏟아 났다. 학교에서도 무용선생님과 친하다는 소문 하교 후 교정을 같이 걸어 나오시던 모습을 보며 가슴 절였던 그 고통보다 더 진하게 현실로 다가오는 이 배신감을 억누를수 없는 비애감으로 휩싸여졌다. 안색이 창백해지고 식은 땀이 흐르고 급기야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모두들 놀라서 괜찮냐고 물어 온다. 선생님이 다가와서 어제 일기예보 때문에 너무 걱정해서 잠을 잘 못잤구나 하시면서 이마에 손을 대어 보더니 열은 없으니 걱정하기 말라고 웃으신다. 그 미소가 나에게는 더 아픔으로 다가왔다.
여리고 여린 내 가슴을 그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 무정한 선생님 온갖 유행가 가사가 떠오르며 분수대 앞에서 스케치를 하는둥 마는둥 끝내고 이젤을 접으려고 할 때 멀리 서 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벤치에 가서 앉아 있으니 옆에 오셔서 스케치북을 들춰 보시면서 드로잉에 균형감각이 있다고 하시며 예고에 가기 위해서 더 많은 연습이 필요 하다며 나에 대해서 담임 선생님께 들었다고 하시며 여름방학떄 선생님의 아뜨리에 놀러 와서 배워도 된다고 하시며 약도를 그려주셨다. 병주고 약주고 그때 그 말이 떠올랐다.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만남의 음모를 위해서 부모님께 광화문에 다니던 화실보다는 담임선생이 진학 상담에서 권하시는 개인지도를 할수 있는 안국동 로터리에 있는 선생님의 아뜨리에를 여름방학때 다니기로 하였다.
선생님이 떠난 교정은 쓸쓸한 빈 터 였다. 어디서나 선생님의 흔적이 있었고 미술실도 가기 싫었고 낙서와 독서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태양열이 작열한 찌는 듯한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하복 입기만을 기다렸는데 8월은 그렇게 다가왔다.
처음 아뜨리에 가던 날의 슈베르트 세레나데의 감미로운 선율의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오일 페인팅의 기름냄새가 나며 커피의 진한 향이 배어 나왔다. 구석에 놓여진 기타와 레코드판이 보인다. 광화문 화실의 여러 개 이젤과 석고상의 나열과 채색의 구성 그림 뎃상 일률적인 화실모습이 아니라 화가의 스튜디오 인 것인가. 쌓여있는 책들과 도자기에 꽂힌 수십개의 붓들 벽면을 채우는 큰 캔버스 여러 도구들은 작가의 내면을 보는 듯 흥미로 왔다.
몇 개월사이 변해진 모습은 수염이 난 턱과 더 길어진 머리 때문에 더욱더 멋있어 보였다. 진지하게 작업하시는 모습은 나의 가슴을 뛰게 하였고 가르쳐 주실때의 엄격함과 진지함은 존경심으로 다가섰다. 선생님 집안이 화가인것과 겨울에 유학을 간다는 것을 친구분을 통해서 들었다. 나를 동생처럼 대해 주시며 친구들에게 소개도 해 주시고 선생님이 떠나서도 잘 부탁한다고 하셨따.
드라마 센터에서 본 연극, 프랑스 문화관이 가까워서 자주 가서 본 흑백영화 미도파, 신세계 안국동 화랑의 전시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작품세계와 작가 설명을 해 주시곤 했다. 성장기 감성세계에 큰영향을 준 계기가 된 것 같다. 예술의 깊은 안목의 눈을 키우게 되었다.
거리를 온통 풍경화로 바뀌어 버린 아뜨리에 창가의 은행나무 고목의 노랑 잎들이 수북이 쌓이는 우수의 가을도 지나갔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날에 선생님은 유학길을 떠나쎴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만남은 끝이 났다. 나의 감정의 기복은 승화되어서 아름다운 사춘기 시절의 어설픈 에피소드가 아니라 글과 그림으로 인생을 표현하게 하는 심미안적인 눈을 길러 주신것이다. 그때 나는 모든 인간 관계를 5가지로 나누어서 좋. 싫. 따. 사. 미 로 정하에 이름과 이름을 적고 같은 자음과 모음을 지워서 남는 것을 세어서 이유형에 맞추는 것이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따르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이면 다시 좋아하는 것이다. 그 당시 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던 것이 떠오르며 첫만남에 선생님과 내이름은 6의 숫자가 나왔다 아득히 먼 기억 속에서 지난날을 떠오르며 그 때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 되어지며, 아름다운 시간의 흔적으로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은 인생의 여정에서 영혼의 맑음과 순수함의 시절이 였기에 마음의 파장상태가 지속되는 것 같다.
유리창 밖에 서 있는 그대 1998
유리창 밖에서 보이는 그 사람
느낄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바라볼 수는 있다.
안에서 보는 나
밖에 서 있는 그대
아주 가까이 가서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차가운 감촉이 느껴져 온다.
소리 내어 불러 보아도
유리창 밖에 서 있는 그 사람은
거기 그대로 서 있다.
사랑, 그리고 서글픔 1998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를 찾기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시간, 마음, 용서, 미움, 기쁨, 불안, 후회, 사색……
하루에도 수 없이 일어나는 마음의 소용돌이
그 속에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고 있다.
자의에 의해서든지,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든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의해서 주어진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사랑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것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가야 한다.
끝없이 맑고 파란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기에 수채화 물감을 풀어서 큰 붓으로 칠한 듯 투명하다. 단풍들은 어느새 잎들을 형형색색의 색채로 물들여 버렸나, 우리네 인생살이처럼 유아기의 연두색 새싹에서 청년기의 무성한 초록 잎, 그리고 중년의 여러 모습처럼 노랑, 주황, 붉은색 한 잎에 이 빛깔을 다 가지고 있는 단풍들이 푸른 하늘과 잘 어우러져 이 가을을 수를 놓고 물들이고 있다. 매 주마다 가족들과 허드슨 강줄기에 있는 여러 빌리지 페스티벌과 박물관, 유적지를 찾아 다녔다. 지난 주말에는 NYS Thruway Brotherhood에 이름난 Winery로 갔었다.
일주일 사이 산등성이 나무들이 붉다 못해 검붉게 타고 있으며 유유히 흘러가는 허드슨 강 물결이 마치 풍경화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멀리서 고풍스러운 빨간 벽돌집과 나무로 만든 큰 술통이 집 문패로 보인다. 1839년에 생긴 뉴욕주에서 제일 오래된 포도주 제조장답게 세월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조그만 갤러리에 전시된 지방 화가들의 소박한 그림들이 정겹게 다가온다. 안내자와 함께 모여서 지하실로 내려가니 바깥 온도와 달리 서늘하고 침침하며 온통 집채만한 술통들, 먼지 낀 와이병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슬라이드 필름으로 만드는 과정을 보고 창고에 몇 백년 묵은 포도주병들이 쌓여있다. 거미줄이 얽혀있고 녹슨 창살이 잠겨 있었다.
Wine tasting을 하기 위해 조그만 잔에 수십 종류를 부어준다. 최고의 상술 맛배기로 선전을 하여 원하는 것을 표시하라며 종이를 준다.
남편은 운전을 하기에 나보고 맛을 보며 살 것을 결정하라고 해서 진지하게 맛, 빛깔, 향기를 음미하였다. 아이들에게 Alcohol-free의 백포도주 Rosaria를 주는데 맛있고 달다고 한다. 선물가게에 들어섰는데 한글로 된 인삼 포도주 포스터가 붙어있고 몇 종류 전시되어 있었다. 델리 가게에서 인삼 껌을 봤을 때처럼 역시 고려 인삼의 효력은 세계적인 것 같다.
밖에서 들리는 음악소리와 테이블마다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먹는 소박한 농촌 대가족 식구들이 피크닉을 즐기며 쇼 진행자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무대 앞에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다시 살아온 듯 너무나 흡사한 모습이다. 딱 붙는 맘보바지, 귀 옆의 구렛나루 수염, 옆으로 입을 벌려 웃는 모습, 마이크 잡는 것 하며 이름 역시 엘비스라고 한다.
흥에 겨워 춤을 추는 노인들과 젊은 여인들의 어울림이 미국의 수평적 인간관계의 어울림을 보는 것 같다. 나무통에 포도를 넣어 맨발로 밟기 대회, 일불 속에 있는 번호 맞추는 게임도 다들 같이 한다. 축제 분위기에서 나와 한적한 풀밭에 앉았다. 아까 마신 와인의 취기가 오는 건지 기분이 센치해지며 이미 떨어져 퇴색되어 바랜 마른 잎들이 바스러지는 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오며……
바람결에 사뿐히 떨어지는 붉고 짙은 레드 와인 빛깔의 단풍잎을 주워서 수첩에 끼워 두었다. 얻어온 콜크 마개에 단풍을 새겨 스탬프로 찍어서 카드로 만들어 보고픈 친구에게 곱게 짙어져 가는 단풍 잎처럼 물들어가는 내 마음을 전해보고 싶다.
와인 맛처럼 가을의 빛깔과 향기에 취해 갔다.
Multi Media와 가정생활 1998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 상업광고의 문장이 다채로워지고 신세대 감각으로 획기적이며 다양해진 것을 볼 수 있다. 카피라이터 직업이 인기직종이 된 것이다. 잡지 역시 여러 분야로 전문 교양잡지에서 여성 월간지가 10여종 넘게 발간되고 있다. 미혼여성, 중년여성의 구분 보다는 십대, 미시족, 미즈, 싱글 3, 40대로 나뉘어 화려한 패션 감각과 인테리어 소모품, 결혼관, 직업관, 인생관, 성 지식 등을 과감하고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대학 시절 일본 잡지 논노, 엘르, 미국 잡지 보그를 사보던 시절이 이제는 지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경제상승으로 밀려오는 급변한 물질문명으로 인해 의식주의 발달과 고객취향이 높아진 점도 있지만 한국적 사고방식이 서구지향적이 되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일본 잡지의 뛰어난 사진술과 미국잡지와 제휴한 잡지들의 자유분방한 연애관, 전문직 여성들의 싱글의 화려함만을 미화시키는 점도 우려가 된다. 이곳에 사는 여성들이 더 보수적인 경향을 띠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가정 안으로 들어서는 수많은 문명 매개체를 어떻게 선택하느냐가 문제이다. 특히 자녀들에게 있어 무방비, 무법 시대이기도 하며 인터넷으로 침투, 방문 하나 닫고 그 속에서 일어나는 양상을 부모들은 그저 공부하겠지 하고 넘겨 짚는 것 보다 점검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 세대는 공부 할 때 음악을 듣고 한다고 야단하시던 부모님들의 성화를 다른 형태로 우리가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들이 부모가 되었을 때 또 어떤 양상으로 세대차이를 가질까? 궁금해 지기도 한다.
라디오 심야 프로를 듣고 팝송, 샹송, 칸소네와 접하게 되고 클래식 음악보다 더 많은 유행가 가사를 외우고 다음날 학교에 가서 친한 친구들과 지난 밤 사연과 음악 이야기로 우정을 돈독히 하였던 낭만이 떠오른다. TV는 60년대 어린이 프로가 5시가 되면 노래로 시작해 나오는 것을 흑백으로 보다가 70년대 AFKN에서 나오는 프로를 컬러 화면으로 접하였을 때 그 선명한 화면에 매료 당하면서 컬러 TV가 우리 생활 속에 보급되면서부터 옛날 영화를 흑백으로 볼 때 그 이미지가 더 선명하게 다가오고 작품사진을 대하듯 더 감명과 애착이 있는 것이었다.
우리들은 이런 문명의 발달과정을 생활 속에서 느껴보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이런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떤 절차나 과정이 없이 다 주어졌기에…… 그러나 공통점 한가지는 바보상자(TV)는 정보상자의 가정에서의 역할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다 같은 것 같다. 그저 넋 나간 듯 화면에 빠져 소파에 자석이 붙은 듯 떨어지지 않고 리모콘 때문에 채널을 돌리려 일어나지도 않은 채 TV를 보는 아이들을 대할 때 부모들 역시 그런 모습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가족들과 같이 즐길 수 있는 좋은 프로그램을 선택하여 간식과 함께 담소를 나누며 시청을 한다면 좋은 오락기구가 될 수 있겠지만 아이들의 베이비 시터로 전락해 버린다면 위험한 공해 도구가 될 것이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작년에 TV 프로를 등급으로 선별해 놓았지만 그 수 많은 채널의 전선을 막을 길이 없는 것이다. 적당한 기준을 두어서 아이들 수준에 맞게 그들이 선택한 프로그램을 보고 이해해야만 학교에 가서도 친구들과의 대화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부모가 되어서 규칙을 세워 지켜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아이들이 시사성에 익숙하게 하기 위해 뉴스를 보다가 자연히 그 다음 프로그램으로 넘기기에 큰 아이에게 알람이 있는 라디오를 사주었다.
아침에 알람 소리에 일어나 라디오 뉴스를 듣고 그날의 일기와 전날의 뉴스거리를 화제로 삼으며 아침을 먹는 아이가 대견스러워 나는 물어보았다. “리나! TV보다 라디오가 좋은 점은 무엇이니?” “다른 일을 하면서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고 숙제 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아이들에게 잔소리 안하고 지내면서 그 노래 좋으니? 물으면 엄마도 들어봐요 좋아하실거야. 하면서 노래의 제목을 가르쳐 준다. 난 속으로 안 듣고 하면 더욱 좋겠지만 TV를 앉아서 보는 것 보다는 상상력을 키울 수 있게 라디오를 듣는 것이 좋다고 생각이 든다. 나 역시 한국어 방송으로 가사일을 하면서 음식을 만들 때 들을 수 있는 음악과 세상사 이야기, 운전을 하면서 무료하지 않게 듣는 라디오가 있기에 각박한 이민생활에 정서의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멀티미디어의 최대의 효과를 가지기 위해 각자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 적절하게 활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생활도구가 되어 지배 당하지 않으며 사용 할 수 있는 것 같다.
학교 운동장의 밤 하늘 1998
어스름한 초저녁 노을이 대지 위에 깔리기 시작한다. 불그스레한 하늘에는 한 떼의 철새들이 수 많은 연속적인 점으로 무리를 지어 날아가고, 아름드리 고목의 단풍이 바람결에 떨어진다. 축구 연습을 하던 학생들이 잔디밭에 앉아서 코치의 설명을 듣고 관중석에 앉아있던 학부형들도 한 두 명씩 일어난다. 건너편 테니스 코트장에 오가던 공도 멈췄다. 응원 연습을 하던 음악소리도 어둠의 정적에 묻혀져 버렸다.
저녁 바람과 사라져 가는 운동장의 삽화가 가랑잎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가듯 흩어져 버린다. 붉은 벽돌 위에 붙은 전등이 일제히 켜지기 시작하며 악기를 들고 밴드실로 들어가는 학생들과 스쿨 버스를 타고 게임에 가던 학생들이 지친 듯 내리고 있다. 아이들이 하교 후 활동으로 일주일에 몇 번 데리고 다니면서 눈에 익은 장면들이다.
올 해 큰 아이는 고등학교에 가면서 테니스를 치고, 작은 아이는 치어리딩 연습으로 운동장과 친숙해졌다. 좀 전까지 유니폼을 입고 무리를 짓던 학생들이 사라지고, 어둠이 깔린 운동장은 정적으로 잠잠하다.
아이는 소리를 내어 본다.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춤을 추듯 돌기도 하며 뛰기도 한다. 아무도 없는 그 넓은 운동장이 무대처럼 보인다.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다가 잔디밭에 앉았다.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오래 전 그때도 이렇게 별이 반짝일 때…… 밤 하늘을 쳐다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하교 후 반 전체가 기합을 받고 교문을 나설 때와 교련훈련으로 늦게까지 남아서 연습을 하고 다음 날 비가 오길 기다리며 별이 뜨지 않기를 바라며 쳐다보던 하늘에 총총히 떠 있던 별들…… 지난 날의 밤 하늘 별과 가을바람은 시공을 초월하여 같건만 운동장과 부모가 된 후의 의미는 다르게 다가온다.
미국의 정신교육은 운동인 것 같다. 도덕과 윤리 정신도 운동의 소속팀과 협동심, 리더쉽에서 몸도 체험하여 배워 나가는 전인 교육의 현장인 것이다. 청소년 때 체력적으로 단련 시켜서 지성을 키워가는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저 하늘에도 슬픔이” 영화를 학교에서 촬영을 하고 나서 영화를 볼 때 그 슬픈 영화를 보면서 울면서도 가을 운동회 청, 백으로 나누어져 응원하는 모습과 엄마의 모습이 나올 때 즐거워서 소리를 쳤다.
30여 년 전 흑백영화의 영상과 학교 운동장에 바람이 일던 것이 눈에 선하다. 아이들의 초등학교 운동대회는 전 학년이 한 종목마다 참여해서 다 해보는 것이 주목적이기에 승부욕의 열기보다는 야외수업의 연장놀이인 공부로 보여졌다.
부모들은 선생님들을 도와주고 학교 잔디 밭 뒤편에서 바비큐로 핫도그를 구워서 점심시간 때 반 아이들과 같이 먹으면서 학년마다 다르게 만든 흰 티셔츠의 그림과 염색이 든 디자인이 검정색 반바지 한국의 가을 운동 대회의 아스라한 그리움과 함께 낯설게 느껴지는 황량함이 다양한 티셔츠의 색상처럼 가슴속을 물들였다.
차갑게 밤공기가 몸을 움츠리게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걸으면서 다가오는 학교 건물이 내 마음의 무게처럼 눌려 오는 듯 하다. 학교 뒷문 타운 도서실의 불빛이 새어 나온다. 정겹게 느껴지며 딸 아이의 손목을 꼭 잡고 걸으면서, “그래! 이렇게 이어져 가는 거야!” 서로 다른 운동장이지만, 지금 우리는 유년의 숲 속으로 이어져 가고 시간의 강은 우리 사이로 흘러가는 물 소리처럼 가을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Maybe 1998
I ask an acquaintance.
Are you staying here?
Maybe……
The acquaintance asks me.
Are you staying here?
Maybe……
We all live here as if it were not our home,
Someday hoping and thinking that
There is a place somewhere that we can go back to.
Not even knowing where we want to go.
Where is that place we long for?
Living life is but all the same.
Why is that we can not forget the other place?
Always longing for a faraway and unknown world
We live on keeping our home country
Close to our hearts.
때때로 비 그리고 흐리고 맑고 개임 1998
어디서부터 기억 되어져야 할까요? 우리의 만남을 그리고 끝남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아요. 사랑이 떠난 그 자리도 사랑의 연속 인 것을, 떨어져서 언제까지라도 이대로 이렇게 그리워 한다는 것도 그 시간의 흔적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것도 승화된 한 부분을 가슴속 깊은곳에서 언제나 함께 한다는 것이 인생을 풍부하게 살아가게 하는 젊은 날의 초상을 기억 한다는 것, 애틋한 삶의 한 부분 이라는 것을 남은 세월의 시간도 간작하며 지내려 합니다. 한 때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못하고 헤어지는 일이라고 아픔을 견디다가 힘들어 했지만, 감미롭고 순수했던 순정의 시절 짝사랑의 애달픔을 지니고 맨 처음 이성이라는 존재에 눈을 뜬 그 존재를 의식하게 해준 여러 애정의 증세와 문학과 예술에 대하여 많은 영향을 준 그분을 만난것과 이루어지지 않는 그 만남을 소중히 간직하는 것 조차 축복이었다는 것을 모든 기억들이 푸른 날개 짓을 하며 다시 일어 납니다.
오월의 봄은 사춘기 소녀에게는 마음을 진동 시키기에 완벽한 자연의 아름다움의 배경으로 충만한 나날이었다. 피어 오르는 꽃들과 신록의 푸르름과 지저귀는 새소리는 생의 환희를 노래 부르는 듯 다가왔다. 미술과 교생실습으로 나온 졸업반 미대생 교생선생님으로 첫 대면이 주어 졌다. 처음 본 순간 나의 가슴은 연분홍 빛으로 물들어 갔다. 동경의 대상 미술학도와 외모에서 풍기는 일반 교사들과 달리 신선함과 약간 긴 머리와 젊은 감각의 옷차림이 우선 시선을 머물게 하였다. 부드러운 목소리의 울림 가끔 애수 어린 눈동자가 눈이 마주칠 때 강한 빛을 느꼈다. 이상형 그 자체였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이 크나큰 비밀을 어떻게 감당을 할 수 있을까?
어린 소녀의 가슴은 지진과도 같은 진동으로 다가왔다. 열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주위의 그 모든 것의 의미가 다르게 받아졌다. 열병을 앓기 시작하면서 주위의 그 모든 것의 의미가 다르게 받아졌따. 오로지 관심의 대상은 내가 그분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 그것이 최대의 목적이었다. 말이 적어지고 친구들과의 이야기 중에도 먼 곳을 응시하며 넋이 나간 듯이 온통 머리 속을 첫인상의 모습을 그리곤 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생각 같이 있는 순간만을 상상하다가 괜스레 웃음이 나 곤 했다. 수업시간에도 창가를 바라보고 가방속에는 연애소설과 시집을 넣고 다니며 쉬는 시간에 탐독을 했다. 내 마음의 증상들이 책 속에 있고 길도 주어지리라 믿었고 무엇보다 내 심정의 나열들을 읽으며 주인공이 된 듯 빠져들었다. 가슴 앓이는 갈수록 더하고 식욕은 떨어지고 잠도 잘 이룰 수 없고 가족들은 봄을 탄다고 크려고 그런다고 도리어 나를 위로해 주었다. 조숙한 소녀의 가슴은 봄날과 함께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교내 복도에서 부딪치면 가벼운 목례인사를 하면서도 가슴이 울렁거리면서 몸은 굳어져 왔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미술실에 가서 우연한 만남을 만들며 주위를 맴돌았다. 그것만이 유일한 만남의 확인 이었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날이 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미술 실기대회가 경복궁에서 하게 되었을 때 미술부 반장으로 그림수거를 하면서 뒷정리를 도와 주게 되었다. 내 그림을 보여 달라고 하시면서 칭찬을 해 주셨다. 재능이 있으며 계속 열심히 그리라고 하시면서 칭찬을 해 주셨다. 재능이 있으며 그리라며 풍경화의 원근법과 수채화기법 물감의 농담을 가르쳐 주면서 미술전집을 보여 주시겠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많은 감상을 하듯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명곡을 들어야 한다면서 끊임없는 노력만이 좋은 작품을 할수 있다고 하셨다. 그때 가까이 다가 섰을 때 풍겨오던 내음 셰이브로션의 체취가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최초의 남성의 향기로 기억 되어 진다.
본부석에 그림을 갖다 주고 걸어 나올 때 한산해진 고궁은 마치 우리의 만남을 위하여 준비된 것 같았다. 교생과 학생의 사이를 범어서 여인으로 둘만이 걸어 본 고궁의 산책 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그 감동을 억누를수 없어서 일기장에 쓰면서 미래의 꿈을 꾸었다. 그림을 그리리라!!
화가가 되어야 만이 만남이 지속되고 그길만이 사랑의 환성이라고 마음을 다짐하여 굳혔다 거울을 볼 때 마다 단발머리가 원망스러웠고 교복만이 내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안타까웠다. 성숙해져 가는 여성스러움을 보여 주고 싶었다. 수줍게 웃어 보면서 거울 속에서 그 분의 환영이 보이는 듯 했지만, 슬픔의 비애가 스쳐 감을 느꼈다. 온통 가득히 얼굴과 목소리가 투명인간이 되어 내 주위에서 맴돌았다. 가만히 누워서 그리다가 잠들고 깨어나서도 떠오르는 모습 드디어 상사병 난 것이다. 매사에 흥미가 없어지고 만나고 싶다는 열정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10살의 나이차이와 학생과 교생선생님으로 사제지간이니 넘을 수 없는 벽 이었다. 머나먼 미지의 상대이기에 더욱더 간절함이 더했다.
그리고 몇 주 후면 대학으로 돌아 가고 만날수 없다는 절박함이 우울하게 만들었다. 특별활동 반 미술부 모임이 방과후 미술실 에서 있어서 석고 뎃상을 하게 되었다. 종례가 끝나기만 기다렸다 4층 미술실로 달려갔다.
어느날 내가 맨 처음 오게 되고 선생님이 혼자 계셨다. 나를 쳐다보시더니 옆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며 이름도 참 이쁘고 좋다고 하시면서, 연꽃은 환생의 상징으로 진흙 속에서도 오묘한 빛깔로 피어나며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고고하게 피어나며 연꽃의 작설차 향기는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주며 신성스러운 꽃으로 동 서양 화가들이 많이 주제로 다루었다고 하시며, 모네의 대작 연꽃 시리즈는 서양화면서 동양화 붓터치가 있으며 모네가 마지막까지 다루었듯 연꽃을 빛의순간 포착으로 잘 표현한 작품이라며 대가의 그림이라고 화집을 보여 주셨다.
뎃상을 하면서 기쁨에 들떠 목탄을 부러뜨리고 지우개로 쓰려던 식빵이 온통 땀에 젖어 뭉개져 버렸다. 줄리앙의 석고는 내마음을 아는지 입술선 이 그날 따라 입술이 위로 올라가서 미소를 보내는듯 보였다.
석양이 질 무렵 미술부 원들과 교정을 나올 때 우리들에게 언덕 위에 붉은 노을을 보라고 하시며 주홍빛 노을은 먼지의 반사로 색이 주어지지만 얼마나 다양한 색감이 하늘에 있는가를 보어여 한다고 늘 자연을 보면서 색을 느끼고 캔버스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나에게만 들려주시는 말씀처럼 노을 빛은 그 순간 마음을 온통 물들이게 하였다. 그 날밤 부치지 못하는 편지를 밤새 끄적거리다가 일기장 속에 묻혀 버렸다. 다음주면 교생실습기간이 끝나는 날이 온다는 절망감으로 가득 차 버렸다. 학교에서 인기 투표를 하였는데 역시 1위였다.
모든 학생들에게도 인기 만점인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마지막 수업이 있는 날 학생들에게 선물과 편지를 받고서 그 보답으로 미술부 원들과 야외 스케치를 가자고 하셨다. 미술선생님도 승낙을 하셨고 모두들 좋아했다. 교복을 입지 않고 만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이 부풀어서 어떤 옷을 입을까 고심을 했다.
70년대로 최신휴행 나팔바지와 짝 붙는 티셔츠 모자 구두는 언니에게 빌리고 도마핀대신 색핀으로 하고 미술도구가 들어갈 가방까지 준비하였다. 거울 앞에서 입어 볼 때 언니가 들어와 보더니, 그림 그리러 가는 거니 옷자랑을 하는거니 핀잔을 주면서 누구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같이 가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웃으며 하는 말 나도 너 나이 때 그랬어 그 누군가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팔청춘이지, 그때는 플라토닉 러브로 정신적인 생각을 하기에 괴로웠는데 지나고 보니까는 그때가 그립고 아름다웠던 시절 이었어 이루어 지지 않기에 첫사랑으로 기억되어지고 연연해 하곤하지 그런데 누구니? 머뭇거리는 나를 보더니 “한때야 한때” 하며 문을 닫고 나간다.
갑자기 모든 것이 허망해졌다. 그럼 모두들 다 이런 과정을 스치고 가는 걸까 특별히 나한테 주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 누구나 겪는 사춘기의 열병일까? 혼돈속에 절대로 평범해서는 안된다는 예술가적 기질은 남과 다른 것이라고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토요일 밤부터 내리는 비는 줄기차게 창문을 두들기며 내렸다.
일기 예보는 일요일은 “때때로 비가오며 흐리다가 맑고 개임” 이라고 하며 우산을 준비하라고 했다. 걱정이 되어 선생님께 전화를 하니 전화선을 통하여 울리는 웃음 소리는 내 귀 전전을 울렸다.
“때때로 비 흐리고 맑고 개임” 을 들으시고 인생살이 바로 그런 것이라며 푸른 하늘 보다 비 개인 하늘의 변화 무쌍한 하늘을 볼수 있어서 더 좋다고 하시며, 약속은 약속이니 비와도 덕수궁 앞에서 다 모이라고 부탁하셨다. 초 여름의 소낙비는 밤새 내리더니 초록 잎들은 싱그러움을 더해 가고 이슬을 머금은 듯 피어난 꽃들도 만발하였다. 다음날 아침 부산하게 준비하며 가방과 이젤 때문에 우산을 가져가지 않는다고 엄마에게 말하며 내심 선생님과 비오는 거리를 한 우산을 쓰며 걷는 것을 떠올랐다. 덕수궁에 도착을 하니 학생들과 선생님이 보이며 그 뒤에 긴 생머리의 날씬한 몸매와 세련된 여대생 눈에 들어와 박힌다. 아이들은 수근거리며 선생님의 애 인이라며 한 쌍의 멋진커플이라며 부러운 듯 쳐다보곤 한다.
갑자기 모든 희망은 사라지고 꿈은 깨어지고 산산조각이 나며 거미줄처럼 얽히었던 질투심이 쏟아 났다. 학교에서도 무용선생님과 친하다는 소문 하교 후 교정을 같이 걸어 나오시던 모습을 보며 가슴 절였던 그 고통보다 더 진하게 현실로 다가오는 이 배신감을 억누를수 없는 비애감으로 휩싸여졌다. 안색이 창백해지고 식은 땀이 흐르고 급기야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모두들 놀라서 괜찮냐고 물어 온다. 선생님이 다가와서 어제 일기예보 때문에 너무 걱정해서 잠을 잘 못잤구나 하시면서 이마에 손을 대어 보더니 열은 없으니 걱정하기 말라고 웃으신다. 그 미소가 나에게는 더 아픔으로 다가왔다.
여리고 여린 내 가슴을 그렇게 모를 수가 있을까? 무정한 선생님 온갖 유행가 가사가 떠오르며 분수대 앞에서 스케치를 하는둥 마는둥 끝내고 이젤을 접으려고 할 때 멀리 서 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벤치에 가서 앉아 있으니 옆에 오셔서 스케치북을 들춰 보시면서 드로잉에 균형감각이 있다고 하시며 예고에 가기 위해서 더 많은 연습이 필요 하다며 나에 대해서 담임 선생님께 들었다고 하시며 여름방학떄 선생님의 아뜨리에 놀러 와서 배워도 된다고 하시며 약도를 그려주셨다. 병주고 약주고 그때 그 말이 떠올랐다.
한 가닥 희망을 품고 만남의 음모를 위해서 부모님께 광화문에 다니던 화실보다는 담임선생이 진학 상담에서 권하시는 개인지도를 할수 있는 안국동 로터리에 있는 선생님의 아뜨리에를 여름방학때 다니기로 하였다.
선생님이 떠난 교정은 쓸쓸한 빈 터 였다. 어디서나 선생님의 흔적이 있었고 미술실도 가기 싫었고 낙서와 독서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태양열이 작열한 찌는 듯한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하복 입기만을 기다렸는데 8월은 그렇게 다가왔다.
처음 아뜨리에 가던 날의 슈베르트 세레나데의 감미로운 선율의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오일 페인팅의 기름냄새가 나며 커피의 진한 향이 배어 나왔다. 구석에 놓여진 기타와 레코드판이 보인다. 광화문 화실의 여러 개 이젤과 석고상의 나열과 채색의 구성 그림 뎃상 일률적인 화실모습이 아니라 화가의 스튜디오 인 것인가. 쌓여있는 책들과 도자기에 꽂힌 수십개의 붓들 벽면을 채우는 큰 캔버스 여러 도구들은 작가의 내면을 보는 듯 흥미로 왔다.
몇 개월사이 변해진 모습은 수염이 난 턱과 더 길어진 머리 때문에 더욱더 멋있어 보였다. 진지하게 작업하시는 모습은 나의 가슴을 뛰게 하였고 가르쳐 주실때의 엄격함과 진지함은 존경심으로 다가섰다. 선생님 집안이 화가인것과 겨울에 유학을 간다는 것을 친구분을 통해서 들었다. 나를 동생처럼 대해 주시며 친구들에게 소개도 해 주시고 선생님이 떠나서도 잘 부탁한다고 하셨따.
드라마 센터에서 본 연극, 프랑스 문화관이 가까워서 자주 가서 본 흑백영화 미도파, 신세계 안국동 화랑의 전시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작품세계와 작가 설명을 해 주시곤 했다. 성장기 감성세계에 큰영향을 준 계기가 된 것 같다. 예술의 깊은 안목의 눈을 키우게 되었다.
거리를 온통 풍경화로 바뀌어 버린 아뜨리에 창가의 은행나무 고목의 노랑 잎들이 수북이 쌓이는 우수의 가을도 지나갔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날에 선생님은 유학길을 떠나쎴다.
그렇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만남은 끝이 났다. 나의 감정의 기복은 승화되어서 아름다운 사춘기 시절의 어설픈 에피소드가 아니라 글과 그림으로 인생을 표현하게 하는 심미안적인 눈을 길러 주신것이다. 그때 나는 모든 인간 관계를 5가지로 나누어서 좋. 싫. 따. 사. 미 로 정하에 이름과 이름을 적고 같은 자음과 모음을 지워서 남는 것을 세어서 이유형에 맞추는 것이다.
좋아하고, 싫어하고, 따르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이면 다시 좋아하는 것이다. 그 당시 학생들 사이에 유행했던 것이 떠오르며 첫만남에 선생님과 내이름은 6의 숫자가 나왔다 아득히 먼 기억 속에서 지난날을 떠오르며 그 때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 되어지며, 아름다운 시간의 흔적으로 마음을 머물게 하는 것은 인생의 여정에서 영혼의 맑음과 순수함의 시절이 였기에 마음의 파장상태가 지속되는 것 같다.
유리창 밖에 서 있는 그대 1998
유리창 밖에서 보이는 그 사람
느낄 수도 만질 수도 없지만
바라볼 수는 있다.
안에서 보는 나
밖에 서 있는 그대
아주 가까이 가서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차가운 감촉이 느껴져 온다.
소리 내어 불러 보아도
유리창 밖에 서 있는 그 사람은
거기 그대로 서 있다.
사랑, 그리고 서글픔 1998
보이지 않는 것에 의미를 찾기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시간, 마음, 용서, 미움, 기쁨, 불안, 후회, 사색……
하루에도 수 없이 일어나는 마음의 소용돌이
그 속에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고 있다.
자의에 의해서든지,
타인으로부터 주어지든지,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의해서 주어진다.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사랑 바로 그것인 것이다.
그것을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가야 한다.
여름 1998
강렬한 햇살이 눈부시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피어 오르는 붉은 다알리아 꽃송이
여름은 이렇게 타오르고 있다.
대지 위에서 뿜어대는 저 열기를
그대는 느끼고 있나요?
초록으로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일고 있어요.
작렬하던 무더위 속에서
농익은 남미 과일처럼
터질듯한 몸매를 한 스패니시
여인의 향내가 코끝을 스쳐간다.
정열적인 젊음이 밖에서부터 안으로 일어난다
여름은 이렇게 나로 하여금
진한 열정을 갖게 하는가
Love and Sadness 1998
No one can take the meaning of invisible thing without effort.
Time, heart, forgiveness, hate, pleasure, nervous, regret, and thought
Tornado of me heart occurs numerous even in a day
Feeling happy and unlucky everyday
Not knowing we get it by ourselves or others
It is given by only solely one mind
It is love that touch the heart
To know it needs long time
Mountains 1998
There has been a mountain in my heart from sometime
It contains stern, steep, and grand one
Forest, falls, and birds
Mountains make me be gentle
Mountains often make me pass away high hills
It makes a beautiful sound-
Over echoes through deep valleys
I saw streams flow
There was everything in it
The mountain is in my heart
싱그러운 유월 그리고 전쟁의 흔적 1998
초록으로 우거진 숲 사이로 바람이 일고 햇살이 눈부시게 푸른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 대지 위를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로 만들었다.
갖가지 꽃들이 총 천연색의 색감을 그려내며 터지는 꽃망울의 분홍 장미 송이가 미소를 머금고 키 큰 진 보라 빛 난초 옆에 노랑 빛 펜지 꽃들이 어울려 피어난다. 사계절의 중간 지점에서 마치 인생 절정기인 청춘을 노래하듯 지저귀는 새소리, 품어대는 꽃 향기 내음 속에서 열정의 지난 날들을 그리워한다.
순수하였기에 낭만의 꿈을 동경하며 그 때의 모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유월이 오면 마음 한 구석에는 암울했던 지난 시절의 이야기가 스쳐 떠오른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이지만 유년시절 선생님들이 들려주시던 이야기, 영화와 책에서 읽었던 6.25사변……
동족상잔의 비극을 읽고서 애국심은 반공, 방첩으로 정신무장을 하며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의 이념도 모르면서 빨갱이는 붉은 옷을 입고 험악하게 생긴 괴물로 상상을 하기도 했다.
북한 여자아이들의 빨간색 리본이 단발머리에 꽂혀있는 것에 유난히 시선이 더 가는 이유는 붉은 기운의 에너지를 사상운동의 시각적 효과를 더 해주는 듯싶다. 지난 해 New York Times의 10대 뉴스 사진에서 본 흑백 사진 두 장이 떠오른다. 고층 빌딩 앞에 흰 와이셔츠를 입은 남한의 실업자 모습과 영양실조로 뼈마디가 드러난 몰골에 앙상한 손, 눈동자만이 반짝이는 북한 아이들 사진은 시사성 초점과 흑백의 여백이 강렬하게 부각되어서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한국전, 미군 종군 사건 기자들이 찍은 흑백 필름으로 TV에서 본 유엔군들과 피난민 대열에서 길을 잃고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에서 이산가족의 슬픔이 베어나기도 한다. 이웃에 사는 John이라는 할아버지는 한국전 역전의 용사처럼 전쟁 때의 무용담을 이야기 하신다. 서울과 근처 도시명을 기억하며 달라진 폐허의 거리를, 이민의 성장이 빠른 것을 놀랍다고 하며 전쟁 중에 만난 여자친구 ‘자야’ 가 그 때 18세였다고 한다.
애잔한 사랑 이야기 보다는 마담 버터플라이, 미스 사이공처럼 비극의 주인공 ‘자야’ 가 떠오르게 된다. 전쟁이 끝이 난지 반세기가 넘어가면서 입양되었던 고아들과 혼혈아들이 성년이 되고 자신들의 Identity를 찾기 위해 한국 방문을 하기도 한다. 가슴 속 깊이 분단 조국의 상처와 전쟁의 흔적이 남아서 민족의 한이 되어 통일의 염원을 되새기며 싱그러운 유월은 초여름의 길목에서 예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이렇게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겨울 숲 1998
바람이 일고 있다.
세차고 혹독하게 숲 사이에서 불어서 가슴을 시리게 한다.
겨울의 차가움과 매서움은 거리를 누비며 한기를 더해준다.
만난 것도 헤어짐도 아닌 연속성 속에서
지속적인 순간의 만남을 우리는 향하여 질주를 한다……
멋진 신세대 할머니 1997
저물어가는 황혼의 아름다운 석조를 바라본다. 노을에 붉게 물들어가는 숲 속의 노목들 사이로 석양이 걸쳐져서 어스름한 거리를 비춰준다.
인생에 있어서도 가장 열정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세대는 노년기에 접어든 분들이시다. 세월의 강물 위에 희로애락, 생로병사를 다 흘러 보내고 지혜로서 자신들의 시간을 엮어나가시는 노인들이시다.
뉴저지 YWCA 그레이스 아카데미 시니어 센터에서 미술반을 맡으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굽이치는 한국의 현대사를 살아온 역사의 증인으로 역경의 세월을 다 지내고 다시 미국에서 생의 마지막 장을 보내시는 그분들을 가르치면서 늙는다는 두려움은 사라지고 진정 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
유엔이 정한 올해는 “세계 노인의 해”. 노인이 사회의 문제화 되는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법중의 하나는 모든 세대들과 더불어 사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인 것 같다. 노인의 홀로서기와 독립적인 생활을 위한 것들 중에는 그들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다양한 사회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시니어 센터에서는 헌신적으로 봉사하시는 마 교장 선생님은 내과 의사로 지내시다 정년퇴직을 하시고 나서, 전문직 경험을 살려 노인건강 문제를 돕는 일을 운영하신다. 인생의 남은 힘을 다해 몸과 정신의 균형적인 조화를 몸소 추구하시고 또 추구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 연세에 할머니라고 하기엔 너무나 고우시고 겸손하신 분, 바느질을 촘촘히 잘 하시는 분, 춤과 노래로 흥을 돋게 해주시는 분, 재치있는 이야기로 모든 분을 즐겁게 해주시는 분, 빵 꽃을 한 손으로 잘 빚는 분, 10년만에 상봉하는 할아버지를 그리며 카드를 만드시며 소녀처럼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부끄러워하시는 모습……
이 모든 분들의 모습이 우리 한국 어머니의 모습이시다. 일주일에 한번 수요일의 수업을 기다리시며 손자들의 베이비시터 가사일을 도우시면서도 힘이 나신다고 하시면서 한 학기 동안 만드신 작품들을 정성스럽게 상자에 넣으며 선물 살 걱정이 없다며 흐뭇해 하신다.
수공예품을 하게 되면서 늘 무언가 만드실 생각을 하기 때문에 치매예방이 된다며 의학정보 지식을 몸소 생활화하시는 그분은 아주 열의에 찬 수업을 하신다. 지난 시절, 가정에서 사랑으로 희생하셨던 그 저력으로 여름방학 기간에 동양화, 고전무용 등을 배우시면서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가진 분들이시다.
경험에서 묻어 나오는 말씀 속에서 세대간에 이어져가야 하는 문화의 선구자라는 것을 알게 한다. 사랑하는 아들을 가슴에 묻어 먼저 보내고 나서 남은 생애를 어떻게 지내는 것이 진정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에 이르러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을 자각하시고, 인생드라마 마지막 노년기 풍성한 삶을 열연하시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나 청춘의 한 시절이 있었듯이 지금도 꿈과 생애의 불꽃을 피우고 있는 한, 이 시대의 신세대 할머니이신 것이다.
오목과 볼록 렌즈 1997
작년 봄 독일을 갔을 때 뮌헨 대학교의 현대 미술 전시를 보러 갈 기회가 있었는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있었다. 작품의 소재가 오목 렌즈와 볼록 렌즈였다. 그 상징적인 면은 남과 여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우리 부부의 성격을 표현한 것 같아서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 후 남편과 부딪히는 문제가 있을 때 나는 혼자 여행 가서 본 전시회장의 그 작품을 연상하며 극과 극의 형상의 모습이 맞물리는 순간의 일치가 되기 위해 거치는 과정이려니 생각하며 나를 진정시킨다.
극과 극은 일치된다는 것을 십오 년이라는 결혼생활 끝에 터득한 결론이다. 남편과 나는 매사가 반대이다. 의, 식, 주부터 예를 들라면 나는 옷을 살 때 디자인, 시간, 장소, 목적 등을 생각하며 잡지와 책을 읽어서 미리 한 시즌 앞 선 유행품목을 알고 나서 선택을 하니 시간이 걸리고 신중해진다. 남편이 보기에는 실로 한심한 시간낭비로 보이는 것이다. 한국의 교복 문화에 젖은 그가 직업 역시 흰 가운을 입으니 사복(?)에 관심이 없고, 환자들을 진료하기에 고급 옷 역시 취향이 아닌 것이다. 안경도 늘 끼던 것, 편한 것, 나사가 떨어져도 그 부분을 붙여서 쓰고 다닌다. 서로 이렇게 관심사가 다른 것이다.
남편은 새 생품의 차, 오디오, 컴퓨터, CD tape를 편집광적으로 애착을 가진다. 거기에 관한 잡지도 구독해 본다. 반면 나는 기계며 전자제품에는 전혀 문외한이며 흥미가 없다.
식성 또한 나는 생선 류, 남편은 고기와 찌개 류이다. 매 식사 시간마다 기호 식품이 달랐으니 신혼 초 무척이나 힘들었던 문제였다. 외식을 가더라도 나는 늘 새로운 것, 맛 보다 분위기 위주이지만 그이는 늘 먹던 것, 다니는 곳에서 편하게 먹기를 원해서 아직 남은 숙제이다. 두 사람의 의견 차가 있을 때 아이들의 선택권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괜찮은 방법이기도 하다.
레지던트를 끝내고 집을 보러 다닐 때, 나는 고풍스러운 스타일, 빅토리안, 콜로리얼, 잉글리쉬, 튜터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꿈은 사라지고 지금 사는 이 집으로 처음 보던 날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렸다. 새 집이어서 고칠 것이 없고 깨끗하고 편리한 점, 즉 실용적인 면이 강하게 움직였고 운치와 분위기로 집 안을 엔틱으로 꾸밀 나의 생각은 사라진 것이다. 이 때에 얻은 교훈은 ‘인생은 선택’이다. 그러나 그 어느 선택도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일장 일단. 이것이 아니면 저것인 것이다. 그러니 일단 선택을 내린 결과에 최선을 다하고 비교의식 없이 충실하게 내린 선택에 만족하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모든 의식 구조가 다른 남편과 나는 6년이라는 연애기간이 있었다. 중매란 모든 조건이 우선적으로 맞아야 하지만 연애란 감정의 화학 반응, 사랑의 감각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부모 형제들과도 의견 차이가 있는데 하물며 20여년간 다르게 살아온 남녀가 한 가정을 꾸미고 사는데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연애시절의 열정, 서로가 매료되었던 그 점이 결혼 후 단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남편의 해박한 지식과 의학도의 청결함과 이지적인 태도가 결혼 생활에는 나를 숨막히게 답답한 점이기도 했다.
나 역시 늘 가꾸고 치장하는 것에 바쁜 이민 생활에는 사치로 보여질 수 있는 점이기도 하듯이 말이다. 만장일치 모든 문제 없이 의견이 잘 맞게 살아도 무료한 삶일 것 같다.
물질만능에 젖어 모든 것이 갖추고 결혼하려는 요즘 걺은 세대들이 신혼 여행때 헤어져 그 길로 이혼하는 경우도 허다한 요즘 그 본질적인 문제는 어려움 없이 자라온 선남선녀들이 지기 싫어하고 자기주장이 세고 무엇보다 이해심이 부족해서 오는 결과인 것 같다. 철저한 개인주의 그렇게 부모들이 키워온 결과가 아닌가 싶다.
연애결혼 이었기에 크게 다투고 나서도 집 안에 알리지 못한다. 내가 택한 사람이며 나의 선택이었기에 나는 거기에 대한 책임을 환수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인으로서 부모인 자들이 감당 하여야 할 성숙성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나름대로의 부부관, 철학관도 가지며, 오목과 볼록이 되어 한 마음 한 몸이 되어간다. 아이들도 만들었으니 말이다. 창조자의 기쁨은 그 어느 것에 비길 수 있겠는가! 이제는 눈 빛만 보아도 목소리의 억양만 들어도 남편의 심중을 다 헤아리게 되었으니 산다는 것은 서로 길들어져 간다는 것 같다.
남편은 아직도 나를 처음 만났을 때 19세 소녀로 나를 대할 때 20년의 세월이 흘러 중년 부인이 된 나의 모습을 어리게만 보는 것이다.
서로 이렇게 다르기에 상대방에게서 자신에게 없는 점을 보안하며 의지하며 살아가는 위안도 갖게 되었다. 아직도 멀고 먼 인생의 산고개가 남아 있으니 그 삶의 여정을 지난 날 미숙했던 점을 이제 연륜을 닦은 이들의 자세로 느긋한 마음으로 각기 다른 음의 옥타브의 불협화음을 조화 있게 연주하며 서로 다른 색깔의 모습을 색의 혼합으로 아름다운 우리들만의 미의 혼합색 을 만들어 인생의 캔버스에 그려나가고 싶다.
저 창가의 앙상한 겨울 나무 가지들이 나상의 모습을 보면 큰 버팀목위에 가지들이 연결되어 아름드리 나무로 뻗어나가는 형상이 겨울 나무에 다 나타나는 것이다. 울창한 나뭇잎이 달려있을 때 보여지지 않는 가지들이 이 겨울에는 다들 나는 것이다. 마치 노년에 얼굴모습에서 지난 날 살아온 모습을 그려내듯이 말이다. 지금 부터라도 가지치기한 양분과 햇빛을 받아 쭉쭉위로 뻗어나가는 거목들처럼 성장하고 싶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인 것처럼 죽어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미래로 향한 나의 열정을 이 순간 매사에 충실히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나의 가지들이 이 미국 땅에서 뿌리내리고 살기에 나의 삶이 그들에게 좋은 롤 모델의 본보기가 되어주고 싶다. 가정의 화목에서 사랑을 배우고 꿈을 먹고 자라나는 우리 자녀들에게 늘 가슴에 자리잡은 추억의 박물관인 가정을 남편과 내가 잘 엮어나가는 부모가 되고 싶은 소망을 하여본다. 그러기에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행복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나서 실천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 이다. 오목과 볼록 렌즈처럼 부부란 두 개로서 반 씩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서 전체가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 여름의 열기 야구장 양키 스태디엄. 1997
야구장에 들어서자 현란한 선전문구들이 시야에 확장되어 들어온다. 관중석 인파들이 하나의 점들로좁혀져 온다. 인상파 정묘법의 대가 쉬리의 화풍으로 시각의 리듬으로 물결치듯 야구장은 열기로 꽉 차있다.
노랑 빨강 흰색 옷들의 색들과 인체와 머리색도 그 속에 묻히고 색상의 점들로 찍혀져 보인다. 차져가는 점. 점들의 틀 속에 메꾸어져 들어가고 인파의 물결들이 흐른다. 한 무리들이 줄지어 들어온다.
회색 양복 정장의 신사복 깔끔하게 차려 입은 남녀들. 직장에서 단체로 온 젊은이들. 양키 모자를 쓴 부자 옆에 갓난 아이 배내옷에 양키 문구가 쓰여있다. 가족 대대로 내려오는 열광 팬들의 여름 나들이이다. 흰 머리를 날리며 나온 배를 벨트에 감고 앉은 노인들. 십대의 한 무리 손에 야구 글러브가 쥐어져있다. 다양한 계층들, 간혹 긴 검은 머리의 동양 처녀와 미 청년이 어우러져 있다.
구수한 핫도그 냄새가 스며오고 판매원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땅콩을 까서 껍질째 먹으며 플라스틱 맥주병을 들이키고 솜사탕과 아이스크림 객석은 먹는 즐거움으로 차져 간다. 오래 전 기억인 서울 운동장야구장이 오버랩이 되어 떠오른다. 소주병과 오징어 응원단들의 외침소리 함성이 귓가를 두드린다.
7월의 여름 훈풍과 야구장 불빛이 있었지.
이 때 전철이 지나가며 가로등이 커지고 큰 스크린 화면 속에 야구팀들의 명단이 소개되고 미국 국가연주와 함께 게임은 시작되었다. 자발적인 응원대 한 마음 일치가 스크린이 리더가 되어 묶여져 있다.앞 줄 양키의 극성 팬들이 Let’s go Y를 선창하면 모두들 몸을 흔들고 따라한다. 줄무늬 선수복을 입은 선수들이 입장하고 지브라처럼 건장한 선수들이 스트레칭을 필드 저 편에 누워서 하며, 스포츠 마사지 해주는 사람은 마치 조각을 다듬는 장인처럼 몸을 다듬어 간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9명 팀 워크가 야구의 묘미이다. 삼박자의 호흡, 타자와 투수, 공의 유연성 변화구수 천 명의 시선이 그 공에 박혀있다. 홈런과 스트라이크, 피칭, 안타들이 경기를 주도한다. 상대방의공격을 위해 수비로 무장한 팀 스포츠이다.
미국의 교육에서 도덕 교육은 스포츠 정신에서 가르친다. 심신의 훈련, 협동심, 게임을 통한 훈련에서단련시키는 것이다. 전인 교육은 운동을 통해서 체력을 연마하며 저력을 키우는 것이다. 관중석에서 튀어나오는 욕설과 환호성이 뒤범벅이 되었다. 양키의 티노가 홈런을 날렸다. 열광의 도가니 속에YMCA를 부르고 스크린에 손을 흔드는 이들 공을 받으려고 글러브를 쥐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 LA 다저스의 박찬호가 있었다면 한인 응원팀은 어떤 노래를 하였을까?
4년 전 딸 아이의 반 학생 제프가 공을 잡아서 양키가 메츠에 역전승 하여 뉴스거리로 타운의 화제가되어 방송사들이 학교로 몰려온 적이 있다. 학교를 빠지고 야구장에 갔을 정도로 아이들을 매료 시키는야구 경기이다. 돈과 명예가 있기 전에 맹 훈련의 고충은 뒷전에 묻히고 눈 앞에 보이는 영광만이 보이는 것이다.
한 여름이 깊어가고 여름 방학 자녀들과의 삶의 현장 학습 놀이를 야구장에서 부모들 해보는 것도 미국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계절의 끝자락에서 1997
어느덧 숲은 물들어가고 계절의 끝자락에서 회상의 언덕 위에 서서 기억을 더듬어 본다.
늘 그러하듯이 매 해 형태는 달라져도 일어나는 일상사 속에서 펼쳐지는 번민과 감정의 소용돌이, 예상할 수 없는 미래는 새 나날들이 주어지는 듯 하지만 운명의 전주곡은 두뇌의 악보에서 저장된 기억의회로에서 작곡되어 연주 된다.
음률을 자아내는 것은……
매 순간 깨어나 하모니의 선율의 강하고, 때로는 약하게, 혹은 느리고 빠른 듯 느슨하게 불협화음을 조화롭게 다듬어가며 우연에서 필연으로, 인연의 곡으로 생은 마치 협주곡처럼 연주된다.
이렇듯 계절이 스쳐 지나가는 모퉁이에서 고운 연둣빛 새순에서 푸르고 푸른 초록 잎새로 이제는 진 자줏빛 그 붉디 붉은 낙엽이 주어지듯 가지에서 떨어져 황갈색의 마른 잎이 되어 흙 속에 묻혀질 때까지자연의 순환처럼 되풀이 되는 것이다.
다시 가지에 새 잎새를 돋기 위해서 반복 연주되는 생의 변함없는 대 서사시 사계의 교향곡이다.
지는 황혼의 아름다움은 대지를 진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발하는 노을의 햇살처럼 세월의 뒤안길에서이제 생의 마지막 장을 펼치시는 시니어 분들과 FGS 센터에서 동고동락을 몇 해 하면서 인생학교 4학년인 나는 5,6,7,8 학년들과 “배움”을 통한 중용의 미를 터득하게 되었다.
인생 학교는 입학에는 순서가 있어도 졸업에는 순번이 없다 하듯이 그분들의 모습 속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주름이 흙의 지층처럼 패이듯이 세월이 연마된 시간의 풍화 흔적이기에 빛나고 강한 금속처럼빛을 뿜으며 주위를 지혜로 밝혀주는 것이다.
말없이 행하며 보여 주시는 그분들을 대하면서 슬픔마저 기쁨으로 바꿀 줄 아는, 만들어 나가며 잃는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시며행복한 자는 자족하는 자이며, 주어진 자신의 길을 만족하며 항상 배우며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라며 삶은 되어져 가는 과정이기에 해나가는 순간의 그 과정을 최선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행하시며 솔선 수범 하시는 모습 속에서... 인생 학교 상급생 그분들을 만나게 된다.
팔순 생신 잔치를 하신 분은 매사에 인자하신 미소로 그래, 그렇지!, 그럼… 이 세 마디를 늘 하시며 모성애의 여신처럼 건강 비결 주문처럼 긍정적인 답을 해주신다.
8학년으로 교양과목, 운동을 매시간 즐기시며 집에서 손수 회원들의 점심을 위하여 밑반찬을 정갈히해오시며 바자를 위한 바느질도 하시며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시기도 하며 내 수업 아트 시간에 배운수채화를 그려서 집에다 걸기도 하시며 수업 시간에 해주시는 말씀에 색칠을 하고 붓을 잡으니 마음이편해지고 잡념이 없어져 아주 좋아. 하시던 말씀이 늘 여운처럼 들려온다.
나는 가르치기 보다는 그 분의 삶의 모습을 배우는 것이다.
추억이라는 상자 속에서 그 숱한 사연들은 애환의 빛으로 영롱함을 가슴에 담고 각자 고유의 빛깔로 자아내시며 이 시대를 같이하는 생의 선배님들 이시다.
“여보시오 청춘들아
네가 본디 청춘이면
난들 본디 백발이냐”
선로들의 노래 가락처럼 세월이 강물처럼 굽이굽이 흘러가듯이 물결처럼 생긴 주름은 시간의 무늬인것이다.
모든 것은 체험의 소산이기에 먼저 사신 그분들의 경험을 토대로 무엇이 진정 중요한 것인가를 들으며보아야 한다. 가까이서 그분들과 지내면서 일상 속에서 전달 되는 것을 습득하여 생활 속의 지혜로 이어져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각자의 고리가 탄탄해야 잘 이어져 엮어지듯이 가족의 끈 모두가 바로 서야 할 것이며 혼자태어나 혼자 가는 인생의 여로에서 서로의 길 벗이 되어주며 그 따스함의 온기가 퍼져서 온정으로, 사랑으로 가득한 이민사회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으로 환원하여 지
는 것이다.
강렬한 햇살이 눈부시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서
피어 오르는 붉은 다알리아 꽃송이
여름은 이렇게 타오르고 있다.
대지 위에서 뿜어대는 저 열기를
그대는 느끼고 있나요?
초록으로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일고 있어요.
작렬하던 무더위 속에서
농익은 남미 과일처럼
터질듯한 몸매를 한 스패니시
여인의 향내가 코끝을 스쳐간다.
정열적인 젊음이 밖에서부터 안으로 일어난다
여름은 이렇게 나로 하여금
진한 열정을 갖게 하는가
Love and Sadness 1998
No one can take the meaning of invisible thing without effort.
Time, heart, forgiveness, hate, pleasure, nervous, regret, and thought
Tornado of me heart occurs numerous even in a day
Feeling happy and unlucky everyday
Not knowing we get it by ourselves or others
It is given by only solely one mind
It is love that touch the heart
To know it needs long time
Mountains 1998
There has been a mountain in my heart from sometime
It contains stern, steep, and grand one
Forest, falls, and birds
Mountains make me be gentle
Mountains often make me pass away high hills
It makes a beautiful sound-
Over echoes through deep valleys
I saw streams flow
There was everything in it
The mountain is in my heart
싱그러운 유월 그리고 전쟁의 흔적 1998
초록으로 우거진 숲 사이로 바람이 일고 햇살이 눈부시게 푸른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 대지 위를 아름다운 신록의 계절로 만들었다.
갖가지 꽃들이 총 천연색의 색감을 그려내며 터지는 꽃망울의 분홍 장미 송이가 미소를 머금고 키 큰 진 보라 빛 난초 옆에 노랑 빛 펜지 꽃들이 어울려 피어난다. 사계절의 중간 지점에서 마치 인생 절정기인 청춘을 노래하듯 지저귀는 새소리, 품어대는 꽃 향기 내음 속에서 열정의 지난 날들을 그리워한다.
순수하였기에 낭만의 꿈을 동경하며 그 때의 모습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유월이 오면 마음 한 구석에는 암울했던 지난 시절의 이야기가 스쳐 떠오른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세대이지만 유년시절 선생님들이 들려주시던 이야기, 영화와 책에서 읽었던 6.25사변……
동족상잔의 비극을 읽고서 애국심은 반공, 방첩으로 정신무장을 하며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의 이념도 모르면서 빨갱이는 붉은 옷을 입고 험악하게 생긴 괴물로 상상을 하기도 했다.
북한 여자아이들의 빨간색 리본이 단발머리에 꽂혀있는 것에 유난히 시선이 더 가는 이유는 붉은 기운의 에너지를 사상운동의 시각적 효과를 더 해주는 듯싶다. 지난 해 New York Times의 10대 뉴스 사진에서 본 흑백 사진 두 장이 떠오른다. 고층 빌딩 앞에 흰 와이셔츠를 입은 남한의 실업자 모습과 영양실조로 뼈마디가 드러난 몰골에 앙상한 손, 눈동자만이 반짝이는 북한 아이들 사진은 시사성 초점과 흑백의 여백이 강렬하게 부각되어서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한국전, 미군 종군 사건 기자들이 찍은 흑백 필름으로 TV에서 본 유엔군들과 피난민 대열에서 길을 잃고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에서 이산가족의 슬픔이 베어나기도 한다. 이웃에 사는 John이라는 할아버지는 한국전 역전의 용사처럼 전쟁 때의 무용담을 이야기 하신다. 서울과 근처 도시명을 기억하며 달라진 폐허의 거리를, 이민의 성장이 빠른 것을 놀랍다고 하며 전쟁 중에 만난 여자친구 ‘자야’ 가 그 때 18세였다고 한다.
애잔한 사랑 이야기 보다는 마담 버터플라이, 미스 사이공처럼 비극의 주인공 ‘자야’ 가 떠오르게 된다. 전쟁이 끝이 난지 반세기가 넘어가면서 입양되었던 고아들과 혼혈아들이 성년이 되고 자신들의 Identity를 찾기 위해 한국 방문을 하기도 한다. 가슴 속 깊이 분단 조국의 상처와 전쟁의 흔적이 남아서 민족의 한이 되어 통일의 염원을 되새기며 싱그러운 유월은 초여름의 길목에서 예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이렇게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겨울 숲 1998
바람이 일고 있다.
세차고 혹독하게 숲 사이에서 불어서 가슴을 시리게 한다.
겨울의 차가움과 매서움은 거리를 누비며 한기를 더해준다.
만난 것도 헤어짐도 아닌 연속성 속에서
지속적인 순간의 만남을 우리는 향하여 질주를 한다……
멋진 신세대 할머니 1997
저물어가는 황혼의 아름다운 석조를 바라본다. 노을에 붉게 물들어가는 숲 속의 노목들 사이로 석양이 걸쳐져서 어스름한 거리를 비춰준다.
인생에 있어서도 가장 열정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는 세대는 노년기에 접어든 분들이시다. 세월의 강물 위에 희로애락, 생로병사를 다 흘러 보내고 지혜로서 자신들의 시간을 엮어나가시는 노인들이시다.
뉴저지 YWCA 그레이스 아카데미 시니어 센터에서 미술반을 맡으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굽이치는 한국의 현대사를 살아온 역사의 증인으로 역경의 세월을 다 지내고 다시 미국에서 생의 마지막 장을 보내시는 그분들을 가르치면서 늙는다는 두려움은 사라지고 진정 잘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게 되었다.
유엔이 정한 올해는 “세계 노인의 해”. 노인이 사회의 문제화 되는 여러 요인들이 있지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방법중의 하나는 모든 세대들과 더불어 사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인 것 같다. 노인의 홀로서기와 독립적인 생활을 위한 것들 중에는 그들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는 다양한 사회적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시니어 센터에서는 헌신적으로 봉사하시는 마 교장 선생님은 내과 의사로 지내시다 정년퇴직을 하시고 나서, 전문직 경험을 살려 노인건강 문제를 돕는 일을 운영하신다. 인생의 남은 힘을 다해 몸과 정신의 균형적인 조화를 몸소 추구하시고 또 추구하도록 돕는 것이다.
그 연세에 할머니라고 하기엔 너무나 고우시고 겸손하신 분, 바느질을 촘촘히 잘 하시는 분, 춤과 노래로 흥을 돋게 해주시는 분, 재치있는 이야기로 모든 분을 즐겁게 해주시는 분, 빵 꽃을 한 손으로 잘 빚는 분, 10년만에 상봉하는 할아버지를 그리며 카드를 만드시며 소녀처럼 수줍게 미소를 지으며 부끄러워하시는 모습……
이 모든 분들의 모습이 우리 한국 어머니의 모습이시다. 일주일에 한번 수요일의 수업을 기다리시며 손자들의 베이비시터 가사일을 도우시면서도 힘이 나신다고 하시면서 한 학기 동안 만드신 작품들을 정성스럽게 상자에 넣으며 선물 살 걱정이 없다며 흐뭇해 하신다.
수공예품을 하게 되면서 늘 무언가 만드실 생각을 하기 때문에 치매예방이 된다며 의학정보 지식을 몸소 생활화하시는 그분은 아주 열의에 찬 수업을 하신다. 지난 시절, 가정에서 사랑으로 희생하셨던 그 저력으로 여름방학 기간에 동양화, 고전무용 등을 배우시면서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가진 분들이시다.
경험에서 묻어 나오는 말씀 속에서 세대간에 이어져가야 하는 문화의 선구자라는 것을 알게 한다. 사랑하는 아들을 가슴에 묻어 먼저 보내고 나서 남은 생애를 어떻게 지내는 것이 진정 중요한 것인가 하는 점에 이르러서도,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을 자각하시고, 인생드라마 마지막 노년기 풍성한 삶을 열연하시는 것이다.
그 누구에게나 청춘의 한 시절이 있었듯이 지금도 꿈과 생애의 불꽃을 피우고 있는 한, 이 시대의 신세대 할머니이신 것이다.
오목과 볼록 렌즈 1997
작년 봄 독일을 갔을 때 뮌헨 대학교의 현대 미술 전시를 보러 갈 기회가 있었는데 유독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있었다. 작품의 소재가 오목 렌즈와 볼록 렌즈였다. 그 상징적인 면은 남과 여를 뜻하는 것 같기도 하고 바로 우리 부부의 성격을 표현한 것 같아서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 후 남편과 부딪히는 문제가 있을 때 나는 혼자 여행 가서 본 전시회장의 그 작품을 연상하며 극과 극의 형상의 모습이 맞물리는 순간의 일치가 되기 위해 거치는 과정이려니 생각하며 나를 진정시킨다.
극과 극은 일치된다는 것을 십오 년이라는 결혼생활 끝에 터득한 결론이다. 남편과 나는 매사가 반대이다. 의, 식, 주부터 예를 들라면 나는 옷을 살 때 디자인, 시간, 장소, 목적 등을 생각하며 잡지와 책을 읽어서 미리 한 시즌 앞 선 유행품목을 알고 나서 선택을 하니 시간이 걸리고 신중해진다. 남편이 보기에는 실로 한심한 시간낭비로 보이는 것이다. 한국의 교복 문화에 젖은 그가 직업 역시 흰 가운을 입으니 사복(?)에 관심이 없고, 환자들을 진료하기에 고급 옷 역시 취향이 아닌 것이다. 안경도 늘 끼던 것, 편한 것, 나사가 떨어져도 그 부분을 붙여서 쓰고 다닌다. 서로 이렇게 관심사가 다른 것이다.
남편은 새 생품의 차, 오디오, 컴퓨터, CD tape를 편집광적으로 애착을 가진다. 거기에 관한 잡지도 구독해 본다. 반면 나는 기계며 전자제품에는 전혀 문외한이며 흥미가 없다.
식성 또한 나는 생선 류, 남편은 고기와 찌개 류이다. 매 식사 시간마다 기호 식품이 달랐으니 신혼 초 무척이나 힘들었던 문제였다. 외식을 가더라도 나는 늘 새로운 것, 맛 보다 분위기 위주이지만 그이는 늘 먹던 것, 다니는 곳에서 편하게 먹기를 원해서 아직 남은 숙제이다. 두 사람의 의견 차가 있을 때 아이들의 선택권으로 해결하는 방법도 괜찮은 방법이기도 하다.
레지던트를 끝내고 집을 보러 다닐 때, 나는 고풍스러운 스타일, 빅토리안, 콜로리얼, 잉글리쉬, 튜터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꿈은 사라지고 지금 사는 이 집으로 처음 보던 날 그 자리에서 결정을 내렸다. 새 집이어서 고칠 것이 없고 깨끗하고 편리한 점, 즉 실용적인 면이 강하게 움직였고 운치와 분위기로 집 안을 엔틱으로 꾸밀 나의 생각은 사라진 것이다. 이 때에 얻은 교훈은 ‘인생은 선택’이다. 그러나 그 어느 선택도 절대적이고 완전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일장 일단. 이것이 아니면 저것인 것이다. 그러니 일단 선택을 내린 결과에 최선을 다하고 비교의식 없이 충실하게 내린 선택에 만족하는 것이 후회 없는 삶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모든 의식 구조가 다른 남편과 나는 6년이라는 연애기간이 있었다. 중매란 모든 조건이 우선적으로 맞아야 하지만 연애란 감정의 화학 반응, 사랑의 감각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부모 형제들과도 의견 차이가 있는데 하물며 20여년간 다르게 살아온 남녀가 한 가정을 꾸미고 사는데 문제가 없을 수는 없다. 연애시절의 열정, 서로가 매료되었던 그 점이 결혼 후 단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남편의 해박한 지식과 의학도의 청결함과 이지적인 태도가 결혼 생활에는 나를 숨막히게 답답한 점이기도 했다.
나 역시 늘 가꾸고 치장하는 것에 바쁜 이민 생활에는 사치로 보여질 수 있는 점이기도 하듯이 말이다. 만장일치 모든 문제 없이 의견이 잘 맞게 살아도 무료한 삶일 것 같다.
물질만능에 젖어 모든 것이 갖추고 결혼하려는 요즘 걺은 세대들이 신혼 여행때 헤어져 그 길로 이혼하는 경우도 허다한 요즘 그 본질적인 문제는 어려움 없이 자라온 선남선녀들이 지기 싫어하고 자기주장이 세고 무엇보다 이해심이 부족해서 오는 결과인 것 같다. 철저한 개인주의 그렇게 부모들이 키워온 결과가 아닌가 싶다.
연애결혼 이었기에 크게 다투고 나서도 집 안에 알리지 못한다. 내가 택한 사람이며 나의 선택이었기에 나는 거기에 대한 책임을 환수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성인으로서 부모인 자들이 감당 하여야 할 성숙성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나름대로의 부부관, 철학관도 가지며, 오목과 볼록이 되어 한 마음 한 몸이 되어간다. 아이들도 만들었으니 말이다. 창조자의 기쁨은 그 어느 것에 비길 수 있겠는가! 이제는 눈 빛만 보아도 목소리의 억양만 들어도 남편의 심중을 다 헤아리게 되었으니 산다는 것은 서로 길들어져 간다는 것 같다.
남편은 아직도 나를 처음 만났을 때 19세 소녀로 나를 대할 때 20년의 세월이 흘러 중년 부인이 된 나의 모습을 어리게만 보는 것이다.
서로 이렇게 다르기에 상대방에게서 자신에게 없는 점을 보안하며 의지하며 살아가는 위안도 갖게 되었다. 아직도 멀고 먼 인생의 산고개가 남아 있으니 그 삶의 여정을 지난 날 미숙했던 점을 이제 연륜을 닦은 이들의 자세로 느긋한 마음으로 각기 다른 음의 옥타브의 불협화음을 조화 있게 연주하며 서로 다른 색깔의 모습을 색의 혼합으로 아름다운 우리들만의 미의 혼합색 을 만들어 인생의 캔버스에 그려나가고 싶다.
저 창가의 앙상한 겨울 나무 가지들이 나상의 모습을 보면 큰 버팀목위에 가지들이 연결되어 아름드리 나무로 뻗어나가는 형상이 겨울 나무에 다 나타나는 것이다. 울창한 나뭇잎이 달려있을 때 보여지지 않는 가지들이 이 겨울에는 다들 나는 것이다. 마치 노년에 얼굴모습에서 지난 날 살아온 모습을 그려내듯이 말이다. 지금 부터라도 가지치기한 양분과 햇빛을 받아 쭉쭉위로 뻗어나가는 거목들처럼 성장하고 싶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인 것처럼 죽어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미래로 향한 나의 열정을 이 순간 매사에 충실히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나의 가지들이 이 미국 땅에서 뿌리내리고 살기에 나의 삶이 그들에게 좋은 롤 모델의 본보기가 되어주고 싶다. 가정의 화목에서 사랑을 배우고 꿈을 먹고 자라나는 우리 자녀들에게 늘 가슴에 자리잡은 추억의 박물관인 가정을 남편과 내가 잘 엮어나가는 부모가 되고 싶은 소망을 하여본다. 그러기에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행복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나서 실천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 이다. 오목과 볼록 렌즈처럼 부부란 두 개로서 반 씩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서 전체가 되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 여름의 열기 야구장 양키 스태디엄. 1997
야구장에 들어서자 현란한 선전문구들이 시야에 확장되어 들어온다. 관중석 인파들이 하나의 점들로좁혀져 온다. 인상파 정묘법의 대가 쉬리의 화풍으로 시각의 리듬으로 물결치듯 야구장은 열기로 꽉 차있다.
노랑 빨강 흰색 옷들의 색들과 인체와 머리색도 그 속에 묻히고 색상의 점들로 찍혀져 보인다. 차져가는 점. 점들의 틀 속에 메꾸어져 들어가고 인파의 물결들이 흐른다. 한 무리들이 줄지어 들어온다.
회색 양복 정장의 신사복 깔끔하게 차려 입은 남녀들. 직장에서 단체로 온 젊은이들. 양키 모자를 쓴 부자 옆에 갓난 아이 배내옷에 양키 문구가 쓰여있다. 가족 대대로 내려오는 열광 팬들의 여름 나들이이다. 흰 머리를 날리며 나온 배를 벨트에 감고 앉은 노인들. 십대의 한 무리 손에 야구 글러브가 쥐어져있다. 다양한 계층들, 간혹 긴 검은 머리의 동양 처녀와 미 청년이 어우러져 있다.
구수한 핫도그 냄새가 스며오고 판매원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땅콩을 까서 껍질째 먹으며 플라스틱 맥주병을 들이키고 솜사탕과 아이스크림 객석은 먹는 즐거움으로 차져 간다. 오래 전 기억인 서울 운동장야구장이 오버랩이 되어 떠오른다. 소주병과 오징어 응원단들의 외침소리 함성이 귓가를 두드린다.
7월의 여름 훈풍과 야구장 불빛이 있었지.
이 때 전철이 지나가며 가로등이 커지고 큰 스크린 화면 속에 야구팀들의 명단이 소개되고 미국 국가연주와 함께 게임은 시작되었다. 자발적인 응원대 한 마음 일치가 스크린이 리더가 되어 묶여져 있다.앞 줄 양키의 극성 팬들이 Let’s go Y를 선창하면 모두들 몸을 흔들고 따라한다. 줄무늬 선수복을 입은 선수들이 입장하고 지브라처럼 건장한 선수들이 스트레칭을 필드 저 편에 누워서 하며, 스포츠 마사지 해주는 사람은 마치 조각을 다듬는 장인처럼 몸을 다듬어 간다.
게임이 시작되었다. 9명 팀 워크가 야구의 묘미이다. 삼박자의 호흡, 타자와 투수, 공의 유연성 변화구수 천 명의 시선이 그 공에 박혀있다. 홈런과 스트라이크, 피칭, 안타들이 경기를 주도한다. 상대방의공격을 위해 수비로 무장한 팀 스포츠이다.
미국의 교육에서 도덕 교육은 스포츠 정신에서 가르친다. 심신의 훈련, 협동심, 게임을 통한 훈련에서단련시키는 것이다. 전인 교육은 운동을 통해서 체력을 연마하며 저력을 키우는 것이다. 관중석에서 튀어나오는 욕설과 환호성이 뒤범벅이 되었다. 양키의 티노가 홈런을 날렸다. 열광의 도가니 속에YMCA를 부르고 스크린에 손을 흔드는 이들 공을 받으려고 글러브를 쥐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 LA 다저스의 박찬호가 있었다면 한인 응원팀은 어떤 노래를 하였을까?
4년 전 딸 아이의 반 학생 제프가 공을 잡아서 양키가 메츠에 역전승 하여 뉴스거리로 타운의 화제가되어 방송사들이 학교로 몰려온 적이 있다. 학교를 빠지고 야구장에 갔을 정도로 아이들을 매료 시키는야구 경기이다. 돈과 명예가 있기 전에 맹 훈련의 고충은 뒷전에 묻히고 눈 앞에 보이는 영광만이 보이는 것이다.
한 여름이 깊어가고 여름 방학 자녀들과의 삶의 현장 학습 놀이를 야구장에서 부모들 해보는 것도 미국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
계절의 끝자락에서 1997
어느덧 숲은 물들어가고 계절의 끝자락에서 회상의 언덕 위에 서서 기억을 더듬어 본다.
늘 그러하듯이 매 해 형태는 달라져도 일어나는 일상사 속에서 펼쳐지는 번민과 감정의 소용돌이, 예상할 수 없는 미래는 새 나날들이 주어지는 듯 하지만 운명의 전주곡은 두뇌의 악보에서 저장된 기억의회로에서 작곡되어 연주 된다.
음률을 자아내는 것은……
매 순간 깨어나 하모니의 선율의 강하고, 때로는 약하게, 혹은 느리고 빠른 듯 느슨하게 불협화음을 조화롭게 다듬어가며 우연에서 필연으로, 인연의 곡으로 생은 마치 협주곡처럼 연주된다.
이렇듯 계절이 스쳐 지나가는 모퉁이에서 고운 연둣빛 새순에서 푸르고 푸른 초록 잎새로 이제는 진 자줏빛 그 붉디 붉은 낙엽이 주어지듯 가지에서 떨어져 황갈색의 마른 잎이 되어 흙 속에 묻혀질 때까지자연의 순환처럼 되풀이 되는 것이다.
다시 가지에 새 잎새를 돋기 위해서 반복 연주되는 생의 변함없는 대 서사시 사계의 교향곡이다.
지는 황혼의 아름다움은 대지를 진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발하는 노을의 햇살처럼 세월의 뒤안길에서이제 생의 마지막 장을 펼치시는 시니어 분들과 FGS 센터에서 동고동락을 몇 해 하면서 인생학교 4학년인 나는 5,6,7,8 학년들과 “배움”을 통한 중용의 미를 터득하게 되었다.
인생 학교는 입학에는 순서가 있어도 졸업에는 순번이 없다 하듯이 그분들의 모습 속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주름이 흙의 지층처럼 패이듯이 세월이 연마된 시간의 풍화 흔적이기에 빛나고 강한 금속처럼빛을 뿜으며 주위를 지혜로 밝혀주는 것이다.
말없이 행하며 보여 주시는 그분들을 대하면서 슬픔마저 기쁨으로 바꿀 줄 아는, 만들어 나가며 잃는것이 있으면 얻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 보이는 것 보다 보이지 않는 의미를 깨닫게 해 주시며행복한 자는 자족하는 자이며, 주어진 자신의 길을 만족하며 항상 배우며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라며 삶은 되어져 가는 과정이기에 해나가는 순간의 그 과정을 최선을 다하여 받아들이는 행하시며 솔선 수범 하시는 모습 속에서... 인생 학교 상급생 그분들을 만나게 된다.
팔순 생신 잔치를 하신 분은 매사에 인자하신 미소로 그래, 그렇지!, 그럼… 이 세 마디를 늘 하시며 모성애의 여신처럼 건강 비결 주문처럼 긍정적인 답을 해주신다.
8학년으로 교양과목, 운동을 매시간 즐기시며 집에서 손수 회원들의 점심을 위하여 밑반찬을 정갈히해오시며 바자를 위한 바느질도 하시며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시기도 하며 내 수업 아트 시간에 배운수채화를 그려서 집에다 걸기도 하시며 수업 시간에 해주시는 말씀에 색칠을 하고 붓을 잡으니 마음이편해지고 잡념이 없어져 아주 좋아. 하시던 말씀이 늘 여운처럼 들려온다.
나는 가르치기 보다는 그 분의 삶의 모습을 배우는 것이다.
추억이라는 상자 속에서 그 숱한 사연들은 애환의 빛으로 영롱함을 가슴에 담고 각자 고유의 빛깔로 자아내시며 이 시대를 같이하는 생의 선배님들 이시다.
“여보시오 청춘들아
네가 본디 청춘이면
난들 본디 백발이냐”
선로들의 노래 가락처럼 세월이 강물처럼 굽이굽이 흘러가듯이 물결처럼 생긴 주름은 시간의 무늬인것이다.
모든 것은 체험의 소산이기에 먼저 사신 그분들의 경험을 토대로 무엇이 진정 중요한 것인가를 들으며보아야 한다. 가까이서 그분들과 지내면서 일상 속에서 전달 되는 것을 습득하여 생활 속의 지혜로 이어져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각자의 고리가 탄탄해야 잘 이어져 엮어지듯이 가족의 끈 모두가 바로 서야 할 것이며 혼자태어나 혼자 가는 인생의 여로에서 서로의 길 벗이 되어주며 그 따스함의 온기가 퍼져서 온정으로, 사랑으로 가득한 이민사회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으로 환원하여 지
는 것이다.
97년 문화유산의 해 1997
뉴욕 한국 학교에서 한국문화를 가르치며 매 학기 14주 Lesson Plan(학습 지도안)을 작성하면서 이민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한국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고심했는데 97년 올해는 한국에서문화유산의 해로 지정되어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그 동안 해왔던 일에 대해 자신감도 가지며 하던 일을다시 한번 정리해 보는 기회를 가져본다.
“민족의 얼, 문화유산 알고, 찾고 가꾸자.
문화유산 사랑하여 민족문화 꽃 피우자”
라는 글을 읽고, 과연 이 미국 땅 토요 학교에서 가르쳐 봤자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라는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학생들에게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가르치는 교사 자신이 자부심을 갖고 그들에게 전달하는 자로써의 책임을 더욱 느낀다.
한국문화 통합 이미지 10개의 도안 그림 디자인을 보고 그 동안 가르쳐왔던 지도안과 일치되어서 이제껏 해왔던 일이 현실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확신도 가져보았다. 한복, 한글, 김치, 태권도, 불국사, 설악산, 종묘 제례악, 세계적 예술인, 탈춤, 고려인삼 등 선정된 도안을 오려 지도안에 부치고 이번 새 학기 과제물과 수업시간에 다뤄볼 교재와 준비물, 시청각 자료를 수집하여 본다. 한국문화 교재는 책으로 읽기보다는 직접 만들고, 그리고, 먹고, 눈으로, 손으로 익숙하게 하고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접하게 하여 이러한 것을 습관화하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또한 계절에 맞게 미국과 한국 명절의 공통점을 찾아 연결시키고 음악, 미술, 무용 등 예술적 방향으로친근감을 유도하며 이제껏 해왔던 수업시간을 좀더 유용하게 계획해보면
1)한복의 아름다움의 평면성을 종이 접기로 하여 서양의 입체재단을 더하여 아이들의 창의성 있는 종이 펴기, 세우기를 하여 실생활에 활용하는 액세서리로 만들어본다. 예를 들자면 버선, 부채, 복 주머니, 매듭을 종이로 만들어 장식품으로 응용한다.
2)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노래로 외우게 하여 율동동작을 같이하여 외우게 하는 것이다.
3) 깍두기 무를 자를 때 사각형이 아니라 학생들이 원하는 모양으로 잘라보며 그들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 시키고 백 김치의 순한 맛을 샐러드, 피클과 맛을 비교시키며 버릴 것 없이 만두, 찌개, 부침개 등을만들 수 있는 알뜰 주부들의 지혜를 알게 한다.
4) 태권도는 필자 자신이 빨강 띠에서 올해 검정 띠인 유단자가 되었지만, 나이든 사람들도 육체와 정신 수양으로 하는 것을 알리며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도”를 중시하는 것, 즉 한국이의 기상이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5) 불국사의 사진과 여름방학 한국을 방문하는 학생들에게 명승지 답사와 한국의 건축 모양을 가을학기에 설명할 기회를 주어 한국의 유교사상과 불교의 역사적 영향을 알게 해주고 싶다.
6)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단풍과 설경으로 보여주며 사계절 한국의 기후 풍토와 생활습관을 알려준다.
7) 종묘 제례악은 궁중음악을 들려주며 우리의 악기와 서양 음악의 차이점을 학생들 수준에 맞게 이해 시킨다.
8) 세계적 예술의 도시인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활약상을 스크랩으로 보여주며음악, 미술, 무용, 연극 등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그 존재를 잊고 있기에 학생들의 role-model이 되게하여 전시회, 음악회, 발표회를 가보도록 권유한다.
9) 탈춤의 탈을 종이접시에 구멍을 만들고 그리게 하고 색종이로 부치고 고무줄로 끼워서 쓰게 하여 사물놀이 때 아이들이 신나게 춤추게 하니 이곳에서 자란 아이들인데도 어깨춤을 추는 것을 보고 그 속에흐르는 혼을 나는 느꼈다. 징, 꽹과리, 북, 장구를 한번씩 쳐보면서 신나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 자신도 장구 배우기가 힘들고 귀에 익숙하지는 않아도 그 흥을 알고 창을 들으면 가슴속이 후련해지며 옛날 할머니의 모습이 그 속에서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곤 했다.
10) 고려인삼, 여러 가지 한국 고유의 차를 알려주며 세계적인 인삼차와 한국인들이 즐기는 다도의 향기를 느끼게 하며 정서를 알게 해 준다. 나 자신이 이런 문화유산을 알고 가르치며 거기서 얻는 것이 학생들에게 Korean American으로서 Identity를 가지며 그들 자신은 물론 자식들에게 까지 전달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문화란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고 수 백, 수 천 년을 내려오면서 기후와 지형, 민족성에 근거를 두고역사와 함께 변형, 발전되어 가는 것 같다. 미국학교에서 한국 문화 소개 프로그램에 이제 음식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준 다음 그들에게 재 창조의 기회를 주어서 의견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오천년 역사의 한민족의 긍지를 안고 조상들의 유형, 무형의 유산을 후손들이 기리 보존하는 것이우리들의 책임이며 학문적으로 일본이 우리의 것을 전달, 변형하여 자신들의 것이라는 것에 반론을 하기에 앞서 우리들이 지켜나가는 힘을 길러나가야 한다. 한국 역시 거품경제에서 이제 그 거품을 거두어내고 그 밑에 남은 의식을 일깨워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 가난의 시절을 생각하며 진정으로 자식들에게 무엇을 심어줄 것인가를 깨달아 올바른 생각에서 꿈을 키우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 역시 미국 역사를 배우며 한국을 떠나 이곳 American Dream을 향하여 온 이유를 정립하여부모들의 세대를 이해시키고 이곳에서 뿌리를 내려가는 것이다. 97년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나의교육 방침을 정리해보며 2월 거리마다 Valentine의 Heart속에 정축년 소의 근면한 모습을 그려보게하여 12간지 동물을 이야기하며 가족들의 띠를 말해보며 생활 속의 문화유산을 실천해 본다.
부모가 보여주며 알려주는 것, 그리고 몸에 길들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교육의 습득 효과를 볼 수 있다. 지식을 중점으로 하는 학교 교육보다 더 중요한 인생교육은 가정 속에서 배워 나가는 것이다.
Nature is Art, art is nature. Art is anywhere! 1997
예술(음악, 무용, 미술, 문학, 영화) 환상(illusion) 자기착각, 허구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모순 갈등을해소시키고 근원적인 물음을 깨닫게 하며, 각자의 표현방법으로 추구하게 하는 길인 것이다.
사이버 세대들에게 정신적 감정표출=예술 시공을 초월하는 자연의 주제를 주어야 한다.
그 속에서 초월한 무한 속으로 가는 길 진, 선, 미로 향하는 것이다.
동서양의 다양한 민족과 지형의 문화적 차이 전통을 인정하며 다수의 양식이 공론하고 인정하는 멀티컬쳐(Multiculture) 시대가 21세기에 열린 것이다.
컴퓨터는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소도구의 매개체이며 시각, 청각에 의하지 않는 제 6감을 이해하는 초능력 텔레파시(Telepathy)는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주어진다. 고유한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듯 자연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한 대 우주의 발상인 것이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지구의 자전처럼 자연은 그 속에서 곡선에서 원으로 향하여 가고 있다. 직선의 정지가 없다. 끝과 시작은 한 점에서 출발한다. 그 점은 이 순간 마음의 작동에서만이 선을 이어간다.
심장의 박동소리처럼……
본래 시간은 없다. 보이지 않는 것 수많은 점의 연속 속에서 우리들은 존재가 된다. 12월의 마침표 이별은 새해 1월 만남의 시작을 주듯이 생과 사의 굴레로 그 안에서 주어진다.
작자 미상의 “미인도” 1997
메트로 폴리탄 한국 미술 특별 전시실에서 같이 다닌 일행들이 떠나고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조용해진전시실에는 침묵과 정적만이 흐르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문화유산 22점 예술품의 아름다움 속으로사색의 긴 여행을 하게 되었다.
고려 불화의 정교성과 원근법을 쓰지 않고 5색 향연(청, 황, 적, 백, 흑)의 오묘한 입체감으로 탱화의정신적 깊이를 표출한 정성 들여 채색한 면들이 보여진다. 청동의 징에서 극락세계의 상징구름 무늬는이승의 영화를 저승까지 누리며 살고자 했던 염원이 들리는 듯 하며 연화무늬 연꽃의 문양은 정토왕생을 속세에서 만들려고 도자기, 기와에서 볼 수 있다.
고려 상감청자의 비취색 빛나는 고색 창연한 빛이 여러 자기에서 빛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통치이념으로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한 마음의 공부를 기본으로 참선을 위주로 하는 예술가의 의지와 17세기 이후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관념적인 회화의 세계를 떠나 현실을 발견하고 그림의 주제가 산수화가 아닌 풍속화, 인물화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사상, 시대 배경, 사회적 이슈, 작가의 생애와 인접분야를 알아야만 그림의 이해도를 높이고 작가와 교감을 통해 영감을 가질 수있는 것이다.
단원 김홍도는 화원 출신으로 농촌의 생활을 생생한 흔적으로 풍속화첩에 묘사했다. 전시실에 있는 “대장간”, “기와 이기”에서 그 당시 모습을 상상하게 되어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하다. 혜원 신윤복은중세 말기 변모와 혜원 풍속도첩에서는 도시생활을 주제로 하여 “시장길” 에서 두 여인의 모습에서처럼 여러 계층의 여인들을 그렸듯이 도화서에서 나와 속화를 그리며 표현하려는 창작 태도, 인물 묘사력, 근대 지향성과 자수성으로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조선 후기 풍속화로 많은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것으로 친근감이 드는 이유는 책과 달력에서 많이 보아서 그런 것 같다.
풍속화는 조선시대 실학의 발전, 민간어를 사용한 한시, 판소리, 한글소설이 시대정신으로 사대부에서속화라고 부른 것은 봉건사회의 틀을 벗어나려는 변동기의 유교사상이 선비 화가나 화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두 작가는 화원 출신이기에 그나마 작품이 보관되어 대할 수 있지만 낙관 없는 민화처럼 이름 없는 작가들도 많은 것이다.
매번 올 때마다 발길을 멈추게 하여 시선을 끄는 것은 작가 미상의 “미인도”였다. 해남 윤씨 종가에 소장된 미인도로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 작품은 갸름한 흰 얼굴에 가느다란 눈썹과 긴 눈매, 붉은 입술, 수줍은 듯한 표정, 가냘픈 어깨와 짧은 삼회장 저고리의 좁은 소매로 두 팔을 머리에 두고 긴 손가락 사이에 낀 노란 반지가 보인다. 감추어진 여체의 은근함과 고혹적인 자태가 황진이, 성춘향 등의 옛여인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 주었다.
조선시대의 유행으로 사회문제화까지 되어 왕명이 떨어져도 여인들에게 가체의 크기로 신분을 과시하였다는 타래 머리를 이고 서 있는 저 여인은 살며시 손을 내리며 나에게 바로 옆 유리 진열장으로 손짓을 하며 가리킨다. 그것은 조선백자였다. 눈같이 흰 설 백자 높이 40센티미터의 투명한 유백색의 파르스름한 색을 담기도 하고 청백색의 푸른기가 미세한 빙렬이 그물처럼 나 있는 둥글고 풍만한 선, 여유롭게 서 있는 미인도의 치마폭선의 흐름과도 같았다. 바로 그 선이었다.
이번 한국 미술전에서 ‘아는 것만큼 보고 그리고 즐기다’ 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역사적 영향을 준 불교와 유교를 나는 얼만큼 알고 있는가? 생각하게 하는 전시였다.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으며 서로 영향을주고 받으면서 동양의 삼국 미술을 봐오면서, 중국은 사실적이며 정교한 색채가 강렬하고 일본은 장식성과 도안성으로 시각적 효과가 뛰어나며 한국의 미는 사실성을 초월하여 해학성과 소박함을 추구한단순미가 돋보였다.
13세기~19세기의 긴 여행을 하고 나서 돌아와 보니 옛 것에서 새 것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었다.
한글 가치의 재 인식 1997
한글 학회의 초청으로 2주간 우이동에 있는 연수원에서 무더운 여름을 보냈다. 25개국의 교사 45명이강의를 받으며 합숙하며 동고동락했다. 북한산을 둘러싸고 있는 정기를 받으며 지낸 날들이었다. 미국,중국, 유럽, 남미, 러시아 등 지구촌의 한국인들이 모여서 각자 가르치고 있는 학교의 실정을 얘기하며,우리말의 역사, 훈민정음, 문법, 맞춤법, 남북한의 표준발음 억양의 교육, 문화, 교수법 등을 배웠고 특별활동으로 한국영화에 대해 그룹 토의를 했다. 1백 50년 전 고려인의 자손, 이민 4세의 러시아에서온 국립발레단이며 한국 학교 교사, 부모들도 모르는 조선족 할머니의 말을 배워서 가르치는 젊은이들을 보았다. 한국인의 말과 글이 있다는 긍지가 자손들에게 스며들면 몇 세대가 흘러도, 어디서 살아도,다시 만나도 연결 되는 것 같다. 연수원의 푸짐한 한식을 먹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 춤과 사물놀이연습으로 한국인의 멋과 흥 속에 화기애애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세종대왕 기념관에서 14폭의 동양화, 세종대왕 일대기, 한글실의 다양한 서체, 과학실에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천문기구, 국악실의 악기들을 보면서 감개무량해 학생들에게 보여줄 사진을 찍었다. 여주 세종대왕릉에 가서 참배도 하고 한여름의 무더위로 지친 마음을 강의에 대한 열기로 식혔다. 강의를 통해 한국학회의 사랑과 민족 얼이담긴 한국어를 바르게 쓰는 법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아름다운 말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고운말 쓰기,한자와 영어의 남용 등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통일이 오기 전에 남북 공동의 한가지 글자 ‘한글’을 위하여 언어비교는 실로 중요한 문화 정책이다. 언어란 정체성, 동질성, 문화유산, 한겨레의 전통 속에서 우리의 말과 글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금 한,영 공용화 문제로 혼동 상태이다. 우리는 겨레 문화를 지켜가며 문화적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 다민족 문화를 이해하되, 고유의 전통을 서로 나누고 즐겨 차원 높은 선진구 문화 시민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미국 다민족 문화 행사 중 ‘한국의 날’ 에 학부모들이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는 시간이 있다. 이 행사는 자음, 모음 24자로 나라이름을 붓글씨로 쓰는 것인데, 이를 본 사람들이 한글로 쓰여진옷을 사 입고 와서 뜻을 물어오기도 해 뿌듯했다. 지구촌이란 말이 등장할 정도로 세계는 지금 활발한교류로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자국어 문화를 가진 국가만이 독자성 있는 문화로 민족의자존심을 지켜갈 수 있다. 말, 글, 얼이 삼위일체가 되어 유지되는 우리의 정체성은 이곳에 뿌리내려 살아갈 2세들에게 남겨줄 유산이다. 세종대왕 어록에 ‘그 일을 쉽게 여기고 하면 성공하지 못하나, 그 일을 어렵게 여기고 하는 이는 반드시 성공한다’ 라는 말을 다시금 되새기며 이번 연수에서 느낀 여러 문제점을 풀어줄 우리 2세들에게 꿈과 희망을 걸고 싶다.
파키스탄 기행문 1997
이슬라마바드 (1)
여행을 한다는 것은 떠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관광개발이 되지 않은 곳에 가서 고생을 하고 나면 다시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으로도 의미가 주어진다. 파키스탄 여행을 결정 한 후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책과 인터넷에서 찾았으나 별로 알려지지 않아 힘들었다. 모든 이들이 걱정을 하기에 우선 오지로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적 체험으로 남들이 가보지 않은 곳을 가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들어서 여행 준비를 하였다. 울리와는 5년 전 같이 독일여행을 하였고 다그마는 파키스탄 독일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남편이 내년이면 근무가 끝나기에 우리들을 초청해 주었다. 독일인들 답게 여행 스케줄과 사전 준비물, 상비약, 자선 단체에 전해줄 선물 등을 알려 주었다. 남편은 나를 공항에 데려다 주면서 여권과 돈을 챙겨주고 건강과 안전을 염려해주었다.
아이들은 엄마의 모험심을 격려해 주며 할 일 다 잘하니 많이 보고 느끼고 쓰고 찍으라며 숙제 아닌 숙제를 준다. 가끔은 가정에 주부가 없을 때 그 역할의 소중함을 가족들이 알아야 한다고 조그만 위안을 삼으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독일 프랑크 프루트 공항에서 울리를 만났으며 아랍의 두바이를 거쳐 이슬라마바드 공항에 도착했다. 이틀간 비행기를 3번을 갈아타니 피곤과 시차로 온 몸이 나른해져 온다. 먼 곳에 왔구나 느끼는 것도 잠시, 공항에 내리자 마자 고온 건조한 아열대성 기후의 후끈한 열기가 코 끝을 스치면서 3층 대합실은 인파들로 북적거린다. 흰 색의 파키스탄 민속 의상을 입은 이들이 가족 한 명에 친척 수 십명씩 환송을 한다. 한국의 60년대 공항처럼 수도의 공항이지만 그 흔한 카트마저 보이지 않는다. 가방 2개를 찾은 뒤 울리는 다그마를 찾으러 먼저 나갔다가 한참 후 짐을 운반해 주는 일꾼과 함께 왔다. 다그마와 칼에게 인사로 포옹을 하니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린다. 다그마의 집으로 가는 길에 이슬라마바드 신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1959년의 새도시 이 곳은 고원지대 푸른 수목과 정부기관 각 국 대사관이 있는 곳답게 말끔한 인상이며 국민소득이 5백달러가 넘지 않는 가난한 나라인데 핵 연구소 앞에 미사일 모형이 서 있다. 경제 사정은 최악인데 핵 무기 제조기술과 미사일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군부독재와 민주화의 갈등, 남-북한의 관계도 있다. 이슬람교 영향인지 거리엔 여자가 눈에 띄지 않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 역시 낮아 오로지 집안 일로 평생을 보낸다 한다. 첫 여수상 부토가 있었지만 군부의 압력으로 중도에서 끝났고 숱한 외세 침략으로 민족 자체도 유목민 훈족, 터키족, 아랍족, 몽골족 등 다민족이다.
파키스탄 기행문
이슬라마바드 (2)
파키스탄은 ‘신성한 나라’ 라는 뜻이다. 히말라야 산맥과 연결된 북부 산악지대와 인더스 강 유역 평원지대 중국, 아프카니스탄, 인도 등과 접하고 있어 실크로드 동 서 문화의 연결지 역할을 하고 있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47년 독립하였다. 과거 인도의 한 영토였기 때문에 인도와는 여러모로 밀접한 역사를 갖고 있다. 1억이 넘는 인구, 열악한 환경, 오랜 옛날 기원전부터 이미 고도의 문명이 있었고 6세기 석가모니가 불교를 전파했고 기독교와 이슬람교, 힌두교가 함께 존재하는 곳. 그러나 지금은 국민 90%가 이슬람교인이다.
국어도 우르두어가 있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만 각 주의 언어가 다른 점이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
다그마의 집 근처는 대사관들이 많은 탓인지 집안에도 보초병들이 총을 들고 서 있다. 집안에 들어서니 4명의 가사 공용인들이 인사를 한다. 모두들 남자이다. 인건비가 싸다고는 하지만 식민지 시대부터 지배자들이 누린 부의 영향같다. 부부 2 식구인데도 하인들은 이보다도 더 많다. 방에 들어서니 깨끗한 시트와 꽃 등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니 긴장이 풀리는지 잠이 쏟아져 온다. 가족에게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하고 따뜻한 차 한 잔과 샌드위치를 먹고 일단은 쉬기로 했다. 잠시 눈을 붙인 뒤 깨어나 커튼을 젖히니 해가 지려고 한다. 부엌에서는 죠가 열심히 요리하고 또 한 방에서는 다듬이질 하는 이가 복도를 지나는 나에게 거수경레를 한다. 뮤니엘은 영어를 잘해서 집사처럼 집안 일을 해주고 늘 시선을 아래로 하고 조심스러워 한다. 준비한 선물을 주니 고마워 한다. 다그마와 2주간에 걸친 여행 스케줄을 다시 의논한 뒤 지도와 5일간 산악지대로 떠날 비행기 표, 호텔 예약, 화전 등을 위해 시가지로 나왔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큰 모스크 사원 같은 빌딩이 여럿 보인다. 역사적 자취가 흔적조차 남지 않아서 이를 보여주기 위한 건축인가 보다. 국제 정치면에서 비동맹 제 3 세계로 주도해 온 이 나라의 수도에는 군부독재, 인도와 중국과의 국경 분쟁, 아프카니스탄 난민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져 있는 모습이 곳곳에 눈에 띄인다.
테러 문제로 어디를 가나 삼엄한 몸 수색이다. 웃 도리 스랠워, 바지 콰미즈, 긴 스카프 듀파타 등 민속 의상을 사서 입었다.
요즘 파키스탄 풍 긴 윗도리와 자수 스카프 등이 세계패션으로 자리잡아 버그돌프 굿맨 백화점에도 진열되어 있던 것이 기억난다. 유명 디자이너 옷들을 떠올리며 파키스탄 민속 의상처럼 저렴한 가격도 있구나 생각하니 이곳 수공비가 얼마나 싼가를 금세 알 수 있다.
케시미어와 비슷한 큰 담요를 북부 여행에 좋을 것 같아 샀다. 음료수, 과일, 스낵 등을 사고 여행사에 가서 지프차를 렌트하니 가이드와 운전수가 산악 여행의 주의점과 도시의 특성을 말해준다. 여행사 근처에는 한 벽면에 신발을 벗고 엎드려 기도하는 이들이 있다.
실크로드 가는길 (1)
가이드의 사촌 형 집에 갔다. 반갑게 맞아주며 뺨이 붉은 처녀가 인사를 하곤 수줍게 숨어 버린다. 처음으로 파키스탄 여성과 마주해 본 것이다. 방에 들어서니 벽의 하얀 천 가리개 위에 목단수가 놓여져 있다. 중국산 울긋불긋한 이불이 놓여있고, 그릇과 보온병 역시 중국 냄새가 난다.
생활 용품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제품을 써서 그런지 한국 시골 농가에 온 것처럼 정겹다. 손수 재배한 조그만 사과를 칼 대신 손으로 쪼개서 먹었다. 구운 빵과 붉은 빛 뜨거운 차에 밀크를 듬뿍 담아서 준다.
창문 너머로 여인네들이 맡에서 일하는 모습이 눈에 익다. 공기가 맑고 스트레스가 없어서 장수하는 마을로 널리 알려진 이곳은 한가롭기만 하다. 아이들 모습은 서구적인 눈과 오똑한 코, 갈색머리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동양적으로 면해 주름이 얼굴 전체를 덮는다. 이슬람 문화권에 있지만 또 다른 산악인 다운 그들만의 풍속을 지니고 있다.
나무지게를 지고 가는 여자들의 당당함, 밭에서 맨발로 일하며 두툼한 손으로 땅을 일구며 살기에 노동이 주는 신선함과 소박함이 보인다. 길가에서 손 등을 터 있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때묻은 옷을 입었지만 두 눈만은 초롱초롱 빛나 강한 인상을 주는 아이들이 우리들에게 손을 흔든다.
비포장 도로로 흙탕물이 흐르는 시냇물, 감나무와 버드나무, 닭들이 뛰어다니며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노는 곳.
멀리 보이는 카람코람 산맥에 흰 눈이 덮여있다.
하늘과 맞닿은 듯 보이는 그 산에는 신들이 살기에 아무도 올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일본 등산객이 등반을 하다가 실종되면서 그 가족들이 이들을 추모해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까치가 세 번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가이드의 말에 동양 문화권에 가까운 그들에게 애정이 간다.
이글 네스트 산장에서 밤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과 은하구를 바라 보았다. 광활한 밤 하늘 아래서 우주의 숨결 같은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높은 고도의 강 추위 속에서 훈자 와인을 마셨다. 술이 국법으로 금지 되었으나 이 산속은 예외였다.
해발 8백미터 만년설이 덮인 산 속에서 나는 영혼들이 저승으로 가는 길이라는 은하수를 바라본다. 우주는 거대한 공간 별들의 집단이다. 50억 년 전 우주에 구름 하나가 붕괴되어 막대한 양의 가스와 먼지 구름을 일으켜 지구가 태어났을까?
우주의 신비, 미지의 공간, 하늘의 신화 그리고 지상과 천국을 연결하는 천상의 강 은하수는 여전히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이 밤에도 여행자의 가슴 속에서 빛나고 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먼 동이 트는 해돋이를 보기 위해 바위에 걸터 앉았다. 흰 눈 덮인 5개의 봉우리가 잠시 후 붉은 분홍 빛으로 물들어간다. 스테이지 위에서 조명이 비춰지듯 기계적으로 변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대한 산을 움직이는 것 같다.
아침은 이렇게 눈 위에서 시작됐다. 상그리아로 떠나는 길은 산들이 마치 큰 돌 같다. 흰 돌의 나열이 계속 이어지고 가도 가도 끝 없이 돌들이 보인다.
실크로드 가는 길 (2)
털 위에 붉은 줄을 그은 양 떼들이 끝없이 이어져 지나간다. 낙타도 가끔 눈에 띈다. 카라반을 떠나던 옛날 사람들이 눈에 선하다. 상그리아에 도착하니 명소답게 이색적이다. 10월인데도 한적하고 산 속의 고적함까지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객실에 들어서니 방 3개와 벽난로, 거실, 다이닝 룸 등이 나름대로 깨끗이 정돈되어 있다.
이틀을 묵기 위해 짐을 풀고 물건을 정리 한 뒤 자선 봉사단에 전해줄 약품과 옥 등을 챙겨 스카드에 사는 여성 단체 회장을 만나러 갔다. 마을 여자들이 한 방에 모여 수도 놓고 인형도 만들어 진열해 놓았다. 시멘트 바닥에는 카페트가 깔려 있지만 서늘하고 차갑기만 하다.
직접 이렇게 전달하지 않으면 중간에서 물건들이 사라지기에 어쩔 수 없다. 10여 명의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지도자에게 배워가며 가내 수공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인이 미국에서 왔다고 하니 의아해 해서 아시안 어메리칸 이라고 설명했다. 점심 때는 갓 잡은 싱싱한 숭어 튀김과 감자 요리가 나왔다. 야채가 그리워진다.
약품을 전하기 위해 병원을 가니 마침 산모의 진통 소리가 들린다. 일하다 온 산모의 모습과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 하다.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다니 10 여명의 아이를 평생 낳고 일만 하다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이 곳에서는 유아 사망률이 50%에 이른다고 한다. 산간 지방의 열악한 위생시설, 동물 우리나 다름 없는 불결한 환경 때문에 병이 많다고 한다.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난다.
소비가 미덕인 풍족한 미국 생활에서 너무나 많이 낭비한 것이 죄처럼 느껴진다. 무엇을 불평할 것인가. 안락한 환경에서 게으르고 타성에 젖었던 안이함이 부끄럽기만 하다.
요즘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이 오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하는데 풍요로움의 감사 이전에 절제의 중요성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여행의 산 교육은 나와 다른 이들의 생활을 통해 시야를 넓히는 것이다. 저녁 때 파키스탄의 허니문 커플과 식사를 같이 했다. 해가 지자 추워진 방에 히터가 없어 주변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신혼 여행중인 이들이 전 날 추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불평하자 허니문인데 추울 것이 없지 않겠느냐고 말해 웃음꽃을 피웠다. 젊음과 사랑의 열기가 그들의 눈빛에 보인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그들은 파키스탄의 신분제도와 빈부차이는 정부차원에서 개선하지 않으면 개선되기 힘들다며 자신들이 조국 파키스탄의 정치, 경제 등 전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쿠데타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다음 날 운전사와 가이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지난 5일 동안 여행한 길을 단 3시간만에 비행기로 오니 허무하기도 하다. 만년설에 바짝 다가선 구름은 일렁이는 파도처럼 보인다.
‘어드벤쳐 트립’은 그렇게 무사히 끝을 맺고 다시 아열대성 기후의 도시로 돌아갈 예정이다.
훈자로 가는 길 (1)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았고 큰 일도 없기에 우리는 여행사의 전화 연락을 받고 떠나기로 했다. ‘어드벤쳐 트립’ 이 시작된 것이다. 군용 지프차에 파란색을 칠한 차와 운전수, 가이드가 우리 일행이다. 날씨는 청명하고 밤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가지는 조용했다.
훈자로 가는 길.
열악한 도로 사정과 온갖 그림 장식이 된 트럭과 버스들은 사람들을 짐짝처럼 싣고 오간다. 사람들은 모두 영화배우 오마 샤리프 같이 깊은 눈과 수염이 있어 잘생겨 보인다. 할일 없이 거리에 앉아있는 이들은 무리를 지어 일거리를 찾고 있다.
구걸하는 사람들이 차를 세울 때마다 다가온다.
가이드는 파키스탄인이지만 갈색머리에 하얀 얼굴, 유창한 영어를 하며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운전사는 민속의상을 입고 말 한마디 안하고 운전만 하는 신분이 다른 계급이었다. 롤러 코스터를 탄 것처럼 차가 들썩거린다. 앞으로 5일간 이렇게 달릴 것을 생각하니 고생이 시작이구나 싶다. 농가에 들어서니 가축들을 몰고 가는 농부가 보인다. 저녁 해질 무렵 기도하는 소리가 산 속을 휘어 감는다. 우-아-우 코란의 독경 독경소리가 문명을 거부하는 울부짖음 같기도 하다. 예언자의 말을 통해서 선언된 진리 코란을 통해 알라는 모든 피조물에게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법칙을 만들었다. 이슬람의 뜻은 복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도는 하루 중 정해진 시간에 혼자서 알라신에게 다가서는 순간이다.
산 속의 호텔, 인더스 강이 흐르고 꽃 향기가 바람에 실려서 휘감는다. 어둠 속의 진분홍색 꽃들이 달빛에 빛나 밤의 전위를 더해준다.
꽃 향기가 이처럼 진하게 느껴지는 것은 산 속의 공기가 깨끗해서 일까? 여행자의 고독감에 예민해진 감성 탓일까.
산장의 밤 꽃 향기는 너무나 감미로웠다. 저녁은 차파디와 닭 찜, 과일과 야채 삶은 것으로 먹었다.
저녁 8시 모두들 로비에 모여 B.B.C TV 방송을 보기도 했다. 쿠데타 상황을 이곳 주민들은 모른 채 산을 지키고 산에서 살고 있다. 여행객이 없는 산장은 고요하고 산 속의 집들엔 불이 켜져 있다.
하이웨이를 따라서 인더스 강이 흐르는 산 길을 또 달린다. 가끔 버스들이 지나가고 트럭이 보인다. 가도가도 끝없는 산길이다. 서스펜스 다리를 지날 때 마다 삼엄한 경비와 신분 조사를 하고 여권을 보면서 가이드에게 우리에 대해서 묻는다. 여자들만의 여행은 감히 생각할 수 도 없고 그 지역을 잘 아는 가이드가 꼭 필요한 곳이다.
낙타가 있는가 하면 소들은 작고 희며 중앙 아시아의 풍경에나 나오는 양치는 소년들이 막대기로 양을 몰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띤다.
북부 산간 지방에 온 것 같다.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가면 먼지에 쌓인 가게에 남자들만 모여서 이야기를 한다. 과연 여자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길가에서 남자들이 손을 잡고 다니는 것도 볼 수 있다.
훈자로 가는 길 (2)
파키스탄 민속 의상을 입어보니 너무나 편하다. 긴 스카프는 차가 달릴 때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하여 몸을 감싸 편안 활동복이 되기도 한다. 글길트(Gllgilt)로 가는 길에 산이 3개 만나는 곳에서 사진도 찍고 산을 바라보며 명상을 하기도 했다.
자연은 대 경전이다. 다만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읽어야 한다.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솟아 오른 산은 만년설 눈 덮인 봉우리가 하얗게 빛나 암갈색의 산과 하모니를 이룬다. 수 만 년 전 바다는 만물의 생성지였고 지층의 융기운동으로 바다에 잠겼던 돌들이 산으로 태어난 것이다.
산은 남성이다. 바다는 여성이다. 장엄하게 우뚝 솟은 산은 하늘과 접하여 만년설의 눈을 녹여 계곡을 이루어 강과 바다로 흘러 든다. 산은 인간들에게 그 모든 것을 주고 바다는 그것을 감싸고 있다. 음양설은 대 자연의 신비와 생명의 근원을 깨닫게 한다. 적갈색 평평한 바위 위에서 수행하는 사람처럼 앉아 깊은 호흡을 해본다.
자연 숭배(샤머니즘)가 신앙의 근원일까? 바위 위에 부처의 그림, 원시 벽화의 주술적인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산줄기 너머로 실크로드가 한 줄기 외롭게 나 있다. 길의 원형은 물을 따라서 생겨난다고 했나.
동서 문화를 잇는 저 길은 중국의 서역진출과 로마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었던가.
구도의 고행, 왕오천축국전을 쓴 고승 혜초의 발자취가 아직도 살아 숨쉬는 듯 하다. 하루 8시간 이상 차를 타고 다니니 온도의 급변화로 목이 아프고 고산지대에서는 고산병까지 나를 괴롭혔다.
중국 국경지대에는 한자와 아랍어가 동시에 쓰여있다. 차가운 바람 얼음으로 덮인 강으로 몸이 바람에 실려 날아갈 것만 같다. 코발트 블루의 하늘 아래서 몸은 자주 휘청거렸고 머리가 아프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며 구토를 느껴야 했다.
아스피린을 먹고 차에 누워도 빙빙 도는 것 같다. 산소 결핍증으로 체력의 한계가 온 것이다. 몸을 지탱할 수 없으니 눈을 감고 호흡만 할 뿐 춥고 배고프니 이보다 더 불쌍한 것은 없을 것 같다.
떠나온 곳의 안락함을 그리워한들 너무나 멀리 와 있다. 충분한 휴식과 물을 많이 마신 뒤 일행들의 염려 속에 가까운 호텔에 들러 서둘러 점심을 먹었다. 아침 햇살이 창가에 들어온다. 호텔 창문을 여니 기막힌 절경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훈자에 왔다. 장수하는 마을 돌담집 돌이 산 위에 보이고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키 큰 포플러 잎들이 보인다. 한 무리의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학교를 가는 듯 남녀를 구별 지어 걷는다. 이곳에서 가이드의 친척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반 가정 집을 방문하기란 좀처럼 기회가 없는 일이어서 우리들은 서둘러 간단한 선물을 준비했다.
완연한 가을 풍경이다. 산 위에 지은 성 위에 올라가니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햇살 아래 익어가는 붉은 감들, 집 옥상 위에 널린 겨울장만 곡식들과 주황색 둥근 호박이 너무나 눈에 익어 정겹기까지 하다.
평화로운 산간 농가. 노인이 길가에서 파는 나무 골동조각품들이 먼지에 뽀얗다.
라호르 (제 2도시)
전통과 패션이 이룬 조화 (1)
이슬람바드로 다시 돌아왔다. 쿠데타가 끝난 도시는 조용하기만 하다. 독일 대사관에서 괴테의 2백 50주년을 맞이하는 시 낭송 모임이 있다. 독일인들이 괴테의 시를 슈베르트 곡에 맞추어 부르고 가든 파티에선 여러 나라 사람들과 모처럼 유쾌한 시간을 가졌다.
정원의 조각품이 현대 감각을 살린 주변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강한 금속성의 느낌을 한결 부드럽게 해 준다. 대사 부인이 갤러리에서 작품 발표를 한다는 팜플렛을 주었다. 일주일간의 산악여행에서 다시 문명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다그마는 매일 새로운 스케줄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파키스탄의 미술사 세미나에도 갔다.
서방 문화 로마의 영향으로 불교 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불교 조각 중 보살상 뒷면 평평한 부조상의 얼굴 모습과 옷 주름 표현이 로마적 전통과 일치하여 동서문화의 접목을 엿볼 수 있다. 장기간에 걸친 문명의 발전과 쇠퇴를 반복한 인더스 문명의 특징은 시공의 차이 없이 균일한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모임에서 알게 된 파키스탄 여성이 사촌의 결혼식이 열리는 라호르에 초청을 했다. 서양 문화가 섞인 민속 의상을 어울리게 입었다. 대우에서 운영하는 고속버스를 타고 라호르로 향했다. 여자 셋인 우리들은 한 명의 여자가 더 오기를 기다렸다. 한 중년 여인이 탔다. 차는 출발하고 안내양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메아리 진다.
파키스탄 대중 가요의 여가수 노래는 마치 새 소리를 연상 시키듯 고음으로 에로틱한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옆자리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여인은 코란경을 꺼내어 읽고 있다. 대우 버스 안의 모습은 눈에 익숙하기만 하다. 길가에는 허름한 집들과 비가오지 않아 메마른 대지가 끝없이 스쳐 지나간다.
라호르는 전통과 패션 도시답게 상가건물들이 쭉 늘어선 것이 인상적이다. 매연과 소음, 오토바이 소리와 오래된 소형차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택시를 서로 타려고 아우성이다. 다그마 친구의 주소를 보고 찾다가 길을 잃어 뱅뱅 돌다 겨우 전화로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집에 들어서니 안 주인은 유럽의 딸 집에 갔고 큰 개와 하인들만 있다. 독일인들은 학생 때부터 여행을 즐기며 친지들 집을 서로 빌려주고 도움을 서로 받는다 한다.
안주인은 없어도 깨끗한 손님 방에 파키스탄 여행 안내 책자가 비치된 것을 보고 주인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다.
거실의 팔각형 대형 유리 테라스를 통해 내다보이는 정원은 파란 하늘과 함께 한 폭의 그림이다. 라호르 제 2의 대도시는 영국의 지배로 빅토리아 건축물이 많고 인도와 가장 연관이 깊은 도시이다.
라호르 박물관에는 간다라 불교미술과 인더스 유역의 출토품 돌은 물론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중국 도자기, 비단 등 예술품으로 가득 차 있다. 결혼식에 입고 갈 의상을 사러 시장에 갔다. 수 많은 의류가게는 길거리에서 염색을 하고 있고 걸인 차림의 행인들의 거리를 메워 무질서 하게 보였다.
라호르 2
시장의 골목 안은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집에서 가져온 무늬를 옷에다 수를 놓아 주는 것이 이채롭다. 저녁에 달리 갈 곳도 없던 차에 집주인이 아메리칸 클럽에 가자고 해 흔쾌히 받아 들였다. 다이너 같은 식당이 있고 수영장과 테니스 코트, 할로윈 장식으로 꾸며진 클럽이 이색적이다.
어디를 가나 경찰들이 삼엄한 경비를 한다. 다음 날 결혼식 전 축제 행사인 맨디에 갔다. 신부는 행복을 상징하는 노란 옷을, 신랑은 흰 옷을 입고 있다. 남자석과 여자석이 구분 되어 있고 꽃들로 장식된 의자와 풀밭에 깔린 카페트 위에 둥근 쿠션을 놓고 기대어 앉았다.
신부 친구들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흰 옷을 입은 신랑 친구들과 어울려 춤을 추기 시작한다. 다그마는 남녀가 같이 춤추는 것을 처음 본다고 한다. 다그마는 지난 번에 간 맨디는 오늘처럼 자연스럽지 않았다고 했다.
이 곳의 결혼식은 99%가 중매로 이루어지며 카스트 제도의 경제력에 따라 집안끼리 맺어진다고 한다. 여자는 경제적으로 독립을 할 수 없기에 아들을 선호하는 사상이 만연되어 있고 남자는 생산자, 여자는 소비자라는 생각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풀밭 저 편에 앉아있는 남루하고 바짝 마른 하인들이 청춘 남녀들이 춤추는 것을 부러운 듯 쳐다보고 있다.
춤추는 이들은 부잣집 신분을 나타내듯 얼굴이 희고 살이 쪄 보인다. 머리부터 보석으로 치장해 화려함이 축제의 화려함을 더 해준다. 식전 행사에서 해나라는 풀을 물에 타서 신부의 손등에 부어주며 잘 살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돈을 주기도 한다. 신부의 할아버지가 영국계 피가 섞여서 부유해 보이고 신부의 어머니는 실크 사라옷과 파이프에 담배를 물고 악어 가방을 든 채 분주하다.
행사에서는 콜라와 빵 등 계속 먹을 것이 나온다. 밤 12시가 넘었지만 축제의 분위기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다음날 직접 결혼식에도 갔다. 부유한 집안끼리의 결혼식이라 수 많은 하객들로 붐볐다.
비디오 카메라 기사와 사진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신랑 신부 가족들도 사진 찍기에 한창이다. 결혼하지 못한 처녀들은 선을 보이기에 좋은 장소라는 인식 때문에 한껏 멋을 부리고 참석한다고 한다.
여기저기에서는 부를 상징하듯 특수층만이 가지고 있는 핸드폰 소리가 양복을 말끔히 차려 입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울린다. 신부는 새색시처럼 눈을 내려 뜬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머리에 꽂은 금 핀들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뉴욕 한국 학교에서 한국문화를 가르치며 매 학기 14주 Lesson Plan(학습 지도안)을 작성하면서 이민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한국문화를 가르치기 위해 고심했는데 97년 올해는 한국에서문화유산의 해로 지정되어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그 동안 해왔던 일에 대해 자신감도 가지며 하던 일을다시 한번 정리해 보는 기회를 가져본다.
“민족의 얼, 문화유산 알고, 찾고 가꾸자.
문화유산 사랑하여 민족문화 꽃 피우자”
라는 글을 읽고, 과연 이 미국 땅 토요 학교에서 가르쳐 봤자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라는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학생들에게 우리 문화의 우수성과 소중함을 가르치는 교사 자신이 자부심을 갖고 그들에게 전달하는 자로써의 책임을 더욱 느낀다.
한국문화 통합 이미지 10개의 도안 그림 디자인을 보고 그 동안 가르쳐왔던 지도안과 일치되어서 이제껏 해왔던 일이 현실성이 없는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확신도 가져보았다. 한복, 한글, 김치, 태권도, 불국사, 설악산, 종묘 제례악, 세계적 예술인, 탈춤, 고려인삼 등 선정된 도안을 오려 지도안에 부치고 이번 새 학기 과제물과 수업시간에 다뤄볼 교재와 준비물, 시청각 자료를 수집하여 본다. 한국문화 교재는 책으로 읽기보다는 직접 만들고, 그리고, 먹고, 눈으로, 손으로 익숙하게 하고 가정에서 가족들과 함께 접하게 하여 이러한 것을 습관화하게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다.
또한 계절에 맞게 미국과 한국 명절의 공통점을 찾아 연결시키고 음악, 미술, 무용 등 예술적 방향으로친근감을 유도하며 이제껏 해왔던 수업시간을 좀더 유용하게 계획해보면
1)한복의 아름다움의 평면성을 종이 접기로 하여 서양의 입체재단을 더하여 아이들의 창의성 있는 종이 펴기, 세우기를 하여 실생활에 활용하는 액세서리로 만들어본다. 예를 들자면 버선, 부채, 복 주머니, 매듭을 종이로 만들어 장식품으로 응용한다.
2)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노래로 외우게 하여 율동동작을 같이하여 외우게 하는 것이다.
3) 깍두기 무를 자를 때 사각형이 아니라 학생들이 원하는 모양으로 잘라보며 그들로 하여금 흥미를 유발 시키고 백 김치의 순한 맛을 샐러드, 피클과 맛을 비교시키며 버릴 것 없이 만두, 찌개, 부침개 등을만들 수 있는 알뜰 주부들의 지혜를 알게 한다.
4) 태권도는 필자 자신이 빨강 띠에서 올해 검정 띠인 유단자가 되었지만, 나이든 사람들도 육체와 정신 수양으로 하는 것을 알리며 단순한 운동이 아니라 “도”를 중시하는 것, 즉 한국이의 기상이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5) 불국사의 사진과 여름방학 한국을 방문하는 학생들에게 명승지 답사와 한국의 건축 모양을 가을학기에 설명할 기회를 주어 한국의 유교사상과 불교의 역사적 영향을 알게 해주고 싶다.
6)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단풍과 설경으로 보여주며 사계절 한국의 기후 풍토와 생활습관을 알려준다.
7) 종묘 제례악은 궁중음악을 들려주며 우리의 악기와 서양 음악의 차이점을 학생들 수준에 맞게 이해 시킨다.
8) 세계적 예술의 도시인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활약상을 스크랩으로 보여주며음악, 미술, 무용, 연극 등 너무나 가까이 있기에 그 존재를 잊고 있기에 학생들의 role-model이 되게하여 전시회, 음악회, 발표회를 가보도록 권유한다.
9) 탈춤의 탈을 종이접시에 구멍을 만들고 그리게 하고 색종이로 부치고 고무줄로 끼워서 쓰게 하여 사물놀이 때 아이들이 신나게 춤추게 하니 이곳에서 자란 아이들인데도 어깨춤을 추는 것을 보고 그 속에흐르는 혼을 나는 느꼈다. 징, 꽹과리, 북, 장구를 한번씩 쳐보면서 신나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 자신도 장구 배우기가 힘들고 귀에 익숙하지는 않아도 그 흥을 알고 창을 들으면 가슴속이 후련해지며 옛날 할머니의 모습이 그 속에서 배어 나오는 것을 느끼곤 했다.
10) 고려인삼, 여러 가지 한국 고유의 차를 알려주며 세계적인 인삼차와 한국인들이 즐기는 다도의 향기를 느끼게 하며 정서를 알게 해 준다. 나 자신이 이런 문화유산을 알고 가르치며 거기서 얻는 것이 학생들에게 Korean American으로서 Identity를 가지며 그들 자신은 물론 자식들에게 까지 전달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문화란 하루 아침에 이뤄지지 않고 수 백, 수 천 년을 내려오면서 기후와 지형, 민족성에 근거를 두고역사와 함께 변형, 발전되어 가는 것 같다. 미국학교에서 한국 문화 소개 프로그램에 이제 음식만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준 다음 그들에게 재 창조의 기회를 주어서 의견을 들어야 할 것 같다. 오천년 역사의 한민족의 긍지를 안고 조상들의 유형, 무형의 유산을 후손들이 기리 보존하는 것이우리들의 책임이며 학문적으로 일본이 우리의 것을 전달, 변형하여 자신들의 것이라는 것에 반론을 하기에 앞서 우리들이 지켜나가는 힘을 길러나가야 한다. 한국 역시 거품경제에서 이제 그 거품을 거두어내고 그 밑에 남은 의식을 일깨워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 가난의 시절을 생각하며 진정으로 자식들에게 무엇을 심어줄 것인가를 깨달아 올바른 생각에서 꿈을 키우게 하는 것이다.
우리들 역시 미국 역사를 배우며 한국을 떠나 이곳 American Dream을 향하여 온 이유를 정립하여부모들의 세대를 이해시키고 이곳에서 뿌리를 내려가는 것이다. 97년 문화유산의 해를 맞이하여 나의교육 방침을 정리해보며 2월 거리마다 Valentine의 Heart속에 정축년 소의 근면한 모습을 그려보게하여 12간지 동물을 이야기하며 가족들의 띠를 말해보며 생활 속의 문화유산을 실천해 본다.
부모가 보여주며 알려주는 것, 그리고 몸에 길들이게 하는 것이 가장 큰 교육의 습득 효과를 볼 수 있다. 지식을 중점으로 하는 학교 교육보다 더 중요한 인생교육은 가정 속에서 배워 나가는 것이다.
Nature is Art, art is nature. Art is anywhere! 1997
예술(음악, 무용, 미술, 문학, 영화) 환상(illusion) 자기착각, 허구가 아니라 인간 본연의 모순 갈등을해소시키고 근원적인 물음을 깨닫게 하며, 각자의 표현방법으로 추구하게 하는 길인 것이다.
사이버 세대들에게 정신적 감정표출=예술 시공을 초월하는 자연의 주제를 주어야 한다.
그 속에서 초월한 무한 속으로 가는 길 진, 선, 미로 향하는 것이다.
동서양의 다양한 민족과 지형의 문화적 차이 전통을 인정하며 다수의 양식이 공론하고 인정하는 멀티컬쳐(Multiculture) 시대가 21세기에 열린 것이다.
컴퓨터는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소도구의 매개체이며 시각, 청각에 의하지 않는 제 6감을 이해하는 초능력 텔레파시(Telepathy)는 자연과의 교감 속에서 주어진다. 고유한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듯 자연은 그 모든 것을 포함한 대 우주의 발상인 것이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지구의 자전처럼 자연은 그 속에서 곡선에서 원으로 향하여 가고 있다. 직선의 정지가 없다. 끝과 시작은 한 점에서 출발한다. 그 점은 이 순간 마음의 작동에서만이 선을 이어간다.
심장의 박동소리처럼……
본래 시간은 없다. 보이지 않는 것 수많은 점의 연속 속에서 우리들은 존재가 된다. 12월의 마침표 이별은 새해 1월 만남의 시작을 주듯이 생과 사의 굴레로 그 안에서 주어진다.
작자 미상의 “미인도” 1997
메트로 폴리탄 한국 미술 특별 전시실에서 같이 다닌 일행들이 떠나고 나 혼자 남게 되었다. 조용해진전시실에는 침묵과 정적만이 흐르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문화유산 22점 예술품의 아름다움 속으로사색의 긴 여행을 하게 되었다.
고려 불화의 정교성과 원근법을 쓰지 않고 5색 향연(청, 황, 적, 백, 흑)의 오묘한 입체감으로 탱화의정신적 깊이를 표출한 정성 들여 채색한 면들이 보여진다. 청동의 징에서 극락세계의 상징구름 무늬는이승의 영화를 저승까지 누리며 살고자 했던 염원이 들리는 듯 하며 연화무늬 연꽃의 문양은 정토왕생을 속세에서 만들려고 도자기, 기와에서 볼 수 있다.
고려 상감청자의 비취색 빛나는 고색 창연한 빛이 여러 자기에서 빛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통치이념으로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한 마음의 공부를 기본으로 참선을 위주로 하는 예술가의 의지와 17세기 이후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관념적인 회화의 세계를 떠나 현실을 발견하고 그림의 주제가 산수화가 아닌 풍속화, 인물화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사상, 시대 배경, 사회적 이슈, 작가의 생애와 인접분야를 알아야만 그림의 이해도를 높이고 작가와 교감을 통해 영감을 가질 수있는 것이다.
단원 김홍도는 화원 출신으로 농촌의 생활을 생생한 흔적으로 풍속화첩에 묘사했다. 전시실에 있는 “대장간”, “기와 이기”에서 그 당시 모습을 상상하게 되어 옛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 하다. 혜원 신윤복은중세 말기 변모와 혜원 풍속도첩에서는 도시생활을 주제로 하여 “시장길” 에서 두 여인의 모습에서처럼 여러 계층의 여인들을 그렸듯이 도화서에서 나와 속화를 그리며 표현하려는 창작 태도, 인물 묘사력, 근대 지향성과 자수성으로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 조선 후기 풍속화로 많은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것으로 친근감이 드는 이유는 책과 달력에서 많이 보아서 그런 것 같다.
풍속화는 조선시대 실학의 발전, 민간어를 사용한 한시, 판소리, 한글소설이 시대정신으로 사대부에서속화라고 부른 것은 봉건사회의 틀을 벗어나려는 변동기의 유교사상이 선비 화가나 화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두 작가는 화원 출신이기에 그나마 작품이 보관되어 대할 수 있지만 낙관 없는 민화처럼 이름 없는 작가들도 많은 것이다.
매번 올 때마다 발길을 멈추게 하여 시선을 끄는 것은 작가 미상의 “미인도”였다. 해남 윤씨 종가에 소장된 미인도로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 작품은 갸름한 흰 얼굴에 가느다란 눈썹과 긴 눈매, 붉은 입술, 수줍은 듯한 표정, 가냘픈 어깨와 짧은 삼회장 저고리의 좁은 소매로 두 팔을 머리에 두고 긴 손가락 사이에 낀 노란 반지가 보인다. 감추어진 여체의 은근함과 고혹적인 자태가 황진이, 성춘향 등의 옛여인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 주었다.
조선시대의 유행으로 사회문제화까지 되어 왕명이 떨어져도 여인들에게 가체의 크기로 신분을 과시하였다는 타래 머리를 이고 서 있는 저 여인은 살며시 손을 내리며 나에게 바로 옆 유리 진열장으로 손짓을 하며 가리킨다. 그것은 조선백자였다. 눈같이 흰 설 백자 높이 40센티미터의 투명한 유백색의 파르스름한 색을 담기도 하고 청백색의 푸른기가 미세한 빙렬이 그물처럼 나 있는 둥글고 풍만한 선, 여유롭게 서 있는 미인도의 치마폭선의 흐름과도 같았다. 바로 그 선이었다.
이번 한국 미술전에서 ‘아는 것만큼 보고 그리고 즐기다’ 라는 것을 새삼 깨닫고 역사적 영향을 준 불교와 유교를 나는 얼만큼 알고 있는가? 생각하게 하는 전시였다.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으며 서로 영향을주고 받으면서 동양의 삼국 미술을 봐오면서, 중국은 사실적이며 정교한 색채가 강렬하고 일본은 장식성과 도안성으로 시각적 효과가 뛰어나며 한국의 미는 사실성을 초월하여 해학성과 소박함을 추구한단순미가 돋보였다.
13세기~19세기의 긴 여행을 하고 나서 돌아와 보니 옛 것에서 새 것이 그 속에 담겨 있는 것이었다.
한글 가치의 재 인식 1997
한글 학회의 초청으로 2주간 우이동에 있는 연수원에서 무더운 여름을 보냈다. 25개국의 교사 45명이강의를 받으며 합숙하며 동고동락했다. 북한산을 둘러싸고 있는 정기를 받으며 지낸 날들이었다. 미국,중국, 유럽, 남미, 러시아 등 지구촌의 한국인들이 모여서 각자 가르치고 있는 학교의 실정을 얘기하며,우리말의 역사, 훈민정음, 문법, 맞춤법, 남북한의 표준발음 억양의 교육, 문화, 교수법 등을 배웠고 특별활동으로 한국영화에 대해 그룹 토의를 했다. 1백 50년 전 고려인의 자손, 이민 4세의 러시아에서온 국립발레단이며 한국 학교 교사, 부모들도 모르는 조선족 할머니의 말을 배워서 가르치는 젊은이들을 보았다. 한국인의 말과 글이 있다는 긍지가 자손들에게 스며들면 몇 세대가 흘러도, 어디서 살아도,다시 만나도 연결 되는 것 같다. 연수원의 푸짐한 한식을 먹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 춤과 사물놀이연습으로 한국인의 멋과 흥 속에 화기애애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세종대왕 기념관에서 14폭의 동양화, 세종대왕 일대기, 한글실의 다양한 서체, 과학실에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천문기구, 국악실의 악기들을 보면서 감개무량해 학생들에게 보여줄 사진을 찍었다. 여주 세종대왕릉에 가서 참배도 하고 한여름의 무더위로 지친 마음을 강의에 대한 열기로 식혔다. 강의를 통해 한국학회의 사랑과 민족 얼이담긴 한국어를 바르게 쓰는 법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아름다운 말을 지켜가기 위해서는 고운말 쓰기,한자와 영어의 남용 등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통일이 오기 전에 남북 공동의 한가지 글자 ‘한글’을 위하여 언어비교는 실로 중요한 문화 정책이다. 언어란 정체성, 동질성, 문화유산, 한겨레의 전통 속에서 우리의 말과 글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지금 한,영 공용화 문제로 혼동 상태이다. 우리는 겨레 문화를 지켜가며 문화적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 다민족 문화를 이해하되, 고유의 전통을 서로 나누고 즐겨 차원 높은 선진구 문화 시민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미국 다민족 문화 행사 중 ‘한국의 날’ 에 학부모들이 학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쳐 주는 시간이 있다. 이 행사는 자음, 모음 24자로 나라이름을 붓글씨로 쓰는 것인데, 이를 본 사람들이 한글로 쓰여진옷을 사 입고 와서 뜻을 물어오기도 해 뿌듯했다. 지구촌이란 말이 등장할 정도로 세계는 지금 활발한교류로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자국어 문화를 가진 국가만이 독자성 있는 문화로 민족의자존심을 지켜갈 수 있다. 말, 글, 얼이 삼위일체가 되어 유지되는 우리의 정체성은 이곳에 뿌리내려 살아갈 2세들에게 남겨줄 유산이다. 세종대왕 어록에 ‘그 일을 쉽게 여기고 하면 성공하지 못하나, 그 일을 어렵게 여기고 하는 이는 반드시 성공한다’ 라는 말을 다시금 되새기며 이번 연수에서 느낀 여러 문제점을 풀어줄 우리 2세들에게 꿈과 희망을 걸고 싶다.
파키스탄 기행문 1997
이슬라마바드 (1)
여행을 한다는 것은 떠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관광개발이 되지 않은 곳에 가서 고생을 하고 나면 다시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으로도 의미가 주어진다. 파키스탄 여행을 결정 한 후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책과 인터넷에서 찾았으나 별로 알려지지 않아 힘들었다. 모든 이들이 걱정을 하기에 우선 오지로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적 체험으로 남들이 가보지 않은 곳을 가야 한다는 사명감마저 들어서 여행 준비를 하였다. 울리와는 5년 전 같이 독일여행을 하였고 다그마는 파키스탄 독일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남편이 내년이면 근무가 끝나기에 우리들을 초청해 주었다. 독일인들 답게 여행 스케줄과 사전 준비물, 상비약, 자선 단체에 전해줄 선물 등을 알려 주었다. 남편은 나를 공항에 데려다 주면서 여권과 돈을 챙겨주고 건강과 안전을 염려해주었다.
아이들은 엄마의 모험심을 격려해 주며 할 일 다 잘하니 많이 보고 느끼고 쓰고 찍으라며 숙제 아닌 숙제를 준다. 가끔은 가정에 주부가 없을 때 그 역할의 소중함을 가족들이 알아야 한다고 조그만 위안을 삼으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독일 프랑크 프루트 공항에서 울리를 만났으며 아랍의 두바이를 거쳐 이슬라마바드 공항에 도착했다. 이틀간 비행기를 3번을 갈아타니 피곤과 시차로 온 몸이 나른해져 온다. 먼 곳에 왔구나 느끼는 것도 잠시, 공항에 내리자 마자 고온 건조한 아열대성 기후의 후끈한 열기가 코 끝을 스치면서 3층 대합실은 인파들로 북적거린다. 흰 색의 파키스탄 민속 의상을 입은 이들이 가족 한 명에 친척 수 십명씩 환송을 한다. 한국의 60년대 공항처럼 수도의 공항이지만 그 흔한 카트마저 보이지 않는다. 가방 2개를 찾은 뒤 울리는 다그마를 찾으러 먼저 나갔다가 한참 후 짐을 운반해 주는 일꾼과 함께 왔다. 다그마와 칼에게 인사로 포옹을 하니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린다. 다그마의 집으로 가는 길에 이슬라마바드 신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1959년의 새도시 이 곳은 고원지대 푸른 수목과 정부기관 각 국 대사관이 있는 곳답게 말끔한 인상이며 국민소득이 5백달러가 넘지 않는 가난한 나라인데 핵 연구소 앞에 미사일 모형이 서 있다. 경제 사정은 최악인데 핵 무기 제조기술과 미사일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군부독재와 민주화의 갈등, 남-북한의 관계도 있다. 이슬람교 영향인지 거리엔 여자가 눈에 띄지 않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 역시 낮아 오로지 집안 일로 평생을 보낸다 한다. 첫 여수상 부토가 있었지만 군부의 압력으로 중도에서 끝났고 숱한 외세 침략으로 민족 자체도 유목민 훈족, 터키족, 아랍족, 몽골족 등 다민족이다.
파키스탄 기행문
이슬라마바드 (2)
파키스탄은 ‘신성한 나라’ 라는 뜻이다. 히말라야 산맥과 연결된 북부 산악지대와 인더스 강 유역 평원지대 중국, 아프카니스탄, 인도 등과 접하고 있어 실크로드 동 서 문화의 연결지 역할을 하고 있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47년 독립하였다. 과거 인도의 한 영토였기 때문에 인도와는 여러모로 밀접한 역사를 갖고 있다. 1억이 넘는 인구, 열악한 환경, 오랜 옛날 기원전부터 이미 고도의 문명이 있었고 6세기 석가모니가 불교를 전파했고 기독교와 이슬람교, 힌두교가 함께 존재하는 곳. 그러나 지금은 국민 90%가 이슬람교인이다.
국어도 우르두어가 있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지만 각 주의 언어가 다른 점이 단결을 저해하고 있다.
다그마의 집 근처는 대사관들이 많은 탓인지 집안에도 보초병들이 총을 들고 서 있다. 집안에 들어서니 4명의 가사 공용인들이 인사를 한다. 모두들 남자이다. 인건비가 싸다고는 하지만 식민지 시대부터 지배자들이 누린 부의 영향같다. 부부 2 식구인데도 하인들은 이보다도 더 많다. 방에 들어서니 깨끗한 시트와 꽃 등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니 긴장이 풀리는지 잠이 쏟아져 온다. 가족에게 잘 도착했다는 전화를 하고 따뜻한 차 한 잔과 샌드위치를 먹고 일단은 쉬기로 했다. 잠시 눈을 붙인 뒤 깨어나 커튼을 젖히니 해가 지려고 한다. 부엌에서는 죠가 열심히 요리하고 또 한 방에서는 다듬이질 하는 이가 복도를 지나는 나에게 거수경레를 한다. 뮤니엘은 영어를 잘해서 집사처럼 집안 일을 해주고 늘 시선을 아래로 하고 조심스러워 한다. 준비한 선물을 주니 고마워 한다. 다그마와 2주간에 걸친 여행 스케줄을 다시 의논한 뒤 지도와 5일간 산악지대로 떠날 비행기 표, 호텔 예약, 화전 등을 위해 시가지로 나왔다. 대리석으로 지어진 큰 모스크 사원 같은 빌딩이 여럿 보인다. 역사적 자취가 흔적조차 남지 않아서 이를 보여주기 위한 건축인가 보다. 국제 정치면에서 비동맹 제 3 세계로 주도해 온 이 나라의 수도에는 군부독재, 인도와 중국과의 국경 분쟁, 아프카니스탄 난민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져 있는 모습이 곳곳에 눈에 띄인다.
테러 문제로 어디를 가나 삼엄한 몸 수색이다. 웃 도리 스랠워, 바지 콰미즈, 긴 스카프 듀파타 등 민속 의상을 사서 입었다.
요즘 파키스탄 풍 긴 윗도리와 자수 스카프 등이 세계패션으로 자리잡아 버그돌프 굿맨 백화점에도 진열되어 있던 것이 기억난다. 유명 디자이너 옷들을 떠올리며 파키스탄 민속 의상처럼 저렴한 가격도 있구나 생각하니 이곳 수공비가 얼마나 싼가를 금세 알 수 있다.
케시미어와 비슷한 큰 담요를 북부 여행에 좋을 것 같아 샀다. 음료수, 과일, 스낵 등을 사고 여행사에 가서 지프차를 렌트하니 가이드와 운전수가 산악 여행의 주의점과 도시의 특성을 말해준다. 여행사 근처에는 한 벽면에 신발을 벗고 엎드려 기도하는 이들이 있다.
실크로드 가는길 (1)
가이드의 사촌 형 집에 갔다. 반갑게 맞아주며 뺨이 붉은 처녀가 인사를 하곤 수줍게 숨어 버린다. 처음으로 파키스탄 여성과 마주해 본 것이다. 방에 들어서니 벽의 하얀 천 가리개 위에 목단수가 놓여져 있다. 중국산 울긋불긋한 이불이 놓여있고, 그릇과 보온병 역시 중국 냄새가 난다.
생활 용품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제품을 써서 그런지 한국 시골 농가에 온 것처럼 정겹다. 손수 재배한 조그만 사과를 칼 대신 손으로 쪼개서 먹었다. 구운 빵과 붉은 빛 뜨거운 차에 밀크를 듬뿍 담아서 준다.
창문 너머로 여인네들이 맡에서 일하는 모습이 눈에 익다. 공기가 맑고 스트레스가 없어서 장수하는 마을로 널리 알려진 이곳은 한가롭기만 하다. 아이들 모습은 서구적인 눈과 오똑한 코, 갈색머리이지만 나이가 들면서 동양적으로 면해 주름이 얼굴 전체를 덮는다. 이슬람 문화권에 있지만 또 다른 산악인 다운 그들만의 풍속을 지니고 있다.
나무지게를 지고 가는 여자들의 당당함, 밭에서 맨발로 일하며 두툼한 손으로 땅을 일구며 살기에 노동이 주는 신선함과 소박함이 보인다. 길가에서 손 등을 터 있고 머리는 헝클어지고 때묻은 옷을 입었지만 두 눈만은 초롱초롱 빛나 강한 인상을 주는 아이들이 우리들에게 손을 흔든다.
비포장 도로로 흙탕물이 흐르는 시냇물, 감나무와 버드나무, 닭들이 뛰어다니며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 노는 곳.
멀리 보이는 카람코람 산맥에 흰 눈이 덮여있다.
하늘과 맞닿은 듯 보이는 그 산에는 신들이 살기에 아무도 올라가지 못한다고 한다. 일본 등산객이 등반을 하다가 실종되면서 그 가족들이 이들을 추모해 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까치가 세 번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가이드의 말에 동양 문화권에 가까운 그들에게 애정이 간다.
이글 네스트 산장에서 밤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과 은하구를 바라 보았다. 광활한 밤 하늘 아래서 우주의 숨결 같은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높은 고도의 강 추위 속에서 훈자 와인을 마셨다. 술이 국법으로 금지 되었으나 이 산속은 예외였다.
해발 8백미터 만년설이 덮인 산 속에서 나는 영혼들이 저승으로 가는 길이라는 은하수를 바라본다. 우주는 거대한 공간 별들의 집단이다. 50억 년 전 우주에 구름 하나가 붕괴되어 막대한 양의 가스와 먼지 구름을 일으켜 지구가 태어났을까?
우주의 신비, 미지의 공간, 하늘의 신화 그리고 지상과 천국을 연결하는 천상의 강 은하수는 여전히 아름답게 빛을 발하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이 밤에도 여행자의 가슴 속에서 빛나고 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먼 동이 트는 해돋이를 보기 위해 바위에 걸터 앉았다. 흰 눈 덮인 5개의 봉우리가 잠시 후 붉은 분홍 빛으로 물들어간다. 스테이지 위에서 조명이 비춰지듯 기계적으로 변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거대한 산을 움직이는 것 같다.
아침은 이렇게 눈 위에서 시작됐다. 상그리아로 떠나는 길은 산들이 마치 큰 돌 같다. 흰 돌의 나열이 계속 이어지고 가도 가도 끝 없이 돌들이 보인다.
실크로드 가는 길 (2)
털 위에 붉은 줄을 그은 양 떼들이 끝없이 이어져 지나간다. 낙타도 가끔 눈에 띈다. 카라반을 떠나던 옛날 사람들이 눈에 선하다. 상그리아에 도착하니 명소답게 이색적이다. 10월인데도 한적하고 산 속의 고적함까지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다. 객실에 들어서니 방 3개와 벽난로, 거실, 다이닝 룸 등이 나름대로 깨끗이 정돈되어 있다.
이틀을 묵기 위해 짐을 풀고 물건을 정리 한 뒤 자선 봉사단에 전해줄 약품과 옥 등을 챙겨 스카드에 사는 여성 단체 회장을 만나러 갔다. 마을 여자들이 한 방에 모여 수도 놓고 인형도 만들어 진열해 놓았다. 시멘트 바닥에는 카페트가 깔려 있지만 서늘하고 차갑기만 하다.
직접 이렇게 전달하지 않으면 중간에서 물건들이 사라지기에 어쩔 수 없다. 10여 명의 아낙네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지도자에게 배워가며 가내 수공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인이 미국에서 왔다고 하니 의아해 해서 아시안 어메리칸 이라고 설명했다. 점심 때는 갓 잡은 싱싱한 숭어 튀김과 감자 요리가 나왔다. 야채가 그리워진다.
약품을 전하기 위해 병원을 가니 마침 산모의 진통 소리가 들린다. 일하다 온 산모의 모습과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 하다. 아직도 이런 곳이 있다니 10 여명의 아이를 평생 낳고 일만 하다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이 곳에서는 유아 사망률이 50%에 이른다고 한다. 산간 지방의 열악한 위생시설, 동물 우리나 다름 없는 불결한 환경 때문에 병이 많다고 한다.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난다.
소비가 미덕인 풍족한 미국 생활에서 너무나 많이 낭비한 것이 죄처럼 느껴진다. 무엇을 불평할 것인가. 안락한 환경에서 게으르고 타성에 젖었던 안이함이 부끄럽기만 하다.
요즘 한국에서는 젊은이들이 오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하는데 풍요로움의 감사 이전에 절제의 중요성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여행의 산 교육은 나와 다른 이들의 생활을 통해 시야를 넓히는 것이다. 저녁 때 파키스탄의 허니문 커플과 식사를 같이 했다. 해가 지자 추워진 방에 히터가 없어 주변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신혼 여행중인 이들이 전 날 추워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불평하자 허니문인데 추울 것이 없지 않겠느냐고 말해 웃음꽃을 피웠다. 젊음과 사랑의 열기가 그들의 눈빛에 보인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그들은 파키스탄의 신분제도와 빈부차이는 정부차원에서 개선하지 않으면 개선되기 힘들다며 자신들이 조국 파키스탄의 정치, 경제 등 전반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쿠데타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다음 날 운전사와 가이드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지난 5일 동안 여행한 길을 단 3시간만에 비행기로 오니 허무하기도 하다. 만년설에 바짝 다가선 구름은 일렁이는 파도처럼 보인다.
‘어드벤쳐 트립’은 그렇게 무사히 끝을 맺고 다시 아열대성 기후의 도시로 돌아갈 예정이다.
훈자로 가는 길 (1)
계엄령이 선포되지 않았고 큰 일도 없기에 우리는 여행사의 전화 연락을 받고 떠나기로 했다. ‘어드벤쳐 트립’ 이 시작된 것이다. 군용 지프차에 파란색을 칠한 차와 운전수, 가이드가 우리 일행이다. 날씨는 청명하고 밤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시가지는 조용했다.
훈자로 가는 길.
열악한 도로 사정과 온갖 그림 장식이 된 트럭과 버스들은 사람들을 짐짝처럼 싣고 오간다. 사람들은 모두 영화배우 오마 샤리프 같이 깊은 눈과 수염이 있어 잘생겨 보인다. 할일 없이 거리에 앉아있는 이들은 무리를 지어 일거리를 찾고 있다.
구걸하는 사람들이 차를 세울 때마다 다가온다.
가이드는 파키스탄인이지만 갈색머리에 하얀 얼굴, 유창한 영어를 하며 셔츠와 바지를 입었다. 운전사는 민속의상을 입고 말 한마디 안하고 운전만 하는 신분이 다른 계급이었다. 롤러 코스터를 탄 것처럼 차가 들썩거린다. 앞으로 5일간 이렇게 달릴 것을 생각하니 고생이 시작이구나 싶다. 농가에 들어서니 가축들을 몰고 가는 농부가 보인다. 저녁 해질 무렵 기도하는 소리가 산 속을 휘어 감는다. 우-아-우 코란의 독경 독경소리가 문명을 거부하는 울부짖음 같기도 하다. 예언자의 말을 통해서 선언된 진리 코란을 통해 알라는 모든 피조물에게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법칙을 만들었다. 이슬람의 뜻은 복종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도는 하루 중 정해진 시간에 혼자서 알라신에게 다가서는 순간이다.
산 속의 호텔, 인더스 강이 흐르고 꽃 향기가 바람에 실려서 휘감는다. 어둠 속의 진분홍색 꽃들이 달빛에 빛나 밤의 전위를 더해준다.
꽃 향기가 이처럼 진하게 느껴지는 것은 산 속의 공기가 깨끗해서 일까? 여행자의 고독감에 예민해진 감성 탓일까.
산장의 밤 꽃 향기는 너무나 감미로웠다. 저녁은 차파디와 닭 찜, 과일과 야채 삶은 것으로 먹었다.
저녁 8시 모두들 로비에 모여 B.B.C TV 방송을 보기도 했다. 쿠데타 상황을 이곳 주민들은 모른 채 산을 지키고 산에서 살고 있다. 여행객이 없는 산장은 고요하고 산 속의 집들엔 불이 켜져 있다.
하이웨이를 따라서 인더스 강이 흐르는 산 길을 또 달린다. 가끔 버스들이 지나가고 트럭이 보인다. 가도가도 끝없는 산길이다. 서스펜스 다리를 지날 때 마다 삼엄한 경비와 신분 조사를 하고 여권을 보면서 가이드에게 우리에 대해서 묻는다. 여자들만의 여행은 감히 생각할 수 도 없고 그 지역을 잘 아는 가이드가 꼭 필요한 곳이다.
낙타가 있는가 하면 소들은 작고 희며 중앙 아시아의 풍경에나 나오는 양치는 소년들이 막대기로 양을 몰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띤다.
북부 산간 지방에 온 것 같다. 기름을 넣기 위해 주유소에 가면 먼지에 쌓인 가게에 남자들만 모여서 이야기를 한다. 과연 여자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길가에서 남자들이 손을 잡고 다니는 것도 볼 수 있다.
훈자로 가는 길 (2)
파키스탄 민속 의상을 입어보니 너무나 편하다. 긴 스카프는 차가 달릴 때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을 막기 위하여 몸을 감싸 편안 활동복이 되기도 한다. 글길트(Gllgilt)로 가는 길에 산이 3개 만나는 곳에서 사진도 찍고 산을 바라보며 명상을 하기도 했다.
자연은 대 경전이다. 다만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읽어야 한다.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솟아 오른 산은 만년설 눈 덮인 봉우리가 하얗게 빛나 암갈색의 산과 하모니를 이룬다. 수 만 년 전 바다는 만물의 생성지였고 지층의 융기운동으로 바다에 잠겼던 돌들이 산으로 태어난 것이다.
산은 남성이다. 바다는 여성이다. 장엄하게 우뚝 솟은 산은 하늘과 접하여 만년설의 눈을 녹여 계곡을 이루어 강과 바다로 흘러 든다. 산은 인간들에게 그 모든 것을 주고 바다는 그것을 감싸고 있다. 음양설은 대 자연의 신비와 생명의 근원을 깨닫게 한다. 적갈색 평평한 바위 위에서 수행하는 사람처럼 앉아 깊은 호흡을 해본다.
자연 숭배(샤머니즘)가 신앙의 근원일까? 바위 위에 부처의 그림, 원시 벽화의 주술적인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산줄기 너머로 실크로드가 한 줄기 외롭게 나 있다. 길의 원형은 물을 따라서 생겨난다고 했나.
동서 문화를 잇는 저 길은 중국의 서역진출과 로마로 이어지는 길이 아니었던가.
구도의 고행, 왕오천축국전을 쓴 고승 혜초의 발자취가 아직도 살아 숨쉬는 듯 하다. 하루 8시간 이상 차를 타고 다니니 온도의 급변화로 목이 아프고 고산지대에서는 고산병까지 나를 괴롭혔다.
중국 국경지대에는 한자와 아랍어가 동시에 쓰여있다. 차가운 바람 얼음으로 덮인 강으로 몸이 바람에 실려 날아갈 것만 같다. 코발트 블루의 하늘 아래서 몸은 자주 휘청거렸고 머리가 아프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며 구토를 느껴야 했다.
아스피린을 먹고 차에 누워도 빙빙 도는 것 같다. 산소 결핍증으로 체력의 한계가 온 것이다. 몸을 지탱할 수 없으니 눈을 감고 호흡만 할 뿐 춥고 배고프니 이보다 더 불쌍한 것은 없을 것 같다.
떠나온 곳의 안락함을 그리워한들 너무나 멀리 와 있다. 충분한 휴식과 물을 많이 마신 뒤 일행들의 염려 속에 가까운 호텔에 들러 서둘러 점심을 먹었다. 아침 햇살이 창가에 들어온다. 호텔 창문을 여니 기막힌 절경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훈자에 왔다. 장수하는 마을 돌담집 돌이 산 위에 보이고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키 큰 포플러 잎들이 보인다. 한 무리의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학교를 가는 듯 남녀를 구별 지어 걷는다. 이곳에서 가이드의 친척집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반 가정 집을 방문하기란 좀처럼 기회가 없는 일이어서 우리들은 서둘러 간단한 선물을 준비했다.
완연한 가을 풍경이다. 산 위에 지은 성 위에 올라가니 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햇살 아래 익어가는 붉은 감들, 집 옥상 위에 널린 겨울장만 곡식들과 주황색 둥근 호박이 너무나 눈에 익어 정겹기까지 하다.
평화로운 산간 농가. 노인이 길가에서 파는 나무 골동조각품들이 먼지에 뽀얗다.
라호르 (제 2도시)
전통과 패션이 이룬 조화 (1)
이슬람바드로 다시 돌아왔다. 쿠데타가 끝난 도시는 조용하기만 하다. 독일 대사관에서 괴테의 2백 50주년을 맞이하는 시 낭송 모임이 있다. 독일인들이 괴테의 시를 슈베르트 곡에 맞추어 부르고 가든 파티에선 여러 나라 사람들과 모처럼 유쾌한 시간을 가졌다.
정원의 조각품이 현대 감각을 살린 주변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강한 금속성의 느낌을 한결 부드럽게 해 준다. 대사 부인이 갤러리에서 작품 발표를 한다는 팜플렛을 주었다. 일주일간의 산악여행에서 다시 문명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다그마는 매일 새로운 스케줄로 우리를 안내해 주었다. 파키스탄의 미술사 세미나에도 갔다.
서방 문화 로마의 영향으로 불교 미술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불교 조각 중 보살상 뒷면 평평한 부조상의 얼굴 모습과 옷 주름 표현이 로마적 전통과 일치하여 동서문화의 접목을 엿볼 수 있다. 장기간에 걸친 문명의 발전과 쇠퇴를 반복한 인더스 문명의 특징은 시공의 차이 없이 균일한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 모임에서 알게 된 파키스탄 여성이 사촌의 결혼식이 열리는 라호르에 초청을 했다. 서양 문화가 섞인 민속 의상을 어울리게 입었다. 대우에서 운영하는 고속버스를 타고 라호르로 향했다. 여자 셋인 우리들은 한 명의 여자가 더 오기를 기다렸다. 한 중년 여인이 탔다. 차는 출발하고 안내양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메아리 진다.
파키스탄 대중 가요의 여가수 노래는 마치 새 소리를 연상 시키듯 고음으로 에로틱한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옆자리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여인은 코란경을 꺼내어 읽고 있다. 대우 버스 안의 모습은 눈에 익숙하기만 하다. 길가에는 허름한 집들과 비가오지 않아 메마른 대지가 끝없이 스쳐 지나간다.
라호르는 전통과 패션 도시답게 상가건물들이 쭉 늘어선 것이 인상적이다. 매연과 소음, 오토바이 소리와 오래된 소형차들이 거리를 메우고 있다. 택시를 서로 타려고 아우성이다. 다그마 친구의 주소를 보고 찾다가 길을 잃어 뱅뱅 돌다 겨우 전화로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집에 들어서니 안 주인은 유럽의 딸 집에 갔고 큰 개와 하인들만 있다. 독일인들은 학생 때부터 여행을 즐기며 친지들 집을 서로 빌려주고 도움을 서로 받는다 한다.
안주인은 없어도 깨끗한 손님 방에 파키스탄 여행 안내 책자가 비치된 것을 보고 주인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다.
거실의 팔각형 대형 유리 테라스를 통해 내다보이는 정원은 파란 하늘과 함께 한 폭의 그림이다. 라호르 제 2의 대도시는 영국의 지배로 빅토리아 건축물이 많고 인도와 가장 연관이 깊은 도시이다.
라호르 박물관에는 간다라 불교미술과 인더스 유역의 출토품 돌은 물론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중국 도자기, 비단 등 예술품으로 가득 차 있다. 결혼식에 입고 갈 의상을 사러 시장에 갔다. 수 많은 의류가게는 길거리에서 염색을 하고 있고 걸인 차림의 행인들의 거리를 메워 무질서 하게 보였다.
라호르 2
시장의 골목 안은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로 가득 차 있다.
집에서 가져온 무늬를 옷에다 수를 놓아 주는 것이 이채롭다. 저녁에 달리 갈 곳도 없던 차에 집주인이 아메리칸 클럽에 가자고 해 흔쾌히 받아 들였다. 다이너 같은 식당이 있고 수영장과 테니스 코트, 할로윈 장식으로 꾸며진 클럽이 이색적이다.
어디를 가나 경찰들이 삼엄한 경비를 한다. 다음 날 결혼식 전 축제 행사인 맨디에 갔다. 신부는 행복을 상징하는 노란 옷을, 신랑은 흰 옷을 입고 있다. 남자석과 여자석이 구분 되어 있고 꽃들로 장식된 의자와 풀밭에 깔린 카페트 위에 둥근 쿠션을 놓고 기대어 앉았다.
신부 친구들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흰 옷을 입은 신랑 친구들과 어울려 춤을 추기 시작한다. 다그마는 남녀가 같이 춤추는 것을 처음 본다고 한다. 다그마는 지난 번에 간 맨디는 오늘처럼 자연스럽지 않았다고 했다.
이 곳의 결혼식은 99%가 중매로 이루어지며 카스트 제도의 경제력에 따라 집안끼리 맺어진다고 한다. 여자는 경제적으로 독립을 할 수 없기에 아들을 선호하는 사상이 만연되어 있고 남자는 생산자, 여자는 소비자라는 생각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 같다. 풀밭 저 편에 앉아있는 남루하고 바짝 마른 하인들이 청춘 남녀들이 춤추는 것을 부러운 듯 쳐다보고 있다.
춤추는 이들은 부잣집 신분을 나타내듯 얼굴이 희고 살이 쪄 보인다. 머리부터 보석으로 치장해 화려함이 축제의 화려함을 더 해준다. 식전 행사에서 해나라는 풀을 물에 타서 신부의 손등에 부어주며 잘 살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돈을 주기도 한다. 신부의 할아버지가 영국계 피가 섞여서 부유해 보이고 신부의 어머니는 실크 사라옷과 파이프에 담배를 물고 악어 가방을 든 채 분주하다.
행사에서는 콜라와 빵 등 계속 먹을 것이 나온다. 밤 12시가 넘었지만 축제의 분위기는 수그러들지 않는다. 다음날 직접 결혼식에도 갔다. 부유한 집안끼리의 결혼식이라 수 많은 하객들로 붐볐다.
비디오 카메라 기사와 사진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신랑 신부 가족들도 사진 찍기에 한창이다. 결혼하지 못한 처녀들은 선을 보이기에 좋은 장소라는 인식 때문에 한껏 멋을 부리고 참석한다고 한다.
여기저기에서는 부를 상징하듯 특수층만이 가지고 있는 핸드폰 소리가 양복을 말끔히 차려 입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울린다. 신부는 새색시처럼 눈을 내려 뜬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머리에 꽂은 금 핀들이 유난히 반짝거린다.
벨라히사르 포트
‘벨라히사르 포트’라는 15세기 성으로 향했다. 지금은 정부 공공 사무실로 사용되기 때문에 군인들이 항상 경비를 서고 있다. 성 위로 올라가니 페샤와르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수 많은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있는 장터의 모습과 나무로 정교하게 만든 발코니가 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뿌연 먼지 속에서도 버티고 서 있다.
페샤와르 도시를 한참동안 구경하고 나니 다그마의 집으로 가기위해 공항으로 갈 시간이 다 되었다.
그러나 날씨가 나빠 비행기 운행이 중단되어 미니밴을 빌려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이 곳 사정을 잘 아는 뮤니엘 덕분에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종합 터미널에 도착, 버스를 탔다. 우리들은 지친 몸을 풀기 위해 한 자리씩 차지하고 누웠다.
한참 달리는 도중 운전수가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메카 쪽을 바라보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해질 때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알라신을 향하여 드리는 경배가 생활의 일부가 되어있는 저들에게는 신을 경배하며 복종하는 모습이 마치 나약한 인간을 극복하려는 듯해 인상적이었다.
하늘에 뜬 보름달이 아주 환하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는 초생달이 었고, 훈자에서는 반달이더니 이제 보름달이 된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달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이다.
다그마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고 나니 허기가 느껴진다. 북부 독일인들은 주식으로 감자를 즐겨 먹기 때문에 이날도 찐감자와 콩이 섞인 야채 사라다로 저녁을 해결했는데 배고픈 김에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가족들에게 안부전화를 했다. 딸아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생기 발랄하다. 집안 정은 하지 말고 몸 건강히 잘 지내라는 남편의 듬직한 목소리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일요일 아침 이슬라마바드의 시장에 갔다. 골동품 구경을 하면서 시장을 돌아다녀 보니 그 동안 여기저기에서 샀던 모든 물건들이 이곳에 전부 있는 것이다. 주중에는 가게를 열고 일요일이면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장사꾼들은 다른 곳 보다 아주 싼 가격으로 물건을 판다고 한다.
다그마는 이곳의 시장 사람들은 인정이 많아 더 싼 가격으로 흥정 하기도 쉽다고 귀뜸해 준다. 이곳에는 진귀한 물건을 사러 나온 외국인들도 많고 이색적인 시장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는 관광객들도 많아 시장이 낯설지 않다.
지난번에 주문한 맞춤복과 신발을 찾으러 가는 길에 익숙한 라틴계 음악이 들려온다. 라틴계 가수로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리키 마틴의 노래 ‘리빙 라 비다 로키’가 흥겹기만 하다. 수도답게 고풍스러운 모습과 현대적 감각이 살아있는 이슬라마바드는 매우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페샤와르(무굴제국도시)
마지막 여행지 페샤와르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다그마의 하인 뮤니엘은 비행기 타는 것이 처음이라며 긴장을 한다. 공항에 내려 오토릭쇼(삼륜 자동차)를 탔다. 거울 조각과 울긋불긋한 꽃 그림으로 장식한 오토릭쇼는 마치 꽃마차를 연상케 한다. 영어를 못하는 맨발로 운전하는 기사에게 뮤니엘은 우리가 온 이유를 설명해준다.
무굴제국시대 1670년에 세워진 이슬람 사원 모스크는 하얀 건물 양쪽에 솟은 첨탑의 기하학적인 멋을 한껏 자랑한다. 안다샤르 바자르로 향했다. 미로처럼 좁은 길과 오래된 창문의 곡선, 나무로 장식된 가게마다 남자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염소를 몰고 나온 농부가 당나귀 위에 짐을 싣고 흰 수염을 헤나로 붉은색으로 물들인 채 한껏 멋을 부렸다.
차이하네에 쌓여있는 찻잔들을 배달가는 티 보이가 바삐 들어가는 모습도 보인다. 모자 파는 곳과 샌들을 타이어를 잘라 만든 가게 등이 줄지어 있다. 뮤니엘이 있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만 아는 구석진 가게들에 들려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할 수 있어 너무나 좋다. 시장 안에서 정신없이 돌아 다니다 예배 시간이 되었다. 뮤니엘이 바로 옆에 있는 모스크에 기도를 하러 가길래 우리들도 허락을 받아 모스크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수 백 명의 남자들이 한결 같은 민속 의상차림으로 엎드려 기도를 한다.
우리들은 신발을 벗고 조용히 다니며 주민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봤다. 이슬람 사원 특유의 기하학적 문양과 색채가 선명하게 보인다. 피안의 세계에 들어온 듯 싶다.
알라신을 상징화하려는 화려한 사원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챠도르로 얼굴을 가리고 가는 여인들이 무리지어 앉아있다.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그물과 같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다닌다. 챠도르를 파는 가게에 들려 우리 셋 모두는 한 개씩 샀다. 이것을 얼굴에 두르니 창살없는 여인의 감옥이라는 생각과 달리 의외로 편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프칸인이 파는 보석가게에 가니 산호와 은으로 된 목걸이가 눈에 익다.
그리니치 빌리지 소호에서 본 것이다. 가격은 미국에 비해 3배 가까이 비싸지만 1백 달러를 주고 목걸이를 샀다. 쿠데타 이후로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곳도 없고 환전 창구도 없어 늘 여행을 다닐 때는 현금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온갖 종류의 차가 푸대에 담겨져 있다. 향이 좋은 몇 개를 고르고 나니 마치 시골 장터에 장을 보러 나온 느낌이 든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실내 장식이 화려한 파키스탄 전통 요리 식당을 갔다. 쿠션과 카페트가 최상품으로만 깔려있고 조명이 벽돌과 잘 어우러져 있다. 식당에서는 요술램프 같은 긴 주전자와 손 씻는 대야를 사람마다 준다. 낮은 원목 의자 위에 앉아 쿠션에 기대니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여인을 떠오르게 한다. 양고기와 향료가 듬뿍 담긴 소고기 야채 볶음을 뜨거운 차와 같이 먹었다.
회색 빛 겨울 속의 햇살 1997
1. 창 밖에 보이는 쓸쓸한 겨울 숲은 을씨년스럽게 회색을 띠고 있다. 벌거벗은 나무의 앙상함은 왠지 알 수 없는 슬픔과 우울을 안겨다 준다. 숲을 응시하며 침묵 속에서 흐르는 허무감이 밀려온다. 겨울 햇살은 방 안 가득히 있는데 창 밖은 너무 쓸쓸하다. 겨울철이면 벽보에 붙은 불조심 포스터 같은 불길 그림 속에 한국 경제 위기 난을 보았다. 빨간색의 불길이 타버려 재가 되 버리기 전, 불씨가 붙어서 다시 한강의 기적 부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강 건너 불구경일 수는 없다. 주위에서 방학이면 서울서 온 손님 치르기도 잠잠하다. 이곳에 사는 우리들은 반가움과 떠난 뒤 그 자리의 상대적 빈곤감에 위축하고 이민이라는 일생일대의 선택의 실수를 했나 했는데 교포, 지사, 교육이민 등급을 나누어 분리해 놓으며 위화감을 조성하여 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사고방식이 달랐다. 그 기준가치는 물질이었다. 새벽을 달려 열심히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삶을 비하시키고, 근무기간 동안 즐길 풍요를 누리고 돌아가는 지상사인들을 부러워하며 몇 년 사이 늘어난 교육이민의 바람을 불어 놓았다. 이루어 놓은 것을 누리기전에 잊어서는 안 되는 이민역사의 뿌리를 내린 하와이에 온 할아버지의 땅.
한국 전쟁 후 국제 결혼하여 눈물로 모아 만든 달러를 송금해 가족들을 초청하여 힘을 모아 예전의 특수층 해외여행과 유학이 일반화 되는 것이 시기상조라는 점이 우리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외국기관단체에서 선진국 콤플렉스에서 오는 자축의 사치풍조 일류병을 염려했다.
거품 경제는 꺼지고 미국에서는 살 것이 없고 공기 하나는 좋다며 유럽으로 쇼핑을 가고, 최고급 브랜드만 찾기에 우리 역시 한국 갈 때 선물을 고민하기도 했다.
2. 샴페인 잔은 비워지고 방울은 무지갯빛을 보이더니 커질 대로 커져 터져버렸다. 허공으로 사라진 환상의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아이들에게 북한 식량난 모금과 한국 달러 보내기를 어떻게 우리는 설명 해 주어야 하는가? 암담한 현실의 극복 속에서 정치 드라마의 세 주인공의 희비의 쌍곡선도 다가오고 있다. 저무는 한 해가 지나고 나면 밝아오는 새해가 있듯이, 세상사 모든 일에는 과정의 연속 속에서 경험한 자만이 터득할 수 있는 지혜가 주어진다. 물질만능의 만족보다는 빈곤 속에서 얻어지는 힘과 넘치는 것 보다는 조금 모자람 속에서 창조적인 생각이 형성되는 것을 역사 속에서 배워왔듯이…… 스산한 겨울 풍경 속에 휘몰아치는 바람과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투명한 하늘과 햇살의 묘한 대조 속에서 무수한 생각을 그 속에 담아 고국에 실어 보낸다.
장님 조각가가 빚어준 선물 1997
봄의 따사로운 기운이 나를 휘감고 꽃들의 향연으로 들뜬 마음이 되어… 남편이 세미나 때문에 저녁을 함께 하지 못하는 일상적인 틀에서 벗어나는 오후에 저녁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시간적 자유로운 기분과 봄 날씨로 한국 학교가 끝난 뒤, 발길이 아니 차선이 갈림 길에서 9A 허드슨 강변을 따라 차들과 함께 흘러갔다.
큰 아이는 12살이 되면서 멋과 유행에 민감해지며 세븐틴 잡지를 구독해 보기도 하고, 한국 잡지 쎄씨에 나오는 패션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 가게에 가면 책을 뒤적거리며 재미 있어 한다.
70년대 유행이 다시 돌아온 요즘, 노란 스마일 마스크, 꽃핀, 통바지, 색양말, 통굽, 플라스틱 큰 반지 등을 보며 그 나이 나의 교복, 단발머리, 책가방, 통제된 규율을 생각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30년 세월이 미국이지만, 한국 역시 교복 자율화와 머리 스타일도 다양하여 내가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온 재일교포 학생들 같아 보였다. 5월에 있을 Dance Party에 입고 갈 옷을 궁리하는 큰 딸 리나가 대견해 보이기도 하고, 그 아이의 즐기는 듯한 학창 시절 서구 문화에 매료되서 나의 갈등이 해소 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한다.
작은 딸 데나는 집에 일찍 가서 자전거와 롤러브레이드를 탈 생각에 맨하탄 소호 구경에 관심도 없다. 오늘은 운 좋은 날. 스프링 스트릿에 들어서자 마자 파킹 자리가 보였다. 오픈 카페에 앉아 있는 수 많은 이들. 간혹 카메라를 메고 열심히 다큐멘터리 현장을 찍는 그들을 상관도 안하는 뉴요커들 사이로 나는 두 딸을 데리고 그리니치 빌리지로 들어섰다.
두 아이들에게 사전 약속을 했다. 뉴욕은 더 비싸고 옷은 세금을 떼어가니 Window Shopping을 하며 어떤 물건이 있나 보고 좋은 아이디어를 갖기로 하자. 우리는 갤러리, 구슬가게, 액세서리 가게, 엔틱 가게에 들렀다. 동물 뼈, 새 깃털, 해골이 진열 되어 있는 그 가게에는 아이들에게만 starfish 한 개씩을 나누어 주었다. 너무나 인상적인 자연사 박물관 같은 곳이었다.
길가 코너에 프리마켓이 있어서 가보니, 구슬가게에서 $20씩 하는 공구들이 먼지는 끼어있고 포장은 안되어 있어도 가격이 절반 이하여서 나는 2개를 샀다. 아이들은 너무나 다른 가격에 의아해 하며 렌트비와 인건비, 포장, 디스플레이비가 다 포함되니 가격이 비싸진다고 설명해 주니 이해를 하는 듯 했다. 큰 딸 리나가 사고 싶어 하는 형형색색의 티셔츠가 만국기처럼 봄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언뜻 보기엔 그럴 듯하나 뒤집어보니 박음질이 좋지 않아서 빨면 모양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사지 말자 하니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다. 나 역시 예전에 부모님과 쇼핑을 가면 내 취향보다는 단정하고 오래 입을 수 있는 것을 사주셔서 같이 가기가 싫었던 기억과 친구들과 가면 서로 부추기면서 설혹 비싸게 사더라도 기분 좋게 웃고 잡담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다녔던 추억이 떠올랐다. 리나가 원하던 그 옷을 사줄까 하다가 언젠가 한 번은 부딪힐 과제인 것 같아 노파심에 잔소리를 이 기회에 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서, “리나, 엄마는 언제나 세일, 세일만 찾지. 그런데 충동구매로 사면 나중에 후회가 되. 몇 가게 더 가보고 우리 그때 결정하자. 나중에 리나가 커서 친구들하고 쇼핑을 갈 때에도 지금처럼 마음에 든다고 그 자리에서 사면 다른 곳에서 더 좋은 걸 살 기회를 잃을 수도 있잖니? 그러니까 늘 살 것을 적어두고 눈으로 몇 개 보고 난 다음 결정하면 더 애착이 가고 후회가 없단다. 시간 낭비가 된다면 신문, 잡지에서 가격을 조사하고 사면 돼. 나도 너처럼 그 나이 때, 할머니하고 쇼핑 가면 너무나 화날 때 많았어. 그런데 지금 그 기억이 나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구나. 너도 크면 지금 이 때가 생각날거야. 이제 너하고 나하고 시작이구나. 프리틴에 들어가면서 강한 의견과 뚜렷한 자기 주장이 나와 감정대립이 될 때 우리 언제나 이렇게 이야기 하자. 그리고 엄마는 약속하면 꼭 사주잖니?"
데나는 목이 마르고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옆에서 우리들 이야기에는 관심도 없이 졸라댄다. 깨끗이 진열된 샐러드 바, 한국 가게, 델리에 가서 아이스크림과 샐러드, 김밥을 사고 길가 계단에 앉아서 먹고 나서 갤러리로 갔다. 하얗게 칠한 방에 한 노인이 하얀 옷을 입고 손으로 여러가지 모양을 빚고 있었다. 선반에는 이미 전에 만들어 놓은 여러 형태의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노인 옆에는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아, 장님이구나! 저렇게 진지하게 만들고 있다니. 가위, 강아지, 새 등을 어떠한 감각으로 빚어냈을까. 우리 인기척에 손을 내밀어 아이들에게 악수를 건낸다.
이름이 뭐니? 나는 이렇게 만드는 것을 좋아해. 조각을 전공했지. 나에게도 두 딸들이 있단다. 무엇을 만들어 줄까? 두 아이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진지한 모습으로 장님 조각가의 손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리나에게는 별을 만들어 주고, 데나에게는 손바닥을 만들어 주고 나에게는 하트 모양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물어 그 형상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400도의 오븐에 15분 구워서 놓으면 조각품이 된다는 설명을 듣고 우리는 그 방에서 나왔다. 살아있는 한 예술가의 혼이 담긴 조그만 작품을 안고 나는 두 아이에게 큰 마음의 선물을 준 그 장님 조각가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현대 미술이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작가의 의도가 우리 대중을 우롱할 때도 있지만, 다른 갤러리에서 본 그림들, 작가의 고뇌와 그들이 수행 하듯 자기의 세계를 관찰하여 표현한 그 무한한 색채와 선들을 우리는 이해하며, 그들이 해온 수 많은 선들의 흔적, 그림을 보았을 때 조금은 이해를 하곤 한다.
시각적 차이도 있겠지만, 리나는 나에게 엄마 그림은 boring해. 늘 산, 마음, 한글, 물, 구름, 자연뿐이잖아. 나는 요즘 나의 작업의 이미지는 그렇게 표현하고 내 그림에 담고 싶어. 그 의미를 언젠가 너도 알게 되겠지.
장님 작가가 우리에게 준 큰 마음의 선물은 아이에게 티셔츠 구매욕을 잠재우게 하고 더 큰 인간의 의지와 한계에서 머무르지 않고 창작을 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그 작가의 존재가 요즘이 시도하는 설치미술의 한 테마로 우리 마음속에 남는 것이다. 영원한 마음의 기억 장치에 간직하고픈 장면인 것이다.
리나는 나에게 다가와, “엄마, 아까는 미안했어요. 이제는 사고 싶은 생각이 안나요.” 하면서 나에게 먼저 안겨 온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안아주는 것이다. 나보다 커진 몸에 안기면서 찡해지는 내 마음은 몸도 마음도 잘 자라고 있는 딸아이에게 고마운 생각뿐이다. 앞으로 커가면서 넘어야 할 수 많은 산들을 이렇게 한 고개, 고개 넘어가는 거겠지… 작은 아이의 손목에 아까 길에서 산 형형색색으로 꼬아 짠 실 팔찌가 꺼져가는 봄빛 햇살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버릴 것이 없어요 1997
재생 예술 반을 시작하면서 일주일 동안 만든 것을 가지고 학교에 간다. 나 혼자만의 즐거움이 아니라 학부모님들과 같이 하기에 더욱 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고 주위에 쓸모 없는 것들을 어떻게 다시 만들어 볼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한다.
아이를 셋 둔 학부형 한 분은 숙제를 너무 잘 해 오신다. 물에 지워지지 않는, 유리에 그리는 물감으로 오래된 컵에 예쁜 꽃들을 그려오시고, 낡은 청 자켓에 파워레인져 그림을 오려 붙여 새 옷처럼 만들거나, 망가진 액세서리를 붙여서 핀을 만들어 오시기도 한다. 이렇게 소품을 만드는 것을 보신 남편 분께서 선물 가게를 소개해 줄 테니 더 잘 만들어 보셨다고 한다. 막내가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ㅓ린 아이이지만 그 열의와 성의가 대단하시다. 워낙 붓 끝 처리를 날렵하게 잘 하시고 감각이 있으시다.
아이들이 잠들고 난 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무언가 몰두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정신 건강상 좋을 뿐만 아니라 손을 움직여 만드는 소품을 완성했을 때 만드는 자만이 아는 희열이 있는 것이다. 많은 분들의 시간이 없다는 말은 그 시간을 만들려고 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한 학부형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선생님은 버릴 것이 없지요?”
“네, 전 버릴 것이 없어요.”
예를 들면, 두 딸 아이 머리를 자르고 나면 다 모아서 짧은 것은 바늘꽂이 속으로 하고 긴 머리는 땋아서 모아두고 있다. 예전에 엔틱 가게에서 본 빅토리아풍 브로치를 만들려고 한다. 나폴레옹 머리카락이 요즘 경매에 나와서 팔렸다고 하니 사람은 가도 머리카락은 남는가 보다.
작아진 옷은 같은 종류의 천끼리 모아서 조각이불, 쿠션, 단추를 만든다. 종이로 된 계란통은 물에 담근 뒤 믹서에 갈아 Hand Made Paper로 재생시킨다. 꽃이 시들면 가위로 잘라 책 속에 끼워 Book Marker를 만들고 오래된 카드도 같은 식으로 붙이면 된다. 정말 너무나 많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 주위의 모든 것에 생명이 있는 것 같다. 바닷가에 가면 모래를 담아와 주어온 조개와 접시에 담아서 그 옆에 불을 켜 놓으면 그 바닷가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산에 가서 주어온 이름 모르는 풀을 책 갈피에 끼워 판화를 해서 편지지를 만들기도 하고, 연극이나 영화를 본 티켓을 콜라주하여 액자에 넣어두고 바라볼 때마다 그때의 감동을 다시 가져보기도 한다. 미국 명절 때는 재생 예술 반 학부모님들과 함께 명절에 맞는 장식품을 만들어 집 안을 꾸미면서, 아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대화를 하며 분위기를 연출할 줄 아는 엄마가 되려고 한다.
또한 우리들이 실생활에서 늘 부딪히는 과제인 선물을 좀 더 Unique하고 값보다는 정성이 담긴 Hand Made로 한다. 카드는 1년 내내 필요한 것이니 우선 재료도 간편하게 종이와 봉투, 복합재료(단추, 핀, 천 조각, 포장지 등)를 붙여서 멋지게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이들 생일에 Craft Party를 열어 티셔츠에 헝겊 붙여 그리기, 천 가방에 그림 그리기 등을 하기도 한다는 학부모님도 계셨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이 되리라 본다. 같이 만들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돈으로도 살 수 없고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 엄마가 만들어준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알게 될 것 같다.
창조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생활 주변에 있음을 아이들에게 알리고, 우리들 자신도 무언가를 만듦으로써 생활의 활력소를 찾게 된다. 바쁜 생활에서도 바늘 한번 들 때마다 옛추억에 잠기고, 붓 한번 칠할 때마다 아직도 내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고, 글 한번 쓸 때마다 내 감정의 살아있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 누군가에게 주기 위해 무언가를 정성껏 만드는 모습은 실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Now is the Best Time 1997
They say that times gone by are beautiful
But I realize now that when the present passes
It becomes a forgotten past.
We all dream about a wonderful future to come
And live for that future, forgetting today
But that future is only today repeated
Now and this moment is the best time
The past and the upcoming future
Is made right in this moment
Don’t lose the precious time of today
Today becomes yesterday and tomorrow,
But this moment is forever
선생님, 우리 선생님 1997
우리 두 아이의 한국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셨던 허병렬 선생님의 올 해로써 교직 근속 50+1 주년 기념회전에 두 아이, 남편과 함께 갔었다.
선생님께서 일생 동안 교육에 바치신 그 모든 것들이 한 자리에 진열되었다. 어린 시절 흑백영화 같은 사진, 시화전, 책, 그림, 작품집, 저서, 상장과 트로피…… 뉴욕 한국 학교 25년의 발자취 그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분홍색 한복을 곱게 입으신 선생님과 사진도 찍고, 우리 이민 역사 속에 길이 남으실 훌륭하신 선생님의 발자취를 마음껏 축하해 드렸다. “엄마! 허 선생님은(교장 선생님 보다는 허 선생님으로 불리시기를 원하신다) 어릴 적부터 선생님이었어요? 어떻게 51년을 teaching하였어요?” 딸 아이가 숫자로 감이 오지 않는지 동심 어린 목소리로 물어본다. “그럼 age는 어떻게 돼?”
내가 허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85년 재미 한인학교에서 교사로써 허 선생님 반 공개수업에서 뵈었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단정하게 커트한 머리와 고우신 목소리로 학생마다 대답을 하면 일일이 칭찬을 해 주시며 교실 칠판에 판서하신 크고 똑바른 선생님만의 글씨체와 시청각 재료, 그림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래! 한국어 수업은 저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 나는 모법답안지를 가진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내가 그 방법을 모방전수 하려고 감히 노력했었던 기억이 난다.
큰 아이가 1학년으로 허 선생님 반이 되었을 때 나는 학부모가 되었었다. 허 선생님께서는 어느 누구 한 분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칭찬을 하신다. 학생, 부모, 교사, 세 사람의 삼위일체가 이루어져서 진정한 교육을 이루듯 깊고 애정 어린 눈길을 학생, 학부모에게도 보내시는 것이다.
“천 선생님, 아이들과 같이 자라세요. 아이들이 자랄 때 부모들도 배우세요. 커서 떠날 때 시작하려면 늦어요. 같이 배우면서 자라세요.”
나는 이 말씀을 영원히 내 가슴에 새겨 나의 삶의 목표로 삼을 것이다. 학교 교지에 실린 내 글을 보시며 글을 쓸 자질이 있다고, 계속 쓰라는 격려의 말씀에 힘을 얻어서 나는 교육현장에서 삶의 나날에서 느끼는 내 감정을 진솔하게 쓰기 시작했으며 아이들의 교육관에 대해서도 내가 배우기에 그들도 배우는 자세에 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도 우리 큰 딸의 한문 선생님으로써, 나의 인생 선배님으로써 나는 선생님을 만나는 토요일 아침을 기다린다. 내 책상 앞에 써서 붙여놓은 선생님의 젊으신 비견을 공개할까 한다.
저서: 사색의 콜라주에서 읽고 공감하여 나 역시 시도해 보려고 선생님의 건강, 젊음의 유지가 정신에서 몸으로 베어 나오게 하려고……
선생님의 다소곳이 인사하시는 모습, 두 눈은 상대방에게 띄지 않은 채 말씀하시며 공적으로는 너무나 맺고 끊는 것이 뚜렷하시며 사적으로는 자애로우신 점에서 사회 생활의 규범을 배웠다.
어른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젊은 친구들과 많이 사귄다.
내 자신의 일을 내 힘으로 처리하려 노력한다.
최근의 생활풍조에 관심을 가진다. (패션, 음악, 미술, 스포츠)
긍정적인 생활습관을 갖는다.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세계 정세, 사회 의식의 변화, 새로운 학설이나 기술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일소 일소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쏟는다.
선생님의 생활 철학에 깊은 공감과 박수를 보내며 마음속 깊이 사랑을 보낸다. 선생님, 우리 선생님. 뜻하고자 하시는 일들이 모두 이루어 지기를 바란다.
흙을 만지면서 1996
토방에서 도자기를 만들면서 손끝에 느껴지는 흙의 감촉은 유년시절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게 한다.한 폭의 그림 같은 정경이 스쳐 떠 오른다. 양지바른 대나무 숲 바람이 잘 부는 높다란 곳에 장독대와부엌 뒷문이 있다. 키보다 높은 장독들이 순서대로 놓여져 있고 작은 옹기들은 나란히 집 앞 들에 놓여있다. 우물가 옆으로 기와 담장너머로 과수원의 야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가리워져 있다.
방학이면 찾아가는 친가 댁이다. 짐을 풀기 전 조상들의 산소에 인사 드리러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면이웃 어른 대소 간에 인사를 하러 간다. 대청 마루에 짐을 아래칸 방으로 옮겨놓고 사 가지고 온 선물을부모님들께서 할아버지께 전하고 우리들은 왕 사탕을 들고 마당으로 나간다. 동네 아이들이 어느새 다모여서 숨바꼭질을 한다.
장독대는 자그마한 몸을 숨기기에 안성 맞춤이다. 손으로 두드리면 쨍- 하는 소리가 난다. 숨쉬는 그릇발효제품의 장독은 저장, 통기성이 좋아야 좋은 장이 담아진다는 어른들 말씀. 새끼 줄을 꼬아 맨 줄을만지면 망사 덮은 곳에서 장 냄새가 난다.
그 옆에 우물가에 굴 속 같은 곳을 내려다 보고 소리를 낸다. 얼굴이 비치고 하늘이 보인다. 두레박을떨어트려 첨벙 던져 물을 긷는다. 메아리 치는 소리가 들린다. 햇살에 이끼 낀 우물 아래 딴 세상이 있는 듯싶어 보인다.
할머니의 허리 춤에 장광 열쇠가 메어져 있다. 어두컴컴한 광에는 잔치에 쓰일 개다리 소반 상들이 층층이 놓여져 있고 젓갈용 옹기, 미숫가루, 찐 쌀이 담긴 질그릇 떡시루와 인절미 떡살무늬 틀이 걸려 있다. 바닥에 흙들이 검었으나 고왔던 기억이 난다. 나무 빗장 문을 닫으면 대 낮에도 암흑처럼 어두웠다.해가 서산으로 기울면 놀다가 엄마가 있는 부엌에 가면 선반찬장에 투박한 뚝배기 오지 그릇들 저편에는 백자그릇에 푸른색으로 한자가 써진 그릇들이 따로 가지런히 놓여져 있다. 가마솥에 불을 피우며 저녁을 준비하는 옆에 앉아서 타닥타닥 나뭇가지 쏘시개를 아궁이에 넣어본다. 가느다란 불길이 하얀 재위에서 다시 불이 붙고 가지를 태우는 것이 재미있어서 마구 가지를 넣었더니 불길이 죽으려 한다. 성가신지 방에 가서 콩나물에 물이나 주라고 할머니가 박 바가지에 물을 담아준다.
콩나물 시루가 구석에 보자기가 덮여 있다. 노란 콩 머리가 빽빽하게 있다. 하나를 꺼내보면 길다란 아래 부분이 실 뿌리처럼 길게 나 있고 비린 냄새가 났다.
벽장에는 상자에 기름 종이 바느질 통과 편지 통이 있다. 친척들이 보낸 편지 사진들 벽에 사진들 벽에사진 액자 속에 우리 형제들의 가족들의 사진이 웃고 있다. 옆 문에 문고리는 동그란 철 고리--당기면옆 방이 보인다.
찬장에 놋그릇들이 있으면 제사에 쓰이는 술잔들과 나무그릇은 소꿉놀이에 적격이었다. 작아서 갖고놀기에 좋았다. 벼루와 붓 지방에 쓸 종이들이 놓여있다. 끝 방에는 고모들이 두고 간 책과 앉은뱅이 재봉틀이 보인다. 건너 기와 채 방에는 요강이 마루에 있다. 밤에 화장실 가기 무서워 준비해 둔 것이다.할아버지가 낮잠 주무실 때 쓰는 목침이 반듯하게 윤이 난다. 밧데리를 묶은 라디오에서 노래가 흐른다. 아버지가 쓰시던 큰 책상이 있다. 유리 문으로 만들어진 마루문 너머 뒷문이 보이고 논이 펼쳐져 있다. 벼 이삭 스치는 소리가 바람결에 날려 들린다. 쓰윽쓱-
눈망울 큰 소 외양간에 망태기와 작두대, 지게, 여물통, 해골표가 그려진 농약들이 있다. 일꾼 방문이열면 시큼한 땀 냄새 대나무 옷걸이에 옷이 걸려있고 이불이 구석에 개어져 있다. 초롱불 밑에서 그림자 놀이와 장례식 때 종이 꽃 만드는 장인이 와서 얇은 종이로 색색의 꽃을 오리고 붙이는 것을 초당 방에서 보았다.
문 밖에 나오면 큰 감나무 옆에 정구지 밭이 있다. 뒷길에 토마토, 수박 밭을 따라가면 저수지 가기 전냇물 가에서 올챙이 잡는 것을 구경 하였다.
대나무 숲이 쳐진 뒷마당 쭉쭉 뻗은 대나무 사이에는 늘 소리가 들린다. 쏴-쏴 60년대 울산 풍경이다.공업단지로 변한 지금은 아득한 나의 기억의 강에서 스쳐 흘러갈 뿐이다. 자연 속에서 지내던 추억은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흘러도 생생하게 떠오르게 한다. 영원한 고향 “흙”, 그 흙을 만지면서 지, 풍, 화,수의 의미와 옛 정취 생활문화의 소산인 도자기의 역사적 배경과 사상, 청, 백, 질 그릇 옹기들이 할머니의 장독대와 세간살이 에서 배어져 나와있다. 역사적 배경으로도 경상도 쪽에 많은 가마가 있었고 흙들이 좋았다. 그 흙들을 비, 바람을 맞게 두었다가 개끼질을 하여 밟고 질 좋은 진흙이 되어서 점력 좋은 것으로 신비한 빛깔을 내는 소나무 재와 불의 마술로 도자기의 빛깔이 되어서 나온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2000년도 서서히 저물어 간다.
풍화 되는 시시각각의 풍경들을 시야로 부어 마신다. 전개되는 형상들이 어슴푸레 확대된다. 자기 성찰의 계기는 자연과 심호흡을 할 때 우주적 시선으로 사고의 전환점이 주어진다.
보편적이며 일상적 소재 너머에 숨겨진 의미를 깨닫고 싶다.
한 해를 종횡 무진하여 애착하며 지내던 것을 뒤돌아보며, 윤회의 무한성을 대 자연 속에서 찾게 된다.끝도 시작도 없다, 새로운 것은 없다, 우주 발생 이전 무질서 상태의 혼돈(Chaos) 세기말 적 현상은 시대마다 있었다.
허무의 극단주의는 초 현실주의, 미래주의 전위예술로 과거 전통을 거부하던 포스트 모던 이름에서 다원루 의가 매스컴 전자 미디어 국적없는 다 문화주의를 형성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이 테크노 아트로 예술 공학으로 테크노 음악의 기계에 저장된 빠르게 반복되는 비트 속에서 사이버 세대들은 중독되어 가고 있다. 더 빨리, 더 멀게 인터넷 사이버 공간 속에서 감각마비 현상을갖게 한다.
루쏘가 말했듯이 “자연으로 돌아가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본성의 회복은 대지의 품으로 안기는 그것이다.
‘벨라히사르 포트’라는 15세기 성으로 향했다. 지금은 정부 공공 사무실로 사용되기 때문에 군인들이 항상 경비를 서고 있다. 성 위로 올라가니 페샤와르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수 많은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있는 장터의 모습과 나무로 정교하게 만든 발코니가 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뿌연 먼지 속에서도 버티고 서 있다.
페샤와르 도시를 한참동안 구경하고 나니 다그마의 집으로 가기위해 공항으로 갈 시간이 다 되었다.
그러나 날씨가 나빠 비행기 운행이 중단되어 미니밴을 빌려 집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이 곳 사정을 잘 아는 뮤니엘 덕분에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종합 터미널에 도착, 버스를 탔다. 우리들은 지친 몸을 풀기 위해 한 자리씩 차지하고 누웠다.
한참 달리는 도중 운전수가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메카 쪽을 바라보며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해질 때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알라신을 향하여 드리는 경배가 생활의 일부가 되어있는 저들에게는 신을 경배하며 복종하는 모습이 마치 나약한 인간을 극복하려는 듯해 인상적이었다.
하늘에 뜬 보름달이 아주 환하다. 처음 여행을 시작할 때는 초생달이 었고, 훈자에서는 반달이더니 이제 보름달이 된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달을 통해 보고 있는 것이다.
다그마의 집에 무사히 도착하고 나니 허기가 느껴진다. 북부 독일인들은 주식으로 감자를 즐겨 먹기 때문에 이날도 찐감자와 콩이 섞인 야채 사라다로 저녁을 해결했는데 배고픈 김에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가족들에게 안부전화를 했다. 딸아이의 목소리는 여전히 생기 발랄하다. 집안 정은 하지 말고 몸 건강히 잘 지내라는 남편의 듬직한 목소리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일요일 아침 이슬라마바드의 시장에 갔다. 골동품 구경을 하면서 시장을 돌아다녀 보니 그 동안 여기저기에서 샀던 모든 물건들이 이곳에 전부 있는 것이다. 주중에는 가게를 열고 일요일이면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장사꾼들은 다른 곳 보다 아주 싼 가격으로 물건을 판다고 한다.
다그마는 이곳의 시장 사람들은 인정이 많아 더 싼 가격으로 흥정 하기도 쉽다고 귀뜸해 준다. 이곳에는 진귀한 물건을 사러 나온 외국인들도 많고 이색적인 시장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는 관광객들도 많아 시장이 낯설지 않다.
지난번에 주문한 맞춤복과 신발을 찾으러 가는 길에 익숙한 라틴계 음악이 들려온다. 라틴계 가수로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 리키 마틴의 노래 ‘리빙 라 비다 로키’가 흥겹기만 하다. 수도답게 고풍스러운 모습과 현대적 감각이 살아있는 이슬라마바드는 매우 이색적인 느낌을 준다.
페샤와르(무굴제국도시)
마지막 여행지 페샤와르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다그마의 하인 뮤니엘은 비행기 타는 것이 처음이라며 긴장을 한다. 공항에 내려 오토릭쇼(삼륜 자동차)를 탔다. 거울 조각과 울긋불긋한 꽃 그림으로 장식한 오토릭쇼는 마치 꽃마차를 연상케 한다. 영어를 못하는 맨발로 운전하는 기사에게 뮤니엘은 우리가 온 이유를 설명해준다.
무굴제국시대 1670년에 세워진 이슬람 사원 모스크는 하얀 건물 양쪽에 솟은 첨탑의 기하학적인 멋을 한껏 자랑한다. 안다샤르 바자르로 향했다. 미로처럼 좁은 길과 오래된 창문의 곡선, 나무로 장식된 가게마다 남자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염소를 몰고 나온 농부가 당나귀 위에 짐을 싣고 흰 수염을 헤나로 붉은색으로 물들인 채 한껏 멋을 부렸다.
차이하네에 쌓여있는 찻잔들을 배달가는 티 보이가 바삐 들어가는 모습도 보인다. 모자 파는 곳과 샌들을 타이어를 잘라 만든 가게 등이 줄지어 있다. 뮤니엘이 있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만 아는 구석진 가게들에 들려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구입할 수 있어 너무나 좋다. 시장 안에서 정신없이 돌아 다니다 예배 시간이 되었다. 뮤니엘이 바로 옆에 있는 모스크에 기도를 하러 가길래 우리들도 허락을 받아 모스크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수 백 명의 남자들이 한결 같은 민속 의상차림으로 엎드려 기도를 한다.
우리들은 신발을 벗고 조용히 다니며 주민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봤다. 이슬람 사원 특유의 기하학적 문양과 색채가 선명하게 보인다. 피안의 세계에 들어온 듯 싶다.
알라신을 상징화하려는 화려한 사원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챠도르로 얼굴을 가리고 가는 여인들이 무리지어 앉아있다.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그물과 같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다닌다. 챠도르를 파는 가게에 들려 우리 셋 모두는 한 개씩 샀다. 이것을 얼굴에 두르니 창살없는 여인의 감옥이라는 생각과 달리 의외로 편하다는 느낌이 든다. 아프칸인이 파는 보석가게에 가니 산호와 은으로 된 목걸이가 눈에 익다.
그리니치 빌리지 소호에서 본 것이다. 가격은 미국에 비해 3배 가까이 비싸지만 1백 달러를 주고 목걸이를 샀다. 쿠데타 이후로 신용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곳도 없고 환전 창구도 없어 늘 여행을 다닐 때는 현금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온갖 종류의 차가 푸대에 담겨져 있다. 향이 좋은 몇 개를 고르고 나니 마치 시골 장터에 장을 보러 나온 느낌이 든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실내 장식이 화려한 파키스탄 전통 요리 식당을 갔다. 쿠션과 카페트가 최상품으로만 깔려있고 조명이 벽돌과 잘 어우러져 있다. 식당에서는 요술램프 같은 긴 주전자와 손 씻는 대야를 사람마다 준다. 낮은 원목 의자 위에 앉아 쿠션에 기대니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여인을 떠오르게 한다. 양고기와 향료가 듬뿍 담긴 소고기 야채 볶음을 뜨거운 차와 같이 먹었다.
회색 빛 겨울 속의 햇살 1997
1. 창 밖에 보이는 쓸쓸한 겨울 숲은 을씨년스럽게 회색을 띠고 있다. 벌거벗은 나무의 앙상함은 왠지 알 수 없는 슬픔과 우울을 안겨다 준다. 숲을 응시하며 침묵 속에서 흐르는 허무감이 밀려온다. 겨울 햇살은 방 안 가득히 있는데 창 밖은 너무 쓸쓸하다. 겨울철이면 벽보에 붙은 불조심 포스터 같은 불길 그림 속에 한국 경제 위기 난을 보았다. 빨간색의 불길이 타버려 재가 되 버리기 전, 불씨가 붙어서 다시 한강의 기적 부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강 건너 불구경일 수는 없다. 주위에서 방학이면 서울서 온 손님 치르기도 잠잠하다. 이곳에 사는 우리들은 반가움과 떠난 뒤 그 자리의 상대적 빈곤감에 위축하고 이민이라는 일생일대의 선택의 실수를 했나 했는데 교포, 지사, 교육이민 등급을 나누어 분리해 놓으며 위화감을 조성하여 다 같은 한국인이지만 사고방식이 달랐다. 그 기준가치는 물질이었다. 새벽을 달려 열심히 살아가는 이민자들의 삶을 비하시키고, 근무기간 동안 즐길 풍요를 누리고 돌아가는 지상사인들을 부러워하며 몇 년 사이 늘어난 교육이민의 바람을 불어 놓았다. 이루어 놓은 것을 누리기전에 잊어서는 안 되는 이민역사의 뿌리를 내린 하와이에 온 할아버지의 땅.
한국 전쟁 후 국제 결혼하여 눈물로 모아 만든 달러를 송금해 가족들을 초청하여 힘을 모아 예전의 특수층 해외여행과 유학이 일반화 되는 것이 시기상조라는 점이 우리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외국기관단체에서 선진국 콤플렉스에서 오는 자축의 사치풍조 일류병을 염려했다.
거품 경제는 꺼지고 미국에서는 살 것이 없고 공기 하나는 좋다며 유럽으로 쇼핑을 가고, 최고급 브랜드만 찾기에 우리 역시 한국 갈 때 선물을 고민하기도 했다.
2. 샴페인 잔은 비워지고 방울은 무지갯빛을 보이더니 커질 대로 커져 터져버렸다. 허공으로 사라진 환상의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아이들에게 북한 식량난 모금과 한국 달러 보내기를 어떻게 우리는 설명 해 주어야 하는가? 암담한 현실의 극복 속에서 정치 드라마의 세 주인공의 희비의 쌍곡선도 다가오고 있다. 저무는 한 해가 지나고 나면 밝아오는 새해가 있듯이, 세상사 모든 일에는 과정의 연속 속에서 경험한 자만이 터득할 수 있는 지혜가 주어진다. 물질만능의 만족보다는 빈곤 속에서 얻어지는 힘과 넘치는 것 보다는 조금 모자람 속에서 창조적인 생각이 형성되는 것을 역사 속에서 배워왔듯이…… 스산한 겨울 풍경 속에 휘몰아치는 바람과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투명한 하늘과 햇살의 묘한 대조 속에서 무수한 생각을 그 속에 담아 고국에 실어 보낸다.
장님 조각가가 빚어준 선물 1997
봄의 따사로운 기운이 나를 휘감고 꽃들의 향연으로 들뜬 마음이 되어… 남편이 세미나 때문에 저녁을 함께 하지 못하는 일상적인 틀에서 벗어나는 오후에 저녁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시간적 자유로운 기분과 봄 날씨로 한국 학교가 끝난 뒤, 발길이 아니 차선이 갈림 길에서 9A 허드슨 강변을 따라 차들과 함께 흘러갔다.
큰 아이는 12살이 되면서 멋과 유행에 민감해지며 세븐틴 잡지를 구독해 보기도 하고, 한국 잡지 쎄씨에 나오는 패션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 가게에 가면 책을 뒤적거리며 재미 있어 한다.
70년대 유행이 다시 돌아온 요즘, 노란 스마일 마스크, 꽃핀, 통바지, 색양말, 통굽, 플라스틱 큰 반지 등을 보며 그 나이 나의 교복, 단발머리, 책가방, 통제된 규율을 생각하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30년 세월이 미국이지만, 한국 역시 교복 자율화와 머리 스타일도 다양하여 내가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온 재일교포 학생들 같아 보였다. 5월에 있을 Dance Party에 입고 갈 옷을 궁리하는 큰 딸 리나가 대견해 보이기도 하고, 그 아이의 즐기는 듯한 학창 시절 서구 문화에 매료되서 나의 갈등이 해소 되는 것 같은 착각을 하곤 한다.
작은 딸 데나는 집에 일찍 가서 자전거와 롤러브레이드를 탈 생각에 맨하탄 소호 구경에 관심도 없다. 오늘은 운 좋은 날. 스프링 스트릿에 들어서자 마자 파킹 자리가 보였다. 오픈 카페에 앉아 있는 수 많은 이들. 간혹 카메라를 메고 열심히 다큐멘터리 현장을 찍는 그들을 상관도 안하는 뉴요커들 사이로 나는 두 딸을 데리고 그리니치 빌리지로 들어섰다.
두 아이들에게 사전 약속을 했다. 뉴욕은 더 비싸고 옷은 세금을 떼어가니 Window Shopping을 하며 어떤 물건이 있나 보고 좋은 아이디어를 갖기로 하자. 우리는 갤러리, 구슬가게, 액세서리 가게, 엔틱 가게에 들렀다. 동물 뼈, 새 깃털, 해골이 진열 되어 있는 그 가게에는 아이들에게만 starfish 한 개씩을 나누어 주었다. 너무나 인상적인 자연사 박물관 같은 곳이었다.
길가 코너에 프리마켓이 있어서 가보니, 구슬가게에서 $20씩 하는 공구들이 먼지는 끼어있고 포장은 안되어 있어도 가격이 절반 이하여서 나는 2개를 샀다. 아이들은 너무나 다른 가격에 의아해 하며 렌트비와 인건비, 포장, 디스플레이비가 다 포함되니 가격이 비싸진다고 설명해 주니 이해를 하는 듯 했다. 큰 딸 리나가 사고 싶어 하는 형형색색의 티셔츠가 만국기처럼 봄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언뜻 보기엔 그럴 듯하나 뒤집어보니 박음질이 좋지 않아서 빨면 모양이 이상해질 것 같아서 사지 말자 하니 얼굴이 굳어지는 것이다. 나 역시 예전에 부모님과 쇼핑을 가면 내 취향보다는 단정하고 오래 입을 수 있는 것을 사주셔서 같이 가기가 싫었던 기억과 친구들과 가면 서로 부추기면서 설혹 비싸게 사더라도 기분 좋게 웃고 잡담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다녔던 추억이 떠올랐다. 리나가 원하던 그 옷을 사줄까 하다가 언젠가 한 번은 부딪힐 과제인 것 같아 노파심에 잔소리를 이 기회에 해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서, “리나, 엄마는 언제나 세일, 세일만 찾지. 그런데 충동구매로 사면 나중에 후회가 되. 몇 가게 더 가보고 우리 그때 결정하자. 나중에 리나가 커서 친구들하고 쇼핑을 갈 때에도 지금처럼 마음에 든다고 그 자리에서 사면 다른 곳에서 더 좋은 걸 살 기회를 잃을 수도 있잖니? 그러니까 늘 살 것을 적어두고 눈으로 몇 개 보고 난 다음 결정하면 더 애착이 가고 후회가 없단다. 시간 낭비가 된다면 신문, 잡지에서 가격을 조사하고 사면 돼. 나도 너처럼 그 나이 때, 할머니하고 쇼핑 가면 너무나 화날 때 많았어. 그런데 지금 그 기억이 나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구나. 너도 크면 지금 이 때가 생각날거야. 이제 너하고 나하고 시작이구나. 프리틴에 들어가면서 강한 의견과 뚜렷한 자기 주장이 나와 감정대립이 될 때 우리 언제나 이렇게 이야기 하자. 그리고 엄마는 약속하면 꼭 사주잖니?"
데나는 목이 마르고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옆에서 우리들 이야기에는 관심도 없이 졸라댄다. 깨끗이 진열된 샐러드 바, 한국 가게, 델리에 가서 아이스크림과 샐러드, 김밥을 사고 길가 계단에 앉아서 먹고 나서 갤러리로 갔다. 하얗게 칠한 방에 한 노인이 하얀 옷을 입고 손으로 여러가지 모양을 빚고 있었다. 선반에는 이미 전에 만들어 놓은 여러 형태의 소품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노인 옆에는 지팡이가 놓여 있었다. 아, 장님이구나! 저렇게 진지하게 만들고 있다니. 가위, 강아지, 새 등을 어떠한 감각으로 빚어냈을까. 우리 인기척에 손을 내밀어 아이들에게 악수를 건낸다.
이름이 뭐니? 나는 이렇게 만드는 것을 좋아해. 조각을 전공했지. 나에게도 두 딸들이 있단다. 무엇을 만들어 줄까? 두 아이는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진지한 모습으로 장님 조각가의 손에 시선을 박고 있었다. 리나에게는 별을 만들어 주고, 데나에게는 손바닥을 만들어 주고 나에게는 하트 모양을 만들어 주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물어 그 형상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400도의 오븐에 15분 구워서 놓으면 조각품이 된다는 설명을 듣고 우리는 그 방에서 나왔다. 살아있는 한 예술가의 혼이 담긴 조그만 작품을 안고 나는 두 아이에게 큰 마음의 선물을 준 그 장님 조각가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렸다.
현대 미술이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작가의 의도가 우리 대중을 우롱할 때도 있지만, 다른 갤러리에서 본 그림들, 작가의 고뇌와 그들이 수행 하듯 자기의 세계를 관찰하여 표현한 그 무한한 색채와 선들을 우리는 이해하며, 그들이 해온 수 많은 선들의 흔적, 그림을 보았을 때 조금은 이해를 하곤 한다.
시각적 차이도 있겠지만, 리나는 나에게 엄마 그림은 boring해. 늘 산, 마음, 한글, 물, 구름, 자연뿐이잖아. 나는 요즘 나의 작업의 이미지는 그렇게 표현하고 내 그림에 담고 싶어. 그 의미를 언젠가 너도 알게 되겠지.
장님 작가가 우리에게 준 큰 마음의 선물은 아이에게 티셔츠 구매욕을 잠재우게 하고 더 큰 인간의 의지와 한계에서 머무르지 않고 창작을 하는 진지한 모습을 보면서, 그 작가의 존재가 요즘이 시도하는 설치미술의 한 테마로 우리 마음속에 남는 것이다. 영원한 마음의 기억 장치에 간직하고픈 장면인 것이다.
리나는 나에게 다가와, “엄마, 아까는 미안했어요. 이제는 사고 싶은 생각이 안나요.” 하면서 나에게 먼저 안겨 온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안아주는 것이다. 나보다 커진 몸에 안기면서 찡해지는 내 마음은 몸도 마음도 잘 자라고 있는 딸아이에게 고마운 생각뿐이다. 앞으로 커가면서 넘어야 할 수 많은 산들을 이렇게 한 고개, 고개 넘어가는 거겠지… 작은 아이의 손목에 아까 길에서 산 형형색색으로 꼬아 짠 실 팔찌가 꺼져가는 봄빛 햇살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버릴 것이 없어요 1997
재생 예술 반을 시작하면서 일주일 동안 만든 것을 가지고 학교에 간다. 나 혼자만의 즐거움이 아니라 학부모님들과 같이 하기에 더욱 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고 주위에 쓸모 없는 것들을 어떻게 다시 만들어 볼까 하는 행복한 고민을 한다.
아이를 셋 둔 학부형 한 분은 숙제를 너무 잘 해 오신다. 물에 지워지지 않는, 유리에 그리는 물감으로 오래된 컵에 예쁜 꽃들을 그려오시고, 낡은 청 자켓에 파워레인져 그림을 오려 붙여 새 옷처럼 만들거나, 망가진 액세서리를 붙여서 핀을 만들어 오시기도 한다. 이렇게 소품을 만드는 것을 보신 남편 분께서 선물 가게를 소개해 줄 테니 더 잘 만들어 보셨다고 한다. 막내가 아직 걷지도 못하는 아ㅓ린 아이이지만 그 열의와 성의가 대단하시다. 워낙 붓 끝 처리를 날렵하게 잘 하시고 감각이 있으시다.
아이들이 잠들고 난 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무언가 몰두할 수 있는 일을 하면 정신 건강상 좋을 뿐만 아니라 손을 움직여 만드는 소품을 완성했을 때 만드는 자만이 아는 희열이 있는 것이다. 많은 분들의 시간이 없다는 말은 그 시간을 만들려고 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한 학부형께서 나에게 물으셨다.
“선생님은 버릴 것이 없지요?”
“네, 전 버릴 것이 없어요.”
예를 들면, 두 딸 아이 머리를 자르고 나면 다 모아서 짧은 것은 바늘꽂이 속으로 하고 긴 머리는 땋아서 모아두고 있다. 예전에 엔틱 가게에서 본 빅토리아풍 브로치를 만들려고 한다. 나폴레옹 머리카락이 요즘 경매에 나와서 팔렸다고 하니 사람은 가도 머리카락은 남는가 보다.
작아진 옷은 같은 종류의 천끼리 모아서 조각이불, 쿠션, 단추를 만든다. 종이로 된 계란통은 물에 담근 뒤 믹서에 갈아 Hand Made Paper로 재생시킨다. 꽃이 시들면 가위로 잘라 책 속에 끼워 Book Marker를 만들고 오래된 카드도 같은 식으로 붙이면 된다. 정말 너무나 많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 주위의 모든 것에 생명이 있는 것 같다. 바닷가에 가면 모래를 담아와 주어온 조개와 접시에 담아서 그 옆에 불을 켜 놓으면 그 바닷가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산에 가서 주어온 이름 모르는 풀을 책 갈피에 끼워 판화를 해서 편지지를 만들기도 하고, 연극이나 영화를 본 티켓을 콜라주하여 액자에 넣어두고 바라볼 때마다 그때의 감동을 다시 가져보기도 한다. 미국 명절 때는 재생 예술 반 학부모님들과 함께 명절에 맞는 장식품을 만들어 집 안을 꾸미면서, 아이들과 공감할 수 있는 대화를 하며 분위기를 연출할 줄 아는 엄마가 되려고 한다.
또한 우리들이 실생활에서 늘 부딪히는 과제인 선물을 좀 더 Unique하고 값보다는 정성이 담긴 Hand Made로 한다. 카드는 1년 내내 필요한 것이니 우선 재료도 간편하게 종이와 봉투, 복합재료(단추, 핀, 천 조각, 포장지 등)를 붙여서 멋지게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아이들 생일에 Craft Party를 열어 티셔츠에 헝겊 붙여 그리기, 천 가방에 그림 그리기 등을 하기도 한다는 학부모님도 계셨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아이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이 되리라 본다. 같이 만들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돈으로도 살 수 없고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 엄마가 만들어준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알게 될 것 같다.
창조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생활 주변에 있음을 아이들에게 알리고, 우리들 자신도 무언가를 만듦으로써 생활의 활력소를 찾게 된다. 바쁜 생활에서도 바늘 한번 들 때마다 옛추억에 잠기고, 붓 한번 칠할 때마다 아직도 내 자신이 존재하는 것을 느끼고, 글 한번 쓸 때마다 내 감정의 살아있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 누군가에게 주기 위해 무언가를 정성껏 만드는 모습은 실로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Now is the Best Time 1997
They say that times gone by are beautiful
But I realize now that when the present passes
It becomes a forgotten past.
We all dream about a wonderful future to come
And live for that future, forgetting today
But that future is only today repeated
Now and this moment is the best time
The past and the upcoming future
Is made right in this moment
Don’t lose the precious time of today
Today becomes yesterday and tomorrow,
But this moment is forever
선생님, 우리 선생님 1997
우리 두 아이의 한국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셨던 허병렬 선생님의 올 해로써 교직 근속 50+1 주년 기념회전에 두 아이, 남편과 함께 갔었다.
선생님께서 일생 동안 교육에 바치신 그 모든 것들이 한 자리에 진열되었다. 어린 시절 흑백영화 같은 사진, 시화전, 책, 그림, 작품집, 저서, 상장과 트로피…… 뉴욕 한국 학교 25년의 발자취 그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분홍색 한복을 곱게 입으신 선생님과 사진도 찍고, 우리 이민 역사 속에 길이 남으실 훌륭하신 선생님의 발자취를 마음껏 축하해 드렸다. “엄마! 허 선생님은(교장 선생님 보다는 허 선생님으로 불리시기를 원하신다) 어릴 적부터 선생님이었어요? 어떻게 51년을 teaching하였어요?” 딸 아이가 숫자로 감이 오지 않는지 동심 어린 목소리로 물어본다. “그럼 age는 어떻게 돼?”
내가 허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85년 재미 한인학교에서 교사로써 허 선생님 반 공개수업에서 뵈었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단정하게 커트한 머리와 고우신 목소리로 학생마다 대답을 하면 일일이 칭찬을 해 주시며 교실 칠판에 판서하신 크고 똑바른 선생님만의 글씨체와 시청각 재료, 그림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래! 한국어 수업은 저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 나는 모법답안지를 가진 것 같은 기쁨을 느꼈다. 내가 그 방법을 모방전수 하려고 감히 노력했었던 기억이 난다.
큰 아이가 1학년으로 허 선생님 반이 되었을 때 나는 학부모가 되었었다. 허 선생님께서는 어느 누구 한 분이라도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칭찬을 하신다. 학생, 부모, 교사, 세 사람의 삼위일체가 이루어져서 진정한 교육을 이루듯 깊고 애정 어린 눈길을 학생, 학부모에게도 보내시는 것이다.
“천 선생님, 아이들과 같이 자라세요. 아이들이 자랄 때 부모들도 배우세요. 커서 떠날 때 시작하려면 늦어요. 같이 배우면서 자라세요.”
나는 이 말씀을 영원히 내 가슴에 새겨 나의 삶의 목표로 삼을 것이다. 학교 교지에 실린 내 글을 보시며 글을 쓸 자질이 있다고, 계속 쓰라는 격려의 말씀에 힘을 얻어서 나는 교육현장에서 삶의 나날에서 느끼는 내 감정을 진솔하게 쓰기 시작했으며 아이들의 교육관에 대해서도 내가 배우기에 그들도 배우는 자세에 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지금도 우리 큰 딸의 한문 선생님으로써, 나의 인생 선배님으로써 나는 선생님을 만나는 토요일 아침을 기다린다. 내 책상 앞에 써서 붙여놓은 선생님의 젊으신 비견을 공개할까 한다.
저서: 사색의 콜라주에서 읽고 공감하여 나 역시 시도해 보려고 선생님의 건강, 젊음의 유지가 정신에서 몸으로 베어 나오게 하려고……
선생님의 다소곳이 인사하시는 모습, 두 눈은 상대방에게 띄지 않은 채 말씀하시며 공적으로는 너무나 맺고 끊는 것이 뚜렷하시며 사적으로는 자애로우신 점에서 사회 생활의 규범을 배웠다.
어른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는다.
젊은 친구들과 많이 사귄다.
내 자신의 일을 내 힘으로 처리하려 노력한다.
최근의 생활풍조에 관심을 가진다. (패션, 음악, 미술, 스포츠)
긍정적인 생활습관을 갖는다.
같은 이야기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세계 정세, 사회 의식의 변화, 새로운 학설이나 기술에 대한 책을 읽는다.
일소 일소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쏟는다.
선생님의 생활 철학에 깊은 공감과 박수를 보내며 마음속 깊이 사랑을 보낸다. 선생님, 우리 선생님. 뜻하고자 하시는 일들이 모두 이루어 지기를 바란다.
흙을 만지면서 1996
토방에서 도자기를 만들면서 손끝에 느껴지는 흙의 감촉은 유년시절의 기억 속으로 돌아가게 한다.한 폭의 그림 같은 정경이 스쳐 떠 오른다. 양지바른 대나무 숲 바람이 잘 부는 높다란 곳에 장독대와부엌 뒷문이 있다. 키보다 높은 장독들이 순서대로 놓여져 있고 작은 옹기들은 나란히 집 앞 들에 놓여있다. 우물가 옆으로 기와 담장너머로 과수원의 야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가리워져 있다.
방학이면 찾아가는 친가 댁이다. 짐을 풀기 전 조상들의 산소에 인사 드리러 산에 올라갔다 내려오면이웃 어른 대소 간에 인사를 하러 간다. 대청 마루에 짐을 아래칸 방으로 옮겨놓고 사 가지고 온 선물을부모님들께서 할아버지께 전하고 우리들은 왕 사탕을 들고 마당으로 나간다. 동네 아이들이 어느새 다모여서 숨바꼭질을 한다.
장독대는 자그마한 몸을 숨기기에 안성 맞춤이다. 손으로 두드리면 쨍- 하는 소리가 난다. 숨쉬는 그릇발효제품의 장독은 저장, 통기성이 좋아야 좋은 장이 담아진다는 어른들 말씀. 새끼 줄을 꼬아 맨 줄을만지면 망사 덮은 곳에서 장 냄새가 난다.
그 옆에 우물가에 굴 속 같은 곳을 내려다 보고 소리를 낸다. 얼굴이 비치고 하늘이 보인다. 두레박을떨어트려 첨벙 던져 물을 긷는다. 메아리 치는 소리가 들린다. 햇살에 이끼 낀 우물 아래 딴 세상이 있는 듯싶어 보인다.
할머니의 허리 춤에 장광 열쇠가 메어져 있다. 어두컴컴한 광에는 잔치에 쓰일 개다리 소반 상들이 층층이 놓여져 있고 젓갈용 옹기, 미숫가루, 찐 쌀이 담긴 질그릇 떡시루와 인절미 떡살무늬 틀이 걸려 있다. 바닥에 흙들이 검었으나 고왔던 기억이 난다. 나무 빗장 문을 닫으면 대 낮에도 암흑처럼 어두웠다.해가 서산으로 기울면 놀다가 엄마가 있는 부엌에 가면 선반찬장에 투박한 뚝배기 오지 그릇들 저편에는 백자그릇에 푸른색으로 한자가 써진 그릇들이 따로 가지런히 놓여져 있다. 가마솥에 불을 피우며 저녁을 준비하는 옆에 앉아서 타닥타닥 나뭇가지 쏘시개를 아궁이에 넣어본다. 가느다란 불길이 하얀 재위에서 다시 불이 붙고 가지를 태우는 것이 재미있어서 마구 가지를 넣었더니 불길이 죽으려 한다. 성가신지 방에 가서 콩나물에 물이나 주라고 할머니가 박 바가지에 물을 담아준다.
콩나물 시루가 구석에 보자기가 덮여 있다. 노란 콩 머리가 빽빽하게 있다. 하나를 꺼내보면 길다란 아래 부분이 실 뿌리처럼 길게 나 있고 비린 냄새가 났다.
벽장에는 상자에 기름 종이 바느질 통과 편지 통이 있다. 친척들이 보낸 편지 사진들 벽에 사진들 벽에사진 액자 속에 우리 형제들의 가족들의 사진이 웃고 있다. 옆 문에 문고리는 동그란 철 고리--당기면옆 방이 보인다.
찬장에 놋그릇들이 있으면 제사에 쓰이는 술잔들과 나무그릇은 소꿉놀이에 적격이었다. 작아서 갖고놀기에 좋았다. 벼루와 붓 지방에 쓸 종이들이 놓여있다. 끝 방에는 고모들이 두고 간 책과 앉은뱅이 재봉틀이 보인다. 건너 기와 채 방에는 요강이 마루에 있다. 밤에 화장실 가기 무서워 준비해 둔 것이다.할아버지가 낮잠 주무실 때 쓰는 목침이 반듯하게 윤이 난다. 밧데리를 묶은 라디오에서 노래가 흐른다. 아버지가 쓰시던 큰 책상이 있다. 유리 문으로 만들어진 마루문 너머 뒷문이 보이고 논이 펼쳐져 있다. 벼 이삭 스치는 소리가 바람결에 날려 들린다. 쓰윽쓱-
눈망울 큰 소 외양간에 망태기와 작두대, 지게, 여물통, 해골표가 그려진 농약들이 있다. 일꾼 방문이열면 시큼한 땀 냄새 대나무 옷걸이에 옷이 걸려있고 이불이 구석에 개어져 있다. 초롱불 밑에서 그림자 놀이와 장례식 때 종이 꽃 만드는 장인이 와서 얇은 종이로 색색의 꽃을 오리고 붙이는 것을 초당 방에서 보았다.
문 밖에 나오면 큰 감나무 옆에 정구지 밭이 있다. 뒷길에 토마토, 수박 밭을 따라가면 저수지 가기 전냇물 가에서 올챙이 잡는 것을 구경 하였다.
대나무 숲이 쳐진 뒷마당 쭉쭉 뻗은 대나무 사이에는 늘 소리가 들린다. 쏴-쏴 60년대 울산 풍경이다.공업단지로 변한 지금은 아득한 나의 기억의 강에서 스쳐 흘러갈 뿐이다. 자연 속에서 지내던 추억은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흘러도 생생하게 떠오르게 한다. 영원한 고향 “흙”, 그 흙을 만지면서 지, 풍, 화,수의 의미와 옛 정취 생활문화의 소산인 도자기의 역사적 배경과 사상, 청, 백, 질 그릇 옹기들이 할머니의 장독대와 세간살이 에서 배어져 나와있다. 역사적 배경으로도 경상도 쪽에 많은 가마가 있었고 흙들이 좋았다. 그 흙들을 비, 바람을 맞게 두었다가 개끼질을 하여 밟고 질 좋은 진흙이 되어서 점력 좋은 것으로 신비한 빛깔을 내는 소나무 재와 불의 마술로 도자기의 빛깔이 되어서 나온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2000년도 서서히 저물어 간다.
풍화 되는 시시각각의 풍경들을 시야로 부어 마신다. 전개되는 형상들이 어슴푸레 확대된다. 자기 성찰의 계기는 자연과 심호흡을 할 때 우주적 시선으로 사고의 전환점이 주어진다.
보편적이며 일상적 소재 너머에 숨겨진 의미를 깨닫고 싶다.
한 해를 종횡 무진하여 애착하며 지내던 것을 뒤돌아보며, 윤회의 무한성을 대 자연 속에서 찾게 된다.끝도 시작도 없다, 새로운 것은 없다, 우주 발생 이전 무질서 상태의 혼돈(Chaos) 세기말 적 현상은 시대마다 있었다.
허무의 극단주의는 초 현실주의, 미래주의 전위예술로 과거 전통을 거부하던 포스트 모던 이름에서 다원루 의가 매스컴 전자 미디어 국적없는 다 문화주의를 형성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이 테크노 아트로 예술 공학으로 테크노 음악의 기계에 저장된 빠르게 반복되는 비트 속에서 사이버 세대들은 중독되어 가고 있다. 더 빨리, 더 멀게 인터넷 사이버 공간 속에서 감각마비 현상을갖게 한다.
루쏘가 말했듯이 “자연으로 돌아가라”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본성의 회복은 대지의 품으로 안기는 그것이다.
아이디어 VS 스타일 1996
동 서양이 일일 문화권으로 지구촌은 점점 좁혀져 가고 있다. 인터넷은 정보망을 거미줄처럼 모든 정보를 주고 받고 있는 것이다. 각 나라마다의 고유 문화의 특색은 이제 그 민족만이 지키고 즐기는 것 만이 아니라 지구촌의 가족, 세계인들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전통과 관습을 지켜가며 변해가는 global view(지구적 안목)을 받아들여 시각을 넓히고 배우고 받아들여야 한다. 진보적인 개인들의 인식 변화 속에서 배타주의에서 모든 문화를 이해하는 다 문화를 즐길 줄 아는 다원주의의 시대가 대중 문화화 됐다.
포스트 모던 시대의 특징은 다원주의적 시각이었다. 이미 한 세기 이전에 동 서의 교류로 파리화단의 인상파 주의들은 동양의 기법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화폭에 담고 작업을 시도하였다. 고흐와 모네는 수 많은 습작을 묘사하여 새로운 자신들의 화풍을 미술사에 남긴 것이다.
다원주의의 시각은 fusion(융합) 스타일로 보다 많은 문화를 알고 나서 자신들의 아이디어로 재 창조 되는 것이다. 문화는 단시일에 생기거나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대와 세대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일상의 생활 속에 녹아 내려서 문화의 양식으로 자리를 굳혀가는 것이다.
생각은 빛보다 빠르게 우리들에게 주어진다. 그 생각의 근원은 잠재적으로 선천적인 자양분 부모의 유전인자와 환경적 유전인자로 뼛속 깊숙이 밴 국민성으로 주어지며 지구촌 어디서 사나 이민 몇 세대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윤회되는 대물림 속에서 주어진다.
세계 각 국에 자리잡고 사는 한민족들은 이제 자리매김을 문화로 승부해야 한다. 언어+음식=문화, 한국어를 할 줄 알며, 한국음식을 만들 줄 알고, 역사와 문화 예술을 즐길 줄 아는 진보된 의식 있는 한국인이 되야 한다.
뉴욕은 다문화의 집산지이다. 이민자들이 지금도 신대륙의 꿈을 품고 뉴욕으로 향해 오고 있다. 뉴욕의 매력은 다문화를 수용하는 것처럼 다양한 인종이 함께 하여 거대한 도시 코스모 폴리탄을 만들었다. 문화=언어+음식이듯이 거리 전체가 다문화의 총 집결지가 되어서 세계의 명소 대도시로 문화 예술의 전당이 된 것이다.
1950년도부터 뉴욕화단에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밀려오고 터를 잡고 창작의 작업장으로 된 것은 자본의 물결과 다문화의 집산지가 되고 예술, 정치로 그들에게 기회의 장을 제공해 준 것 때문이다.
넘어야 할 벽, 깨어야 할 벽을, 절대 고독을, 창작열을, 예술의 혼을 화폭에 담고 고독과 절망의 늪에서 가난과 생활고에 치열한 투쟁을 하며 혼신을 화폭에 담고 수 없이 지우고 칠하고 부수고 절규하듯 영혼의 울부짖음을 담아서 창작행위를 선보이는 전시를 하는 것이다.
예술 지상주의로 새로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시도하는 작업들, 이미 해온 혹은 영향을 받은 형태에서 깨어나기 위해 시도하는 작품들, 남고 다른 것을 하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독특한 아이디어와 개성적인 스타일이 있어야 인정되고 부각되는 것이다.
그 영감과 이미지는 예술가들의 정신적인 모태인 고유문화 유산의 탯줄을 가져야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깊이 사유하고 자아를 찾고 그것을 자각할 때 작품화 된다. 총체적인 견해, 사고, 개념을 확고화하고 철학적인 사색이 주어져야 한다.
문명 이전에 인간들의 기호와 지형에서 주어지는 민족 고유의 춤과 노래가 있고, 그것을 기록하고자 표현하기 위해 돌 위에 주술적인 기호로 그림을 그렸듯이, 세기가 흘러가도 이어져 가듯이, 자연 속에서 친화적이 되어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 근원적인 물음을 깨닫고, 명상을 하여 시공간을 넘나들며 사색을 하는 것이다. 고달프고 힘겨운 나날의 연속에서 열정을 품고 순례자처럼 구도의 길을 떠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애정 어린 격려는 문화시민으로 정서발달에 필요한 문화정책으로 작가들이 작품을 의욕적으로 할 수 있게 공공기관에서 후원해주며 작품전시를 열 수 있도록 문화 축제의 장을 만들어 주는 길인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물질적인 숫자 상승만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서 예술을 생활의 한 부분으로 즐기는 차원 높은 문화 한국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고유한 문화유산을 지구촌에 사는 모든 이들과 함께 공유하며 나누는 선진국의 국민으로써 한 걸음 나아가는 21C가 되는 것이 진정 잘 산다는 의미를 터득한 자만이 누리는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아는 자가 되는 것이다.
사춘기 vs 사추기 1996
7월의 햇살에 피어 오르는 연분홍의 장미는 순결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간밤에 내린 빗줄기를 머금고 잎새는 초록을 더하고 꽃봉오리 진 한 떨기 꽃송이가 막 피어나려고 한다. 마치 피어 오르는 딸 아이의 십대의 싱싱함을 보는 것 같다. 사십 대 중년의 나는 한 여름의 강렬한뙤약볕 아래 무더위와 장마를 지내고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사춘기이다.
꿈에 부풀어 희망에 찬 십대와 절망이 두렵지 않은 사십 대, 상승기와 하강기 신체의 발달과 노쇠 현상이 맞부딪혀 불협화음을 내기도 한다.
그 마찰의 과정은 사회에 나가기 전 배워야 할 사회적 인간 관계를 터득하기 위한 일종의 싸움이기에양보와 이해심을 몸소 터득해가는 투쟁이기도 하다. 사랑의 배움터랄 수 있는 가정에서 부모의 인생 지침서인 경험론을 거부하는 자아 개념이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사춘기 십대의 관심도는 오로지 친구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 받기를 원한다.
그들의 시야는 자신들과 통하는 동류 의식의 소유자들로부터의 인기로 좁혀진다.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총기 사건의 심리적 배경의 요인은 소외 당한 ‘왕따’ 주위의 친구 관계이다.
동성에서 이성 관계로 흥미가 전이 되면서 정신적인 반려자를 찾듯 이 두 음양의 성들이 맞물려서 천지를 이루고 삼라만상의 우주를 이루는 초자연적 현상이기도 하다.
‘남녀 칠세 부 동석’은 지남철처럼 자동적으로 반대극을 서로 만나려는 자장 현상을 막을 길이 없다는것을 알고 옛 조상님들이 방편책으로 만드신 조기 성교육인 것 같다.
십대들이 색다른 문화(옷, 음악, 춤, 영화, 운동, 컴퓨터)에 열광하는 것은 때로는 부모들과 기성 세대들문화에 대한 도전 의식이 스며 있기도 하다.
예전에 우리들이 그러하였듯이 구세대는 변화와 유행, 감각에 둔감하며 재미없는 세대로 알고 있었던것처럼 21세기에도 세대의 격차는 되풀이 될 것이다.
사춘기 자녀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권위의식을 버리고 수평관계에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자식에게까지 자기애가 넘쳐서 자신이 만든 틀에 집착하여 끼어 맞추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한 개체로서 스스로 가고자 하는 길을 가도록 언제나 뒷전에서 지켜봐 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내리 사랑이듯 끊임 없이 애정을 주되 너무 가까이 다가섬으로 인해 사랑의 화상을 입지 않게 간격을유지하는 중용의 미를 사추기에 이른 부모들은 배워나가는 것이다.
자연의 흐름 속에서 배운 지혜를 부모가 깨달으며 함께 세계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 인지도 모른다.
동 서양이 일일 문화권으로 지구촌은 점점 좁혀져 가고 있다. 인터넷은 정보망을 거미줄처럼 모든 정보를 주고 받고 있는 것이다. 각 나라마다의 고유 문화의 특색은 이제 그 민족만이 지키고 즐기는 것 만이 아니라 지구촌의 가족, 세계인들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전통과 관습을 지켜가며 변해가는 global view(지구적 안목)을 받아들여 시각을 넓히고 배우고 받아들여야 한다. 진보적인 개인들의 인식 변화 속에서 배타주의에서 모든 문화를 이해하는 다 문화를 즐길 줄 아는 다원주의의 시대가 대중 문화화 됐다.
포스트 모던 시대의 특징은 다원주의적 시각이었다. 이미 한 세기 이전에 동 서의 교류로 파리화단의 인상파 주의들은 동양의 기법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화폭에 담고 작업을 시도하였다. 고흐와 모네는 수 많은 습작을 묘사하여 새로운 자신들의 화풍을 미술사에 남긴 것이다.
다원주의의 시각은 fusion(융합) 스타일로 보다 많은 문화를 알고 나서 자신들의 아이디어로 재 창조 되는 것이다. 문화는 단시일에 생기거나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대와 세대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일상의 생활 속에 녹아 내려서 문화의 양식으로 자리를 굳혀가는 것이다.
생각은 빛보다 빠르게 우리들에게 주어진다. 그 생각의 근원은 잠재적으로 선천적인 자양분 부모의 유전인자와 환경적 유전인자로 뼛속 깊숙이 밴 국민성으로 주어지며 지구촌 어디서 사나 이민 몇 세대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윤회되는 대물림 속에서 주어진다.
세계 각 국에 자리잡고 사는 한민족들은 이제 자리매김을 문화로 승부해야 한다. 언어+음식=문화, 한국어를 할 줄 알며, 한국음식을 만들 줄 알고, 역사와 문화 예술을 즐길 줄 아는 진보된 의식 있는 한국인이 되야 한다.
뉴욕은 다문화의 집산지이다. 이민자들이 지금도 신대륙의 꿈을 품고 뉴욕으로 향해 오고 있다. 뉴욕의 매력은 다문화를 수용하는 것처럼 다양한 인종이 함께 하여 거대한 도시 코스모 폴리탄을 만들었다. 문화=언어+음식이듯이 거리 전체가 다문화의 총 집결지가 되어서 세계의 명소 대도시로 문화 예술의 전당이 된 것이다.
1950년도부터 뉴욕화단에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밀려오고 터를 잡고 창작의 작업장으로 된 것은 자본의 물결과 다문화의 집산지가 되고 예술, 정치로 그들에게 기회의 장을 제공해 준 것 때문이다.
넘어야 할 벽, 깨어야 할 벽을, 절대 고독을, 창작열을, 예술의 혼을 화폭에 담고 고독과 절망의 늪에서 가난과 생활고에 치열한 투쟁을 하며 혼신을 화폭에 담고 수 없이 지우고 칠하고 부수고 절규하듯 영혼의 울부짖음을 담아서 창작행위를 선보이는 전시를 하는 것이다.
예술 지상주의로 새로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시도하는 작업들, 이미 해온 혹은 영향을 받은 형태에서 깨어나기 위해 시도하는 작품들, 남고 다른 것을 하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독특한 아이디어와 개성적인 스타일이 있어야 인정되고 부각되는 것이다.
그 영감과 이미지는 예술가들의 정신적인 모태인 고유문화 유산의 탯줄을 가져야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깊이 사유하고 자아를 찾고 그것을 자각할 때 작품화 된다. 총체적인 견해, 사고, 개념을 확고화하고 철학적인 사색이 주어져야 한다.
문명 이전에 인간들의 기호와 지형에서 주어지는 민족 고유의 춤과 노래가 있고, 그것을 기록하고자 표현하기 위해 돌 위에 주술적인 기호로 그림을 그렸듯이, 세기가 흘러가도 이어져 가듯이, 자연 속에서 친화적이 되어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 근원적인 물음을 깨닫고, 명상을 하여 시공간을 넘나들며 사색을 하는 것이다. 고달프고 힘겨운 나날의 연속에서 열정을 품고 순례자처럼 구도의 길을 떠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애정 어린 격려는 문화시민으로 정서발달에 필요한 문화정책으로 작가들이 작품을 의욕적으로 할 수 있게 공공기관에서 후원해주며 작품전시를 열 수 있도록 문화 축제의 장을 만들어 주는 길인 것이다.
잘 산다는 것은 물질적인 숫자 상승만이 아니라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서 예술을 생활의 한 부분으로 즐기는 차원 높은 문화 한국인이 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고유한 문화유산을 지구촌에 사는 모든 이들과 함께 공유하며 나누는 선진국의 국민으로써 한 걸음 나아가는 21C가 되는 것이 진정 잘 산다는 의미를 터득한 자만이 누리는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아는 자가 되는 것이다.
사춘기 vs 사추기 1996
7월의 햇살에 피어 오르는 연분홍의 장미는 순결한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간밤에 내린 빗줄기를 머금고 잎새는 초록을 더하고 꽃봉오리 진 한 떨기 꽃송이가 막 피어나려고 한다. 마치 피어 오르는 딸 아이의 십대의 싱싱함을 보는 것 같다. 사십 대 중년의 나는 한 여름의 강렬한뙤약볕 아래 무더위와 장마를 지내고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사춘기이다.
꿈에 부풀어 희망에 찬 십대와 절망이 두렵지 않은 사십 대, 상승기와 하강기 신체의 발달과 노쇠 현상이 맞부딪혀 불협화음을 내기도 한다.
그 마찰의 과정은 사회에 나가기 전 배워야 할 사회적 인간 관계를 터득하기 위한 일종의 싸움이기에양보와 이해심을 몸소 터득해가는 투쟁이기도 하다. 사랑의 배움터랄 수 있는 가정에서 부모의 인생 지침서인 경험론을 거부하는 자아 개념이 확립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사춘기 십대의 관심도는 오로지 친구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 받기를 원한다.
그들의 시야는 자신들과 통하는 동류 의식의 소유자들로부터의 인기로 좁혀진다.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총기 사건의 심리적 배경의 요인은 소외 당한 ‘왕따’ 주위의 친구 관계이다.
동성에서 이성 관계로 흥미가 전이 되면서 정신적인 반려자를 찾듯 이 두 음양의 성들이 맞물려서 천지를 이루고 삼라만상의 우주를 이루는 초자연적 현상이기도 하다.
‘남녀 칠세 부 동석’은 지남철처럼 자동적으로 반대극을 서로 만나려는 자장 현상을 막을 길이 없다는것을 알고 옛 조상님들이 방편책으로 만드신 조기 성교육인 것 같다.
십대들이 색다른 문화(옷, 음악, 춤, 영화, 운동, 컴퓨터)에 열광하는 것은 때로는 부모들과 기성 세대들문화에 대한 도전 의식이 스며 있기도 하다.
예전에 우리들이 그러하였듯이 구세대는 변화와 유행, 감각에 둔감하며 재미없는 세대로 알고 있었던것처럼 21세기에도 세대의 격차는 되풀이 될 것이다.
사춘기 자녀들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권위의식을 버리고 수평관계에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알아야 한다. 자식에게까지 자기애가 넘쳐서 자신이 만든 틀에 집착하여 끼어 맞추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한 개체로서 스스로 가고자 하는 길을 가도록 언제나 뒷전에서 지켜봐 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내리 사랑이듯 끊임 없이 애정을 주되 너무 가까이 다가섬으로 인해 사랑의 화상을 입지 않게 간격을유지하는 중용의 미를 사추기에 이른 부모들은 배워나가는 것이다.
자연의 흐름 속에서 배운 지혜를 부모가 깨달으며 함께 세계를 살아가는 동시대인들 인지도 모른다.